越南戰 - 26년 후에 짜빈동을 방문했던 왕년의 11중대장 정경진 이사
짜빈동 전투 때 수립한 혁혁한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과 은성훈장(미국)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한·미·월 3개국 국가원수의 부대표창을 받은 왕년의 3대대 11중대장 정경진(丁京鎭) 대위. 예편 후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사무총장과 이사를 역임한 그 예비역 중령 정경진 이사는 짜빈동 전투가 벌어진 지 26년 후인 93년과 94년 두 차례에 걸쳐 지난날 3대대 11중대가 방어했던 그 유서 깊은 짜빈동 지지를 방문하여 비록 기도했던 사업상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 날 그와 함께 그 격전지를 방문했던 영화촬영팀을 포함한 20여 명의 여행자들 중 그 어는 누구보다도 감개무량한 감회에 젖은 시간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북 익산 출신(1936년생)으로 64년 4월 해군사관학교(14기)를 수료한 후 해병대로 전입, 해병학교특수 기초반과정(46기)을 거쳐 해병제1연대에서 소대장 근무를 마친 뒤 6중대 부중대장, 2대대 군수 작전장교를 거쳐 연대본부 군수참모를 역임할 때까지 5년 간을 1연대에서 근무했던 정 이사는 사단본부 작전참모실 교육담당관으로 근무 중에 있던 66년 6월에 파월되어 해풍작전과 용안작전이 끝날 때까지 여단본부 군수참모실에서 근무하다가 67년 1월 3대대 11중대장으로 임명되어 9중대가 배치되어 있던 짜빈동(4부락) 진지를 인수하여 진지 보강작업을 하는 한편 진지방어를 위한 훈련과 경계 및 정찰활동을 강화하는 가운데 평정사업을 추진하던 중 짜빈동 진지를 일거에 돌파하기 위해 122밀리 박격포 등 강력한 화력의 지원 하에 2개 대대를 주공방향, 1개 대대를 조공방향에 투입하여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한 월맹군 대부대(1개 연대)를 요격하여 월남전 사상 중대 규모의 방어병력으로서는 유례없는 대첩을 거둠으로써 2개의 태극훈장과 은성훈장(정경진 대위와 신원배 소위)과 4개의 을지훈장(이학현, 배장춘, 김용길, 조정남), 8개의 충무훈장 수상자를 내게 되었을 뿐 아니라 11중대의 전 사병이 일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리게 되고 또한 한·미·월 3개국 국가원수의 부대표창을 받는 등 유례없는 상훈의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전투가 끝난 뒤 주월미군사령부 공보실에서는 짜빈동 대첩의 주인공인 정경진 대위와 청룡부대 상황장교(오윤진 중령)를 초청한 가운데 외신기자들을 위한 특별한 브리핑을 제공했는데, 그 때 한 외국인 기자가 정경진 대위에게 “월맹군이 얼마나 강하더냐”고 질문한 데 대해 정 대위는 “그들은 매우 강하더라. 그러나 KMC만은 못하더라”라고 답변함으로써 그 자리를 폭소의 도가니로 화하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1중대의 전반적인 전투상황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
한편 67년 7월 월남 전선으로부터 귀국한 후 75년 중령의 계급으로 승진할 때까지 사령부작전교육국에서 근무한 데 이어 육군보병학교 고군반을 거쳐 해사훈육관, 포항기지 작전참모를 거쳐 도서부대(백령도) 군수참모, 대대장, 함대사령부 근무대대장, 3연대 부연대장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사고 없이 열과 성을 다해 근무했으나 관운을 타고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급경쟁에서 밀려난 때문인지 월남전에서 그토록 빛나는 훈장과 그토록 영예로운 부대표창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불운하게도 승진하지 못하고 81년 중령의 계급으로 예편되고 말았다.
예편 후 약 5년 간 대양선박(주)과 조양근해상선(주)의 비상계획부장 겸 업무부장으로 있다가 88년 정년퇴직을 했던 정경진 이사는 89년부터 5년 간 사당동 해병주택단지 재건축조합 설립추진위원과 조합장으로서 봉사했고, 95년부터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한 후 총장(3년) 이사직을 차례로 거쳐 현재 감사로 재임 중에 있다.
정경진 이사가 93년과 94년 두 차례에 걸쳐 해병참전기념사업회 회장 고광수 장군을 비롯한 30~40명의 일행과 함께 왕년의 격전장 짜빈동(4부락)을 방문하게 된 것은 현지 로케이션을 통한 짜빈동 전투의 영화화와 한국군의 월남전 전적지 관광개발사업을 추진하려는 영화제작팀과 관련 여행사의 사업 추진계획에 동참하기 위함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사이공에 있는 베트남 예비군 조직체에서는 양해를 구했으나 그 때까지 강한 적개심과도 같은 거부감을 지니고 있던 다낭지구 예비군 조직체에서 중앙정부(하노이)의 승인을 받으라고 냉정하게 거절을 하는 바람에 일단 그 사업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 두 차례에 걸친 짜빈동 방문을 통해 정경진 이사는 짜빈동지구에 조성된 500여 위의 시신이 안장된 국립묘지에 헌화를 하는 모처럼의 기회도 가졌고, 또 그 당시엔 짜빈동 인민위원장으로 있었지만 짜빈동 전투 때 부상을 당해 상이용사가 된 왕년의 베트콩 중대장과 착잡한 마음으로 대면하고 서로가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고 하니 참으로 감개무량한 추억을 간직하게 한 여정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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