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越南戰 - 전공을 보병에게 양보한 포병대대장 이갑석 중령

머린코341(mc341) 2016. 8. 28. 03:54

越南戰 - 전공을 보병에게 양보한 포병대대장 이갑석 중령
 

  쾅나이성 북방 12키로, 추라이시의 남쪽 23키로 지점에 위치한 짜빈동(손틴군) 부락, 이 부락 근처 남북간 약 300미터 동시간 약 200미터의 나직한 고지(해발 30미터)에 타원형으로 구축된 제3대대 11중대의 방어진지가 강력한 적군의 기습공격으로 돌파를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67.2.15. 새벽) 18문의 105밀리포와 6문의 155밀리포(육군으로부터 배속받은)의 막강한 화력으로 적을 제압함으로써 대첩을 거두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그 짜빈동 기습방어전이 끝난 후 여단본부(청룡부대)에서 훈장 내신을 위한 전투공적 심사를 할 때 그 자리에 참석했던 포병대대장 이갑석(李甲石) 중령은 포병대대 장병들의 원망을 들을 각오를 하고 모든 공적을 보병에게 돌리겠다는 내용의 발언을 한 포병대대 지휘관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또한 월남으로 출동하기 전 11연대의 야포사격장(영일군)에서 포진지에 대한 적군의 기습공격을 격퇴시키기 위한 포병진내사격법(최근거리 시한사격법)을 개발했던 그는 그 사격법으로 짜빈동 전투 2일 후 포병진지를 보복 습격한 적병들을 진전에서 궤멸시킴으로써 제갈공명과도 같은 전술의 개발자란 평을 들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충남 공주출신(1930년생)으로 공주사범학교를 거쳐 해군13기로 입대하여 창설기의 해병대로 전입, 해병1기생이 되었던 이갑석 중령은 51년 8월 해간8기로 입교, 임관(52.4)한 뒤 육군포병학교 초등군사반 과정을 이수함과 동시에(52) 장단지구 전선으로 출동, 포병대대 관측장교로 임명되어 53년 5월 초 해병제1전투단이 연천지구로 이동할 때까지 전투단 우일선 대대의 최전방 전초진지인 33고지에 배치되어 FO로서의 작전임무를 수행했다.

 
  그런 연후에 전투단이 장단지구로 복귀(53.7.12)한 직후 육군포병학교 고등군사반(15기)에 입교하여 소정의 교육과정을 이수했던 이갑석 대령은 휴전 후 한·미야전군사령부 주관으로 연례적으로 실시해 왔던 포병대대 대항 포술테스트가 실시되는 동안 2개 포병대대(포병연대 창설 후)의 작전참모를 역임하며 포술테스트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자신의 원에 따라 대위의 계급으로 승진할 때까지 전방근무를 했던 그는 66년 8월 중령의 계급으로 청룡2진으로 파월될 때까지 김포여단 헌병대장, 진해 지휘참모대학 지원학과 교관, LFTU상륙전담당 교관 등을 역임했다.

