越南戰 - 안호아 관측소를 지킨 추준호·곽충도 소대장
청룡부대가 투이호아지구로부터 추라이지구로 이동할 때 추준호(해간 29기) 대위가 지휘하는 청룡부대 수색소대는 추라이지구의 전술책임지역 외곽지대에 전초진지를 확보하여 관측소를 운용하라는 부대본부의 작명에 따라 헬기편으로 부대본부 동북방 약 20마일 지점에 위치하는 안호아(安和) 고지(△141)로 이동, 그 곳에 월남군 1개 소대와 함께 주둔하고 있는 미 해병대 수색소대와 임무를 교대했다.
아군 수색소대에 부여된 임무는 이 안호아 고지에 설치된 관측소와 약 10마일 밖에 위치하는 누이트론 관측소를 운용하는 가운데 라오스 국경지대로부터 추라이 지구로 침투하는 적정 탐색과 안호아 고지 산록에 있는 난민촌 주민들에 대한 대민 지원 사업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산정에 2개의 헬기 착륙장이 개설되어 있는 관측소의 동굴진지에는 과거 월맹군의 기습공격으로 전멸을 당했던 월남군 장병들(1개 중대)의 무덤이 있었고, 식수와 식량 등은 전적으로 헬기에 의한 공중보급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도착한 수색소대장 추준호 대위는 자신이 구상한 안호아촌 재건계획에 따라 전화에 시달리고 있는 난민촌 주민들을 위해 대원들의 성금으로 구입한 청룡우(靑龍牛)를 주고 확보한 부지에 교사를 지어 주고 운동장에 축구장과 배구장을 마련해 주는 등 대민 봉사를 했고, 부대본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안호아촌과 자매결연을 맺었던 그는, 친분이 있는 모국 교회의 목사들과 청룡부대 엥글리코 중대의 프레스 대위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주효가 되어 한국과 미국으로부터 많은 양의 학용품과 도서, 운동기구와 의류 및 꽃씨 등을 보내와서 이 난민촌에 대한 재건사업을 도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안호아촌을 재건함에 있어 141고지 정상의 관측소에 포탄상자를 뜯어서 만든 입간판에다 영자(英字)로 ‘데이빗 안호아관측소’ 또는 ‘다윗의 집’임을 자처하기도 했던 추 대위는 그로부터 약 5개월 후 후임자인 곽충도 소대장과 임무를 교대하고 사이공에 있는 월남어교육대에 입교할 때까지 그의 깊은 신앙심과 정성어린 봉사정신으로 난민촌의 주민들을 정성껏 도왔는데, 월남어교육대를 수료하고 민사심리전장교가 되어 안호아촌을 방문했던 그는 그가 떠날 때 학교 어린이들에게 약속했던 약속을 지켜 잠시 모국을 방문하여 거둔 성금으로 구입한 풍금 한 대를 그가 재건한 초등학교에 기증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추 대위와 임무를 교대한 곽충도 중위(해간 35기)는 67년 12월 하순경 청룡부대가 호이안지구로 이동할 때 이 관측소를 폐쇄할 때까지 약 9개월 간 관측소를 운용했는데, 그 기간 중 관측소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성분이 불투명한 약 1000명의 피난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그 난민촌에서는 간혹 ‘라오스 조선연맹’이란 글자가 새겨진 손수건과 삐라 및 북한 인공기 등이 밤중에 뿌려지기도 했는데, 그 삐라에는 해병대들에게 전향(轉向)을 하여 라오스쪽으로 넘어오라는 내용의 선동문도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수색소대 선임하사관이 파견되어 있던 누이트론 관측소에서는 어느 날 벼락이 떨어져 일부 대원들이 기절을 하여 가사(假死) 상태에 빠졌으나 조상들로부터 전수받은 신통한 비방(秘方)을 알고 있던 몽타냐 산족들이 마치 마법을 쓰듯 풀잎을 이용하여 질식해 있는 대원들의 코와 입에 바람을 불어 넣어 코와 입에서 김이 나오게 한 끝에 용케도 기절한 자들을 깨어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안호아 관측소에서는 어느 날 관측소를 점령하려는 월맹군과 베트콩의 기습공격을 받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관측소의 동굴진지를 무덤으로 알고 있는 장병들의 결사적인 분전과 아군과 우군(미 해병) 포대의 빈틈없는 지원사격으로 그 적들을 격퇴시켰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그러한 일이 있은 후 소대장 곽충도 중위는 동굴진지의 보강작업을 위해 진지 내에 매장되어 있는 월남군 수비대원들의 시체를 난민촌 촌장의 협력을 얻어 불교의식에 의한 제(祭)를 지낸 다음 고지의 8부 능선 쪽으로 이장했는데 그 때 수색소대 대원들은 그 시신들을 관측소 내부의 동굴 속에 안장한 월남군 군인들이 판초(우의)로 싸서 양철판 위에 얹어 야트막하게 묻어 둔 그 시신들이 전혀 썩지 않은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안호아고지 주변의 울창한 밀림 속에는 호랑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맹수들이 서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명사수로 알려진 곽충도 소대장은 그가 발견한 호랑이(수컷) 한 마리를 M16소총으로 사살하여 화제를 모았는데, 이 지면에 게재된 호피(虎皮) 사진이 그가 추억의 기념물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바로 그 증거물이다.
안호아관측소에서 근무했던 그 2인의 소대장들 중 00년 00의 계급으로 예편했던 추준호씨는 오래 전 목자(牧者, 목사)가 되어 미국으로 이민 간 후로는 소식이 단절된 상태이며, 71년 대위의 계급으로 예편한 뒤 74년부터 2001년까지 경향신문사를 시작으로 서울, 스포츠서울, 문화일보, 코리아헤럴드 등 여러 언론사의 광고부 간부직으로 활약했던 곽충도씨는 현재 광고대행사인 A+에드컴의 대표로 재임 중에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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