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명인·기인

越南戰 - 80고지와 30고지를 공격했던 김원식 소대장과 서준창 소대장

머린코341(mc341) 2016. 8. 28. 03:50

越南戰 - 80고지와 30고지를 공격했던 김원식 소대장과 서준창 소대장

 
  청룡부대(해병제2여단)에서 전개한 수많은 작전 가운데 부대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적 매복대의 매복전술에 걸려 전사를 한 2명의 대대본부 장교와 2명의 소대장을 포함한 수십 명이 사상(死傷)을 당했을 뿐아니라 주야간에 걸친 역습전에서도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투망(投網)작전처럼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도 드물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67년 1월 5일부터 10일 간 청룡부대에서는 빈손군과 손틴군 일대에서 성탄절과 신정휴전을 이용해서 전력을 정비한 적 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투망작전으로 명명된 작전을 전개했는데 그 기간 중(1.9) 조형남 중령이 지휘한 3대대는 대대의 전방 CP를 9중대의 기지 내에 설치하기 위해 공수이동을 했다가 기상관계로 작전계획을 수정하게 됨에 따라 그 이튿날 전방CP를 원 위치인 후방CP쪽으로 옮기다가 그러한 변을 당했던 것이다.

 
  즉 이 날 3대대(본부)의 이동제대(梯隊)는 9중대가 위치한 100고지로부터 산록의 소로와 갈대밭이 우거진 개활지로 나 있는 차량대기지점에 이르는 약 4키로의 통로를 도보로 이동하던 중(부대이동을 개시한 지 약 20분 후인 14시 20분경) 통로 좌우측방 고지(80고지와 30고지)의 숲속으로부터 기습적인 집중사격이 가해짐과 동시에 약 200명의 적이 육박해 옴으로써 진퇴유곡의 위난에 처해지고 말았다.

 
  이 때 대대장 조형남 중령은 9중대의 증원병력 투입과 여단본부에 증원병력의 공수투입을 요청하기 위해 급히 그 현장을 작전장교 진우현 소령에게 맡겨 두고 수 명의 대원을 데리고서 중대기지 내에 있는 대대 후방 CP로 달려갔는데, 그러한 사이에 그 마(魔)의 현장에서는 아군의 사상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한편 대대 후방CP로 달려간 대대장은 9중대장 김윤형 대위로 하여금 지원병력을 급파토록하는 한편 여단본부에도 상황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했는데,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9중대장은 차량대기지점에 배치해 둔 9중대 3소대와 정찰임무를 수행 중인 1소대에 급보(急報)하여 현장으로 달려가게 했으나 이들 두 지원소대는 각 각 다른 진입로에서 적 매복대의 요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즉 도로변의 차량대기지점으로부터 소로를 따라 현장으로 가고 있던 3소대는 현장 부근에 당도하기도 전에 적 매복대의 집중사격으로 소대장 전창우 중위를 비롯한 10여 명의 대원이 사상당함으로써 지리멸렬되고 말았고, 현장으로부터 약 6키로 떨어진 지점에서 도보로 행군해 가고 있던 1소대(장, 김원식 소위)는 그로부터 약 2시간 뒤에야 현장에 도착, 강력한 적이 배치되어 있는 80고지 우단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1소대 역시 그 공격로에 매복하고 있는 적 매복대의 집중사격으로 인해 공격이 좌절된 채 모든 대원들이 숲속에서 갈겨대는 빗발치는 적탄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논두렁 밑의 무논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편 이러한 상황 속에 부상자를 싣고 가기 위해 날아온 매드백(환자 수송용 헬기) 한 대가 있었으나 적의 대공사격으로 피격되어 아군진지에 추락하는 변이 일어났고, 일몰 후 박용화 대위가 지휘하는 10중대의 증원병력(제1소대)이 2대의 헬기에 분승하여 공수되어 왔으나 적의 맹렬한 대공사격으로 착륙을 할 수 없이 한참동안 선회한 다음에야 엥글리코맨의 끈덕진 유도 끝에 가까스로 뜻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서준창 소위가 지휘하는 10중대 1소대는 소로 좌측방의 30고지를 공격하고 9중대 1소대는 계속 80고지를 공격했는데, 아군 포의 지원 하에 감행된 그 야간전투에서 적은 아군이 고지 위로 올라갈 때는 아무런 저항이 없다가도 하산할 시엔 집중사격을 가함으로써 많은 사상자를 내게 했다. 적이 퇴각한 시각은 동이 틀 무렵이었고, 그들은 월맹군이 착용하는 카키복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날이 밝은 후 현장에는 정기인 소위가 지휘하는 여단본부 기동타격소대가 공수되어 작전지역에 대한 경계에 임했고, 9중대 1소대와 3소대의 생잔자들은 피로에 지친 몸으로 시체 수거작업을 벌였는데, 어느 새에 그렇게 해놓았는지 적병들은 끔찍하게도 확인사살을 한 아군 장병들의 시체 하에 부비트렙을 설치해 둠으로써 처음 시체를 수거하던 3명(9중대 1소대)의 대원이 중상을 입는 변을 당했다.

 
  그래서 대원들은 시신의 발목을 유선줄로 묶은 다음 7~8미터 떨어진 곳에 엎드려 끌어당김으로써 더 이상 그와 같은 피해는 입지 않았으나 사후에 폭사(爆死)를 당한 그 전사자들의 참담한 몰골은 차마 뜬 눈으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발생한 100여 명의 사상자들 중 10중대 1소대의 전투손실은 5명(전사1, 부상4)이었으며, 전사자로 기록된 2명의 대대본부 장교는 작전보좌관 조경식 대위와 군의관 김시현 중위, 그리고 전사한 소대장은 3소대장 전창우 중위와 2소대장 김진철 소위였는데, 청룡부대 소속 군의관으로서 전사한 장교는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30년 후인 97년 12월 어느 날 왕년의 9중대 1소대장 김원식씨(해사20기)는 뜻밖에도 국내 모 방송국(KBS ‘남북의 창’프로그램이었을 것으로 짐작됨)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하노이방송국의 방영물을 발췌한 듯한 짤막한 방송화면에 등장한 원수(元帥)의 계급장을 단 월맹군의 노 장성이 “바로 그 날(66.12.10) 내가 지휘한 매복대가 따이한해병대의 1개 대대를 섬멸했다”고 한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이런 방송물을 시청하게 되다니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날 겪었던 그 악몽 같은 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했고, 또 직접 그 화면을 시청하진 못했지만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고 말하는 왕년의 10중대 1소대장 서준창씨(해간33기. 외국어대 출신)는 30고지에서 백병전을 벌였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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