越南戰 - 청룡부대 초대 정훈참모 박영욱 소령
청룡부대의 초대 정훈참모로서 모군과 국군의 명예와 국위 선양을 위해 눈부신 활약을 했던 박영욱 소령, 그는 해풍작전에서 3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가 전사했을 때 고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여단장 이봉출 장군의 뜻을 받들어 매스컴의 각광을 받게 했던 사명감에 투철한 정훈장교로 기억되고 있으며, 66년 4월 중순경 출장용무로 일시 귀국했을 때는 TBC의 이브닝쇼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바로 그 다음날 청와대로 초청되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뜨거운 환대를 받았는데, 그와 같은 일은 월남전에 참전한 각 군 보도 장교들 중 전무후무한 일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울 출신(1934년생)으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수료한 뒤 해간28기로 입대(59.4) 임관하여 해병제1사단에서 소대장 근무를 마친 뒤 서해도서부대(백령도) 정훈관으로 임명되었던 그는 평양방송이 잘 들리는 그 특수 전초지대에서 장병들의 확고한 정신무장과 도민들의 반공사상 계몽 및 봉사활동을 위해 다음과 같은 의욕적이고도 효과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그 당시만 해도 KBS의 전파출력은 약한 반면 거리상으로 가까운 평양방송이 잘 들린 그러한 상황 하에서 장병들의 정신무장을 보다 확고하게 가다듬게 하기 위해 박영욱 정훈관은 교육과 시사뉴스지가 될 수 있는 ‘해병도서주보’라는 도서부대 기관지를 발간했는데, 1면에는 시사 2, 3면은 교육. 4면에는 연애와 오락 및 상식에 관한 기사들을 게재한 그 기관지 발행을 위해 그는 취재하는 일과 기사를 쓰는 일, 편집과 각자(刻字), 등사를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도맡다시피 했고, 특히 당시의 도서경비부대장 오상규 대령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부대의 초소단위 순회교육과 백령고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한 월 1회의 반공교육과 도민들에 대한 계몽영화 순회 상영 등을 위해서도 정성을 다해 봉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사단본부 정훈참모실 공보과장, 정훈참모실 보좌관을 거쳐 65년 9월 대위의 계급으로 청룡부대의 초대 정훈참모로 임명되었던 그는 초대 청룡부대장 이봉출 장군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가운데 부대의 명예선양과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보도업무 수행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특히 청룡부대가 캄란지구로부터 투이호아지구로 이동한 직후 그는 청룡부대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투이호아방송국과 교섭하여 투이호아방송국에 ‘청룡의 시간’ 방송시간을 배정받아(처음에는 매일 10분간 씩, 그 뒤에는 20분) 정훈참모실에서 직접 방송 원고를 작성하여 아나운서를 별도로 확보하지 않고 정훈참모를 비롯한 정훈요원들이 직접 방송을 했는데, 장병들에게 모국의 국내 뉴스를 알리고 사기앙양을 도모하기 위해 시도했던 그 ‘청룡의 방송시간’은 그 후 주월한국군사령부에서 방송요원과 편성 및 엔지니어링 요원들을 파견하여 주월한국군방송으로 운용하게 될 때까지 존속이 된 주월 한국방송의 효시(嚆矢)기 된 의미 있는 방송으로 기억되고 있다.
고 이인호 대위가 전사했을 때 정훈참모 박영욱 대위가 남긴 보도와 관련된 비화는 이러했다.
즉 3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의 전사 소식에 접하게 된 박 대위는 주월사 보도실에 보낼 기사를 구상하고 있었으나 장교가 전사했을 경우 유가족에게 전사통지서가 전해지기 전에는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규제한 주월 미군의 보도 규정에 준한 국방부 보도규정과 전사자가 장교일 경우 주월사 감찰실에서 현장 검증을 실시한 연후에 보도를 하게 돼 있는 국방부의 보도규정 때문에 기사 작성을 유보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 다음날 오후 외신기자(AP인지 UPI인지 미상) 한사람이 특종감을 노려 여단본부를 방문하자 눈이 번쩍 뜨인 그는 “바로 어제 청룡부대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운을 뗀 다음 “베트콩이 은신해 있는 동굴을 수색하고 있던 3대대 정보장교 이 대위가 뒤따르는 부대원을 의식하고 굴러오는 수류탄을 가슴으로 덮쳐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고 하자 크게 감동한 그 외신기자는 “분명히 장교가?”하고 되물어 본 다음 박 참모의 안내로 여단본부 통신대로 가서 장거리 단파무선송신기(SSB)를 이용해서 사이공에 있는 자스타우(외신기자구락부)에 ‘살신성인’에 초점이 맞춰진 이 대위의 전사소식을 송고함으로써 고인의 죽음을 그처럼 값진 죽음으로 빛나게 했고, 그 기사가 외신을 타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규제(보도규정)가 철폐되어 국내 신문에도 일제히 보도가 된 것이었다. 동굴 수색 중에 전사한 이인호 대위의 전사 현장과 관련된 이야기는 본서에 수록된 ‘이인호 대위가 전사한 그 동굴을 파헤친 권기옥 소위’편에 소상하게 적혀 있다.
73년 9월 소령의 계급으로 예편했던 박영욱씨는 예편과 동시 이봉출 장군이 사장으로 취임한 한불(韓佛)합작회사인 대한알미늄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총무과장 영업과장 등의 요직을 거쳐 본사 공장(울산소재)의 노무 재산관리 업무를 비롯하여, 일반사무 원가회계관리 등의 주요업무와 경비, 새마을 사업 및 예비군과 직장 민방위대에 관한 업무까지 총괄하는 관리본부장을 역임하다가 동 회사의 민영화로 이봉출 장군과 진퇴를 같이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최근의 근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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