 
  한편 월남으로 출동하여 청룡부대의 제2대 포병대대장으로 임명이 되었던 이갑석 대령은 특히 3대대 9중대가 수행한 푸옥록고지 방어전투(66.11.20)와 3대대 11중대의 짜빈동기습방어전(67.2.15) 및 1대대 2중대 3소대에 의해 수행된 테로이매복작전(67.7.19) 등 주월 청룡부대에서 수행한 주요 작전 가운데 가장 혁혁한 전과를 거둔 작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이들 작전을 원이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해 지원했던 것을 보람있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푸옥록고지 방어전 때는 9중대의 FO로 근무했고, 짜빈동전투 때는 11중대 FO로 근무했던 김세창씨의 증언에 따르면 짜빈동전투 때도 간간이 지휘통신망을 통해 직접 상황을 물으며 격려를 해 주었었지만 특히 푸옥록고지전투 때는 사격을 유도하기 위해 진지 밖에 나가 있는 FO를 격려하기 위해 “네가 일보 전진하면 너의 뒤와 앞으로 계속 포탄을 쏴 주겠다”며 격려를 해준 그 대대장의 말을 듣고 더욱 용기를 내어 관측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짜빈동전투 때 포병대대 작전보좌관(사격지휘)이었던 권혁연씨(해사16기·예.대령)의 증언에 따르면 그 전날 “중요한 첩보가 있으니 철저히 대비하라”는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기록사격으로 정밀한 사격제원을 유지하는 가운데 정신을 바짝 차려 졸지 않고 철야 근무한 것이 맞아 떨어져 그 날(2.15) 04시경부터 동이 틀 무렵까지 11중대 FO(포병관측장교 김세창 중위)의 요청에 따라 24문의 야포로 10여 개의 철조망 앞 화집점(火集点)과 방석(11중대진지)을 중심으로 한 상·하·좌우 원근(遠近) 지점에 마치 투망을 치듯 6~7일 간의 보관량에 해당하는 1,400~1,500 발의 포탄을 퍼부었고, 또 그로부터 이틀 후 적이 박격포의 지원사격 하에 포진지에 대한 보복 습격을 감행했을 때는 미 육군으로부터 배속받은 155밀리포 1문(6문중)이 파괴를 당했으나 월남으로 출동하기 전 이갑석 대대장이 11연대 사격장에서 개발하여 시범훈련까지 한 그 포병진내사격법(최근거리 시한사격법)을 처음으로 구사하여 육군으로부터 배속받은 155밀리포 1문이 파괴를 당한 위급한 상황 하에서도 진전으로 쇄도한 적을 통쾌하게 무찌를 수 있었다고 한다(11연대 사격장에서 실시한 그 시범훈련에는 사단장과 11연대장 외에 때마침 사단을 방문 중에 있던 주한 미 해군사령관도 참관했다고 한다).

 
  그리고 짜빈동전투가 끝난 후 여단본부에서 훈장 내신을 위한 전투공적을 심사하는 자리에 참석했던 이갑석 중령은 작전참모 오윤진 중령이 포병대대에서는 왜 내신을 하지 않았느냐고 했을 때 “모든 전투공적은 보병들에게 돌리겠다”며 사양을 했다고 하는데, 그 때 그런 말을 남긴 그 장본인(이갑석씨)은 지금도 그 말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월남 출동 전후에 그와 같은 화제를 남겼던 이갑석 대령은 77년 7월 대령의 계급으로 예편할 때까지 11연대장, 해군신병훈련소장, 연평부대장, 1사단참모장 등을 역임했는데, 특히 74년 1월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된 후 해병장교로선 최초로 해군신병훈련소 소장으로 임명이 되었던 그는 불운하게도 통영에 있는 이충무공사당을 참배하기 위해 해군 LST에 승선하여 통영으로 간 1,000여 명의 159기 신병(해병) 가운데 해상에서 예인선으로 옮겨 타고 부두로 향하던 1번 YTL(예인선)의 전복사고로 그 예인선에 타고 있던 159명 전원이 참사를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부임한 지 2개 월 만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다. 현역 때 미 해군정보학교를 수료한 바 있었던 이갑석 대령은 78년 현역 때부터 수학해 왔던 건국대학교 학사과정(법학부 행정학과)을 수료하는 만학도의 열정을 과시한 바 있었다.

 
  한편 예편 후 10여 년 간 세원산업사(포장지 제조회사)를 경영했던 이갑석씨는 감연상 장군이 임시총재로 있던 98년부터 약 1년 6개월 간 내분으로 진통을 겪고 있던 그 혼란기에 해병전우회중앙회의 사무총장을 맡아 곤욕을 치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본 내용의 저작권은 정채호 대선배님께 있습니다. 저작권관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