越南戰 - 특파원에게 포경수술을 권유했던 권혁조 박사
광운대학교 전자공학부 교수로 재임 중인 권혁조(權赫祚) 박사, 그는 자신이 청룡부대 정훈참모실 보좌관으로 근무할 때 대학(서울대) 동창인 모 중앙일간신문기자의 현 모 특파원이 카메라맨을 대동하고 여단본부를 방문하자 조금이라도 그들을 부대본부에 오래 머물러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 전대(前代) 미문(未聞)의 아이디어인 포경수술 작전을 기획하여 성공시킨 애군정신에 투철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서울출신(1938년생)으로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해간 32기로 입대, 임관(63년)했던 권 박사는 소위 임관과 동시 서부전선의 최전방 전초중대에서 소대장 근무를 마치고 65년 10월 3일 청룡부대가 월남으로 출정할 때 부대본부 경비중대 요원으로 편성되어 여단본부 외곽지대에 대한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중 외국인 기자들의 방문이 잦은 여단본부 정훈참모실 보좌관으로 발탁되어 약 1년 간 보도업무 뿐 아니라 정훈에서 관장하고 있던 위문공연 등 특별봉사업무까지 맡아서 추진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여단본부를 방문한 대학동창 출신의 기자와 그가 대동한 카메라맨에게 뚱딴지 같은 포경수술을 권유하게 된 동기와 결과는 이러했다.
청룡부대가 상륙기지인 캄란만으로부터 투이호아 지구로 북상한 후 청룡부대에서는 월남으로 파견된 국내 언론사와 방송사의 특파원들(기자와 카메라맨들)이 발로 뛰며 취재를 하려하지 않고 주월 미군사령부와 한국군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는 사이공에 눌러 앉아 취재를 하여 본사로 송고하는 바람에 어떻게 하면 그들을 여단본부로 초청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마침 대학 동창인 J일보사의 현 모 특파원(서울대 상대 출신)이 카메라맨과 함께 여단본부를 방문하자 그 호기를 놓치지 않고 정훈참모 박영욱 대위와 의논한 끝에 고금(古今)의 전쟁사상(史上) 유례가 없는 그처럼 해학적이면서도 실효성 있는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되었던 것이며, 그 결과는 이렇게 귀결되었다.
즉 그러한 작전을 구상한 권 보좌관과 박 참모는 먼저 여단본부 의무실에 근무하는 외과군의관으로부터 포경수술에 소요되는 시간과 치료기간 등을 알아본 다음 그 두 사람의 방문객에게 “여단본부에 10분이면 수술을 끝내고 이틀이면 치료를 끝내 주는 포경수술 전문군의관이 있는데 혹시 두 분 중 포경수술을 해야 할 분이 있으면 모처럼 방문한 기회에 수술을 받고 가시지요”하고 권유하자 어릴 때 수술을 받았다고 말한 카메라맨과는 달리 귀가 솔깃해진 권 중위의 대학 동창이 선뜻 그 ‘미끼에 걸리게 되어 지체 없이 그를 야전의무실로 안내하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10분이면 된다고 한 수술시간이 1시간이 걸리고 2일 간이면 족하다고 말했던 치료기간이 열흘이 되어도 끝나지를 않자 현 기자는 어리석게 정훈장교들의 계략에 속아 넘어간 것을 뒤늦게 후회했으나 회지무급한 일이 되고 말았다.
생각 같아서는 사이공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며 취재활동을 해 볼 의향도 없지 않았으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권 중위가 “안정된 상태에서 끝까지 치료를 받아야지 만약에 열대지방에서 염증이 도저 상처가 더치기라도 하면 큰 변을 당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바람에 그 말이 마음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2주간의 출장기간 거의 모두를 청룡부대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고, 또한 그 기간 중 권 중위와 박 참모는 전투부대에서 취재한 생생한 보도 자료를 현기자에게 제공하여 본사에 송고케 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오로지 청룡부대만을 위해 활동하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음 이야기는 그 후일담이다. 그로부터 먼 훗날(필자가 정훈동지회의 회장으로 있을 때) 필자는 그 화제의 주인공(당시 J일보사의 부사장)을 OPC사장 권혁조 동지의 제의를 받아들여 군방송국 보도부장 이정민씨(포항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와 함께 정훈동지회의 고문으로 추대하여 환담을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지금은 고인이 된 그 현 부사장은 감개무량한 자신의 주월 특파원 시절을 회상하며 여러 사람들 앞에서 비록 그 때 대학 동창인 권혁조 중위와 정훈참모 박 대위의 꼬드김에 속아 난처한 입장에 처하긴 했으나 그 대신 해병대 정훈장교들의 투철한 사명감과 애군정신을 그 때처럼 실감나게 느껴본 적은 없었다고 했고, 또 덕분으로 그 생민기지(生民之器·성기)도 잘 써먹고 있다는 말을 하여 폭소를 터뜨리게 했었다.
한편 66년 월남전선에서 귀국한 후 국방부장관과 청와대안보담당특별보좌관을 차례로 역임한 김성은 장군의 전속부관 근무를 끝으로 69년 말경 중위의 계급으로 예편했던 권혁조 박사는 예편 직후 OPC의 방계회사인 동양목재(주)에 입사하여 약 7년 간 동 사의 시애틀 주재원으로서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시아를 대상으로 한 원목 도입 무역실무를 관장하는 가운데 국제 무역 업무에 대한 전문가로서 성장했고, 그 기간 중 OPC의 지원 하에 워싱턴 대학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던 그는 77년 본사로 귀임한 후론 기획, 총무, 무역담당 이사를 차례로 거쳐 80년도엔 첨단 컴퓨터 회사인 동양시스템산업 사장으로 발탁되어 컴퓨터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OPC의 발전에 크게 공헌함으로써 83년 연말에 이르러선 물망에 오르고 있던 수많은 선배 중역들을 제치고 OPC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고, 그 이듬해 정부로부터 수출 5천만불탑 상을 받는 영예를 누림으로써 국내의 정보 산업계에 그 명성을 크게 떨친 바 있었다.
한편 OPC 사장에 이어 87년 OPC 부회장을 역임한 권 박사는 87년 ‘전자산업의 국제경쟁력에 대한 분석’이란 연구논문으로 광운공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 후 POSCO의 박태준 사장에게 스카우트되어 약 8년 간 POSCO의 이동통신 사업담당 사장, 경영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는데, 특히 이동통신 사장 재임시인 94년 권 박사는 정부로부터 신세계이동통신(017)의 사업허가(라이선스)를 받게 됨으로써 국내 최초로 디지털 방식에 의한 정보통신 수단 개발을 성공시킨 고무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2001년부터 광운대학교 전자공학부 교수로 재임 중인 권혁조 박사는 정보통신 분야에서 이바지한 그와 같은 뛰어난 공로로 정부로부터 산업포장을 받는 영예를 누린 바 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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