越南戰 - 초대 청룡부대장 이봉출 장군
한국군의 월남 파병 때 초대 청룡부대(해병제2여단)장으로 출전하여 사해(四海)에 용맹을 떨쳤던 이봉출(李鳳出) 장군, 그는 1조(중사) 때는 통제부의 초대 취사반장, 준사관(병조장. 상사) 때는 해양대학 군사교육단 훈련보좌관으로서 이름을 날린 기질이 터프하고 성격이 쾌활한 고급하사관이었으며, 1948년 해사특교대(1차)를 거쳐 소위로 임관하여 부산헌병대 대장으로 재임했던 시절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긴 전설적인 인물이다.
즉 1948년 10월 중순경 부산 공설운동장에서는 해군사관학교 축구팀과 부산 올멤버팀과의 친선 축구시합이 있었는데, 그 때 왼쪽 허리에는 긴 일본도를 차고 오른쪽 허리에는 총신이 긴 모젤권총을 차고 관람석 상석에 앉아 관전을 하고 있던 그는 시합도중 부산 올멤버 선수들이 해사생도들에게 깊은 태클을 하여 겁에 질리게 하자 모젤권총을 빼들어 허공으로 한방을 쏜 다음 “우리 애들(사관생도 들)까면 죽여!!”하고 경고를 함으로써 부산팀의 태클에 제동을 걸었고, 시합은 0:0으로 비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부산헌병대장 재임기간 중 이봉출 소위는 해사특교대(1차)에서 교육을 받을 때 훈육감으로 있었던 김종기 소령(해사1기·당시 군산경비부사령관)이 구포에서 결혼식을 거행할 때 김 사령관의 부탁을 받고 그 당시 10여 대 밖에 없었던 부산 시내의 하이야(택시) 중에서 제일 번들번들한 차 2대를 대절해 주었었다고 한다.
경남 함안 출신(1925년생)으로 1946년 2월 일본 해군 경력자로서 창군기의 해방병단에 입대한 후 48년 9월 해사 특교대(1차)를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 해군부산헌병대장을 역임한 후 해병대로 전입했던 이봉출 중위는 6.25전쟁 초기 고길훈 부대의 3중대장으로 임명되어 장항 군산 이리지구 전투에 참가한 데 이어 진동리. 통영지구 전투를 거쳐 인천상륙작전과 수도탄환작전에도 참가했는데, 특히 연희 고지 전투 때(당시 1대대 3중대장) 그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한 신(神)의 음성을 듣는 기적적인 체험을 함으로써 이 세상에 두 번 태어난 사람처럼 독실한 신앙인이 되어 자신을 개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대대(장, 고길훈 소령)가 연희고지를 공격했던 날짜는 9월 22일이었다. 그런데 1대대가 그 전날에 점령했던 104고지(염산)와는 달리 연희고지의 계곡지대에는 300~500미터 너비의 작은 하천이 있는 재활지가 가로놓여 그 개활지에 구성된 적군의 강력한 화망(火網)으로 인해 1대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땅거미가 질 무렵 공격을 중단하고 104고지로 철수한 다음 그 다음 날 재공격을 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는데, 공격 첫날 은폐물도 차폐물도 없는 그 개활지에 적군의 무서운 탄막사격이 가해져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을 때 3중대장 이봉출 대위는 얼마나 다급했던지 부처님도 용왕님도 햇님 달님도 불러보다가 문득 하느님을 떠올리며 “하느님, 저를 수도 서울 탈환때까지만 살려 주십시오 그 후엔 죽여도 좋습니다.”하고 애원했을 때 머리 위의 초연이 걷히면서 “너는 죽지 않는다”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데, 연희고지의 혈전장에서 그러한 체험을 했던 그는 그 후(휴전전) 김포에서 반법섭 군목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남들로부터 세상에 두 번 태어난 사람, 또는 세상에 두 번 태어난다기로 저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등의 말을 들은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월남전에서 초대 청룡부대장 이봉출 준장만큼 매스컴의 각광을 받은 지휘관은 드물 것이다. 청룡부대 결단식 때(1965.9.20)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부대기(해병제2여단)를 받는 그 순간부터 매스컴의 각광을 받기 시작했던 그는 청룡부대가 투이호아지구의 곡창지대(휴송평야)에서 전개한 추수보호작전(청룡2호작전)과 재건작전 및 민사심리전 등을 마치고 1966년 8월 하순 다른 지구로 이동한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 투이호아 시민들은 청룡부대의 이동을 반대하는 궐기대회를 열었고, 또 청룡부대가 북부(추라이지구)로 이동한다고 하자 거시적인 환송대회를 열었던 일들이 매스컴을 통해 크게 보도되었었는데, 그 때 각광을 받은 중심인물이 곧 청룡부대장 이봉출 장군이었다.
한편 청룡1호작전 때 청룡부대에서는 미 야전군사령부 민사심리전부대의 협조를 얻어 작전지역 내의 베트콩 소탕전을 전개하기에 앞서 항공기에 의한 삐라 살포와 대민방송을 통해 그 지역 주민들에게 정해진 시간 내에 정해진 안전지대로 피난할 것을 종용했었는데, 그 결과 수천 명의 주민들이 몰려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그 지방 행정관과 월남군 당국자들은 틀림없이 그 속에 양민을 가장한 베트콩과 그들의 동조자들이 있을 것이니 무조건 포격을 가하도록 종용을 했으나 월남에 도착한 후 백 명의 베트콩을 놓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던 그는 자신의 처소인 몽고형 천막 안으로 잠시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피난민들의 몸을 수색하여 양민들을 안전지대로 피난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 결과 많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 피난민들 중에는 단 한 명의 베트콩도 섞여 있지 않는 것이 판명되었었다.
다음 두 토막의 화제는 그 당시 국내 신문에도 보도된 바 있었다.
첫 번째 얘기는 투이호아지구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던 그 어느 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산모를 발견한 대원들이 그 산모를 도와 옥동자를 분만케 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봉출 장군이 그 옥동자의 이름을 청룡의 ‘용’자를 따서 ‘용남’이라고 지어 주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얘기는 비봉작전(추라이지구) 때 대원들이 우중에 길가에 쓰러진 채 산고를 겪고 있는 여인의 분만을 도와 태어난 여아의 이름을 ‘용희’라고 지어 주었다는 그 애긴데, 당시의 일부 보도매체들은 약 20년 후 그 용남군과 용희양의 결혼식에 이 장군이 주례로 참석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흥미로운 뜻을 피력하기도 했었다.
1966년 12월 20일 제2대 청룡부대장 김연상 준장과 임무를 교대했던 이봉출 장군은 그 후 사단장 부사령관을 역임한 후 1973년 중장의 계급으로 예편했던 이 장군은 그 해 7월 한불(韓佛)합작회사로 설립된 다한알미늄공업주식회사(정부투자기관)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그 후 민영화로 퇴직할 때까지 알미늄공업계의 발전을 위해 심혈을 다해 이바지 했으며, 1992년 12월 2회에 걸친 위암수술 끝에 향년 6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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