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越南戰 - 지덕칠 중사에게 추서된 영광의 태극무공훈장

머린코341(mc341) 2016. 8. 28. 03:51

越南戰 - 지덕칠 중사에게 추서된 영광의 태극무공훈장

 
  67년 1월 31일부터 2월 3일까지 짜크강과 데사키강 입구에서 수로(水路) 측정 작업을 하는 미 해군 UDT의 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수행한 강구(江口) 작전 기간 중(2.1) 동수안3부락에 헬기로 착륙하여 그 일대를 탐색하고 있던 1대대 2중대 3소대는 오전 11시 경 증간된 1개 중대 규모의 적과 조우를 했을 때는 격전 끝에 그 적을 격퇴시켰으나 오후 3시경 보다 강력한 적과 재차 조우했을 때는 마을 우측방의 대나무 숲에서 가해진 집중사격으로 첨병분대의 분대장을 비롯한 7~8명의 대원들이 졸지에 쓰러짐으로써 전멸을 당할 위기에 처해지고 말았는데, 이 때 적탄이 빗발치는데도 부상병들에게로 달려가 압박붕대를 들이대며 응급치료를 하고 있던 위생병 지덕칠(池德七) 하사는 언덕 위로부터 날아온 수류탄이 바로 옆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가 잠시 후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반신(半身)이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그 죽음의 현장을 엉금엉금 기면서 빠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 때 BAR사수 김수돌 일병이 지 하사를 생포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 2~3명의 적병을 쓰러뜨려 지 하사를 구했다.

 
  그리하여 쓰러질듯 하면서 소대본부에 당도한 지덕칠 하사는 소대장 박종길 소위가 피투성이가 된 그를 후송시키려고 하자 부상당한 전우들에게 모르핀을 놔 줘야 한다면서 한사코 거부를 하다가 적의 파상적인 공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점차 적의 포위망이 압축되자 “소대장님, 전방의 적은 제가 맡겠으니 속히 대원들(소대본부요원)과 함께 안전지대로 철수하십시오”하는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엥글리코반의 미군통신병이 지니고 있는 M14소총을 빼앗아 들고 결연히 뛰쳐나가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는 적병들을 향해 총대를 휘둘러 순식간에 10여 명의 적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바로 그 다음 순간 지 하사 자신도 가슴에 적탄을 맞고 움찔하며 쓰러질 것만 같았으나 무슨 힘이 그를 버티게 했는지 흡사 적개심의 화신과도 같이 두 눈을 부릅뜬 그는 쓰러질듯 하다가도 쓰러지지 않고 실탄이 떨러질 때까지 총대를 휘두른 다음에야 비소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지덕칠 하사가 쓰러진 후 상공에는 증원 병력을 실은 3대의 헬기가 날아오고 있었으나 적병들의 대공사격으로 1번 헬기에 탑승한 3중대 2소대의 1개 분대의 병력이 간신히 지면에 뛰어내릴 수 있었을 뿐 1, 2, 3번 기 모두가 착지를 못한 채 되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동안 3소대에 배속된 경기관총 사수(황태운 병장)도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히고 있는 적을 격퇴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시각각 상황은 더욱 위급해져 제각기 철수를 해야만 했을 때 손가락 하나를 다친 기관총 사수로부터 기관총을 인수하게 된 탄약수 조기호 이병(176기)은 밭에서 호로 연결된 지점까지 철수했을 때 오른쪽 대퇴부에 적탄을 맞아 쓰러지게 됨으로써 수류탄이 없어 폭파시켜 버릴 수 없는 기관총을 버린 채 유혈이 낭자한 다리를 이끌고 구부러진 방공호가 있는 곳까지 가서 은신을 한 끝에 그를 추격한 적병이 그 방공호 입구에 사격을 가했는데도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해 있다가 적이 물러간 뒤 극적으로 아군에 의해 구출이 되었고, 적과 교전이 붙었을 때 용감하게도 서서 사격을 하고 있던 2분대 AR사수 김기춘 이병은 철수하는 도중 다음과 같은 일을 껶었다.

