★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전 후 - 해병교육단의 명교관 고철훈 대령

머린코341(mc341) 2016. 8. 6. 07:18

전 후 - 해병교육단의 명교관 고철훈 대령

 
 과거 전시 하의 해병학교나 해병교육단에는 30명 가량의 교관이 배치되어 특과사관후보생과 사관후보생(7기부터)들에 대한 교육에 임하고 있었고, 휴전 후 상륙전학교(초․고군반)와 지휘참모대학이 발족되는 과정에서는 약 50명으로 그 인원이 증원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특히 교관으로 임명되는 장교들은 타군 위탁교육이나 도미유학 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장교들이었다.

 
 그런데 해병학교가 발족된 51년 4월부터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고 진해교육기지사령부의 기능이 폐지될 때(73.10.10)까지 교수부를 거쳐간 그 많은 교관들 중 가장 오래도록 교관으로 근무했던 장교는 내리닫이 6년 간을 교관으로 근무했던 고철혼(高哲勳)대령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장 유능한 교관이란 평을 받기도 했던 그는 마치 교관 근무를 하기 위해 해병대 장교로서 존재한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51년 12월 해병학교의 제7기 사관후보생 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해병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었던 그는 그로부터 장장 6년 간 일반학을 비롯해서 화기학 전술학의 전 과목을 담당하는 전문교관으로 근무했던 것이며, 그 기간 중 교육을 받았던 사관후보생 기수는 8기에서 28기까지였다. 그리고 해군 사관학교에서도 약 2년 간 교관 근무를 했던 그는 약 2년 간의 교재처 근무기간 중에도 교관을 겸임하며 근무를 했으므로 약 10년 간을 진해에서 교관생활을 한 셈이었다.

 
 한편 재기(才氣)가 넘치는 위트 있는 다변가로서 강의 도중 요점(要点)을 반복 강조하는 논리 정연한 교수법으로 피교육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고철훈 대령은, 문희석 중령이 교수부장으로 있던 56년과 57년 6.25전쟁 발발 기념일에 마산여고 심양섭 교장의 요청으로 문희석 부장과 필자(당시 교육단 정훈참모․대위)와 함께 마산여고 강당으로 가서 2․3학년 학생들에게 합동 반공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심양섭 교장은 그 당시 교육단 참모장 안창관 중령의 은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교육단의 배테랑급 교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고월훈 중위는 필자가 편집인이 되어 월간 또는 계간으로 발간하고 있던 교육단 기관지인 ‘해병의 벗’(군사교육지)에 ‘絞首部(교수부)’란 제목의 수필을 게재하여 말썽을 빚은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는 필자의 저서인 ‘해병대의 전통과 비화’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그 교수부라는 한자가 가르칠 교의 교敎자와 줄 수의 수授자가 아닌 섬뜩한 느낌을 주는 목매 죽일 교(絞)자와 머리 수(首)자로 된 교수부(絞首部)로 짜 맞춘 것이 문제가 된 것인데 그 수필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내용으로 엮어져 있었다.

 
 즉 교육단으로 전입되는 장교들이 있을 경우 우수하고 유능한 사람들은 단 본부의 여러 참모부서에서 스카웃 해 가버리고 그 나머지 찌꺼기를 교수부 교관으로 발령을 내니 그러한 교관으로 어떻게 우수한 장교를 양성해 낼 수 있겠냐는 내용과 30명 정도의(그 당시의 교관수) 인원으로 일반학과 화기학 전술학 등 여러 학과목을 겹쳐서 맡아야 하는 교관들의 고달픈 신세를 토로한 것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해병대의 장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을 것이 라는 것이 그 작품의 작의(作意)였다.

 
 헌데 문제가 된 그 수필은 교육단을 비롯한 해병대 내부에서 문제점이 지적되지 않고 그 수필을 읽은 육군대학(진해) 교수부 교관을 통해 직 간접적으로 육군본부와 합참 또는 국방부 등으로 알려지게 되어 뒤늦게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게 된 해병대사령부에서 교육단으로 전화를 걸게 되어 비로소 교육단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 교육단장 김두찬 장군은 즉시 고철훈 중위를 불러 그런 한자 제목으로 글을 써서 대외적으로 망신을 시킨 그 저의가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고 편집인인 정훈참모(필자)에겐 왜 점검도 하지 않고 그런 원고를 실었냐며 힐책을 했으나 그 자리에 동석을 했던 교수부장 문희석 중령이 크게 잘못된 글도 아니고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닌 것 같다는 견해를 피력하자 교육단장은 노여움을 누구러뜨리고 그 이상의 책망을 하지 않고 불문에 붙였었다.

 
 그 후 2차에 걸쳐(62년과 66년) 도미유학(LFTU와 OJT과정)과정을 이수한 후 한동안 사령부 군수국에서도 근무했던 고철훈 대령은 66년 청룡부대로 발령이 나 여단본부 인사참모와 대대장을 거쳐 여단본부 정보참모를 역임한 다음 68년에 귀국했다. 그리하여 합참으로 발령이 나 대간첩 작전본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약 5년 간의 합참 근무기간 중 그는 다음과 같은 화제를 남겼다.

 
 즉 소속 부서의 주무과장으로부터 70년도에 개최할 전국치안회의에서 보고할 69년부터 70년 1월까지를 망라한 대간첩 작전의 결과 분석과 건의사항을 포함시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임석한 치안회의 석상에서 보고서의 작성자인 고철훈 중령이 직접 브리핑 챠트를 통해 보고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종전의 보고서 형식과 다른 그 보고서의 설명력이 돋보이는 내용에 감탄을 했던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좌중에서 탄성을 터뜨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화제를 남겼던 고철훈 대령은 한국과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개발하여 ‘통합대(對)침투작전시스템’이란 그 프로젝트를 미 국방성으로 하여금 연구 개발토록 하기 위해 합참대 간첩작전본부장 김재명 장군(당시의 한․미 기획단장)에게 건의하여 미 국방성에 연구신청서를 제출한 결과 즉각 그 신청서를 접수한 미 국방성에서는 의회에 필요한 예산을 통과시킨 다음 그 프로젝트를 연구할 미국 내 연구기관과 계약을 체결하는 한편 그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의 개발자인 고철훈 대령에게 그 연구기관의 연구에 대한 감수(鑑修)를 해 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고철훈 대령은 합참본부장의 승인을 얻어 각군에서 선발한 4명의 전문요원과 함께 9개월 간 그 연구기관에 파견 근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미 국방성에서 즉각적으로 관심을 표명했던 이유는 그 프로젝트가 남미인들의 밀입국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고, 무장간첩의 침투를 막아야 할 합참으로서도 도움이 되는 프로젝트(2급비밀)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해병대의 요람인 해병교육단과 합참에서 그처럼 명성을 떨쳤던 고철훈 대령은 71년 12월 합참에서 대령으로 승진했고 73년 9월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한 후 약 7년간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근무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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