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 아리랑(13)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上)
월남전이 치열하던 60년대, 그에 따라 한국군의 월남파병이 한창 진행되던 그 시절에, 북한은 그들의 정책기조로 소위 4대군사노선을 채택한다.
전 인민의 무장화, 전군의 간부화, 전국의 요새화, 전군의 현대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한반도 재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못한 북한으로서는 적화통일을 위한 당연한 정책이었고 무력통일을 위한 당연한 전쟁준비였었다.
마침내 북한은 전쟁준비의 중간평가라도 하려는 양, 우리네 파월용사들이 머나먼 월남땅에서 공산세력과 맞서고 있는 틈을 타서, 대한민국에 야만적인 도발을 시도한다.
1968년 1월 21, 북한의 124군 소속 무장특공대가 서울 한복판에 침투한 것이다.
목적은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대통령을 살해하고자 함이었다. 이윽고 청와대의 길목인 세검정 고갯길까지 들어선 31명의 무장공비들... 그곳에서 서울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그들을 검문하다 장렬히 전사한다.
교전이 시작되었고 서울의 밤하늘은 밤이 새도록 조명탄으로 대낮처럼 밝혀졌다. 전열을 수습한 군경수색대는 가까스로 무장공비들을 일망타진하게 되지만 아군의 피해도 컸다.
장병 23명이 전사했으며 5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민간인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한순간 방심속에 예상치 못했던 서울도심의 무장공비 출현은 전 국민을 경악케 하였다.
한편, 이역만리 월남의 우리네 파월용사들도, 통신병들이 켜놓은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한국방송을 통하여 우리나라가 급박한 처지에 놓여있음을 바로 접하게 된다.
무장공비들이 서울까지 들어왔다는 말에 전쟁상황으로 직감한 파월용사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스스로의 관물을 정리하고 개인화기를 꼼꼼히 손질하기 시작했다.
남의 나라 자유를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조국이 전쟁의 위기에 처한 이상, 하루빨리 조국으로 돌아가서 북괴군에 대응하며 싸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파월용사들은 이역만리 죽음의 땅에서도 당신들의 안위보다, 이처럼 내 조국 내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우국충정의 정신 속에 오늘날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지켜져 왔던 것이다.
1.21 사태를 계기로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서 김일성 암살을 위한 북파부대를 만든다. 부대원의 정원도 북한의 124군 소속 무장공비의 수에 대응하여 31명으로 구성한다.
이른바 실미도의 684부대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여 국방의 전열을 재정비하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그제서야 다시금 안정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1983년 10월 9일, 대한민국은 또다시 북괴의 만행에 온몸을 떨었다. 한국 대통령의 버마(현재의 미얀마) 친선 방문중 아웅산 국립묘지에 큰 폭발사고가 일어난다. 대
통령을 수행했던 한국의 유능한 요직인사(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17명이 그 자리에서 졸지에 무고한 생명을 잃었다.
세계 외교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대 참변이었다. 미얀마 수사당국의 조사결과, 김정일의 친필지령에 의한 북한군 정찰국 소속 특공대의 소행이었다.
나라의 일로 대통령을 따라 나섰다가 고인이 되어 말없이 돌아온 이들, 가을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새벽녘의 서울대병원 후문... 하얀 국화꽃으로 뒤덮인 영구차가 한 대, 두 대, 세 대... 끝도 없이 빗속에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분단된 이 나라 이 국민만이 겪는 슬픈 꽃상여의 행렬이었다. 호전적 기질이 농후했던 김정일은 이 사건을 계기로 수면위로 부상하면서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자리를 공고히 굳히게 되는 것이다.
1990년 4월 9일, 바야흐로 북한은 그들의 헌법을 개정하여 제 4장 60조에 “국가는 전 인민의 무장화, 전국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를 기본 내용으로 하여 자위권 군사노선을 관철한다”라고 명문으로 하여 60년대부터 추진해왔던 4대 군사노선을 아예 헌법 차원으로 높인다.
이것은 유사시 속전속결로 이 나라를 무력으로 삼키겠다는 그들의 저의를 만천하에 공공연히 노골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이어서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 회의에서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또한 김정일을 그네들의 정식 국가수반으로 공식화하면서 더욱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이후 김정일은 본격적으로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그 목적은 조국과 민족을 하나로 결합시키기 위한다는 것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 없이도 무력통일이 가능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정일과 그를 둘러싼 북한의 만행은 꾸준히 이어진다.
2002년 6월 29일,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경기를 치르던 바로 그날, 통한의 서해교전이 발생한다. NLL을 침범한 북한해군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우리 해군의 충돌이었다. 이 교전에서 아군은 윤영하 소령 등 6명의 장병이 장렬히 산화한다. 충무공의 후예들은 정말로 생명을 다하여 이 바다를 지킨 것이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같은 해에 발생한 사건이건만은, 미군 장갑차의 훈련 중 사고를 당한 여중생들에 대한 추모와 함께 미군에 항의하는 촛불집회는 전국적으로 이어졌지만, 서해교전에서 바다를 지키다 숨져간 전사자들을 추모하며 더불어 북한의 만행에 대하여 항의하는 촛불집회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 해인 2003년 5월에 있었던 일화이다. 미국의 라이스 장관이 한국의 고위관리와 대화 도중,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들의 이름을 물었다고 한다. 고위관리는 당연히 미선이와 효순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라이스 장관은 서해교전에서 숨져간 전사자들의 이름도 아느냐고 물었다. 부끄럽게도 그 고위관리는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라이스 장관은 동맹군의 차량사고에 의해 희생된 학생들의 이름은 기억하면서, 정작 나라를 지키다 적군의 총탄에 희생된 군인들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에 대단히 의아해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우리네 국가관이 투철하지 못한 정신을, 또한 그에 따라 국가유공자를 경시하는 태도를 한 순간에 드러낸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이 서해교전, 바로 그날이다. 그날, 그 바다에 생명을 다하여 바다를 지킨 용사들이 있었으니, 자랑스런 그 이름은... 소령 윤영하, 중사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병장 박동혁... 삼가 그들의 숭고한 넋을 기립니다. 그들은 정녕 이 강토 이 바다를 지킨 조국의 영웅이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랑스런 이 나라의 아들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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