 
  즉 논바닥에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얼룩무늬군복이 있기에 총끝으로 슬쩍 건드려 봤더니 벌떡 일어난 화기반장 이상익 하사가 자기(김 이병)를 꽉 잡고 “화기(LMG) 찾으러 가야하니 나를 업고 왔던 길로 가자”고 하기에 기가 찬 김 이병은 먼저 철모와 방탄조끼 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던 압박붕대를 꺼내 창자가 비어져 나온 이 하사의 한쪽 옆구리를 틀어막은 다음 천근 같은 그를 업고 쓰러질듯 왔던 길로 되돌아가던 중 뜻밖에도 미군 건쉽(공격용헬기)이 나타나 기총소사를 가하는 바람에 이 하사를 내려놓고 헤어지고 말았는데, 결국 그 두 사람은 제각기 찾아 헤매던 소대본부(이동한)에서 극적으로 회동했다.

 
  그 소대본부(야산)에는 소대장과 소대 향도 국중화 중사도 있었고, 중상을 당해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지덕칠 하사도 있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헬기(1대)가 비래한 시각은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중대본부로부터 헬기가 갔으니 조명탄으로 위치를 알리라는 무전연락이 있었으나 향도하사(국 중사)가 조명탄이 없다고 하자 예광탄을 쏘라고 했고, 예광탄도 없다고 하자 실탄을 3발 발사하여 그 총성을 통해 헬기를 유도하라고 하기에 국 중사는 헬기가 공중을 선회하는 즉시 실탄 3발을 발사했으나 헬기에선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하자 국 중사는, 윗저고리에 불을 붙여 횃불처럼 흔들어 보았으나 그래도 헬기는 착륙하기를 꺼렸는지 그대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심야에 이르러 1대대 본부에서는 2중대장 감성찬 대위의 끈덕진 구출요청에 따라 현지로부터 약 2키로 떨어진 곳에 숙영 중인 3중대로 하여금 1개 소대의 병력을 차출하여 그들을 구출토록 조처함으로써 밤 10시경 김원조 소위가 지휘하는 3중대 3소대 병력이 도보로 그 부근에 도착, 육성으로 서로를 확인한 다음 그들을 구출하여 3중대 본부로 향했다.

 
  한편 밤 11시경 3중대 본부에서는 한 대의 매드백이 날아와서 그 때까지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지덕칠, 이상익 하사와 조기호 이병 등 중상자와 경상자들을 싣고 갔는데, 그 기내에서 지덕칠 하사는 운명을 하고 이상익 하사는 다낭 공군기지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다음 필리핀의 미 공군기지병원를 거쳐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한편 그 다음 날 3중대의 지원 하에 시체 회수를 위해 현지로 떠나간 2중대 3소대장 박종길 소위와 향도 국중화 중사는 피격을 당한 대나무 밭이 있는 그 마을 일대에서 목이 잘린 데다 개미떼가 새까맣게 붙어 있는 36구의 시체를 발견하여 그 시체들을 준비해 간 미군 의낭에 담아 현장에 비래한 헬기에 실어 보냈는데, 사이공에 주둔하는 십자성부대(한국군)로 이송된 그 시체들은 그 다음 날 입회자(국중화 중사)의 입회하에 화장되어 한 줌씩의 뼛가루가 유골함에 담겨져 한국으로 봉송되어 국립묘지(동작동)에 안장되었다.

 
  한편 작전이 끝난 뒤 2중대 본부에선 상부의 지시에 따라 공적 내신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초인적인 투혼을 발휘한 위생병 지덕칠 하사와 경기반장 이상익 하사를 위해서는 아무도 훈장 내신을 하지 않고 그 전투를 치른 소대본부에서 태극훈장을 내신한 소대장 박종길 소위에겐 을지훈장이 수여되고 을지훈장을 내신한 향도 국중화 중사와 충무훈장을 내신한 AR사수 김수돌 해병에게는 충무훈장이 수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전사한 지덕칠 하사에게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된 배경(이유)은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동아일보사 특파원 박동환 기자가 취재차 1대대를 방문했을 때 강구작전에서 위생병의 신분으로 영웅적인 용맹을 떨친 지덕칠 하사에 관한 무용담을 진중에서 전해 듣고 그 무용담을 대서특필하여 본사에 송고함으로써 그 기사를 읽은 박정희 대통령을 감동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전투공적 재조사 과정을 거쳐 중사로 승진된 고인에게 영광스런 그 최고훈장이 추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본 내용의 저작권은 정채호 대선배님께 있습니다. 저작권관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