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전통·비화

해외 출전<2편> - 월맹군의 구정공세

머린코341(mc341) 2017. 7. 14. 17:01

해외 출전<2편> - 월맹군의 구정공세


  1966년 9월 19일 투이호아지구로부터 추라이지구로 이동한 이래 1967년 12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30여 회에 걸친 대대 또는 여단규모의 작전을 전개하여 적 사살 1370여 명, 포로획득 130여, 용의자체포 490여 명, 각종 화기노획 140여 정(문) 등 많은 전과를 거두었던 청룡부대는 그 이듬해(1968년) 1월 하순경에 이르는 사이에 새로운 작전지역인 호이안지구로 이동했다.


  청룡부대의 이와 같은 부대이동은 월남 제2의 전략도시인 다낭과 호이안시를 연결하는 1번 도로를 확보함으로써 월남정부의 통제구역 확장과 평정사업을 지원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부대이동을 완료한 단계에서 청룡부대는 1월 30일 새벽 2시 30분을 기해 월맹군이 연합군측과 맺은 구정휴전협정을 위반하고 월남전역에서 기습적인 대공세를 취함에 따라 이를 반격하기 위한 작전(괴룡작전)을 전개했다.


  당시 청룡부대의 전술책임지역 내에서 공세를 취했던 적군은 월맹정규군 제2단 예하의 3개 연대를 비롯한 수 개의 지방군 대대 병력이었으며, 이들 적 부대의 작전기도는 호이안시와 다낭시를 점령하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적군의 공격은 디엔반군과 휴논군 일대에 배치된 아 해병2대대와 호이안시와 두이센군 일부지역에 배치된 제3대대의 강력한 반격전에 부닥쳐 그 뜻을 이루지를 못했다.


  약 1개월 반에 걸쳐 전개된 반격작전에서 청룡부대는 미 해병대의 공중지원과 미 해병대로부터 배속 받은 전차 및 LVT의 협조와 지원 하에 62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수 명의 포로와 90여 정의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아군도 230석 명에 달하는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3편의 글은 구정공세 초기에 많은 사상자를 낸 10중대와 특공중대 및 임시진지에서 치렀던 6중대에 관한 기록이다.


  월맹군의 구정공세 때 가장 많은 인명손실을 입은 중대는 10중대와 특공중대였다. 1월 30일 오후 2시 30분경 10중대는 11대의 LVT에 분승하여 집결지인 탄잔2부락에서 송바우강의 긴 교량을 건너 호이안시 동쪽 4키로 지점(583번 도로)으로 이동하여 숙영을 하고 있던 중 그 이튿날 새벽 호이안시 상공의 화염을 목격하고 긴급상황에 대비하고 있다가 날이 밝은 후 이동 목표지역으로 기동을 게시했는데, 첨병소대(1소대)가 작은 숲으로 진입하는 개찰지의 논두렁 위에 기관총을 내려 놓는 순간 숲 양쪽으로부터 기습적인 집중사격이 가해짐으로써 졸지에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된 것이었다.


  소대장 박승진 중위를 비롯한 30여 명의 대원이 일시에 쓰러지자 중대장 윤춘웅 대위는 1소대 뒤를 따르고 있던 3소대(장, 장쾌춘 중위)와 후위소대인 2소대(장, 강인회 중위)를 차례로 투입했으나 늪지대와 같은 게활지가 노출이 된 데다가 사방에서 총탄이 빗발쳐 공격이 부진했고, 정오경에 이르러 특공중대가 투입이 되었으나 약 500미터 좌전방으로 진입한 특공중대 역시 적의 포위망 속에 들어 초장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 속에 1소대가 피격을 당한 그 현장에서는 이런 일이 빚어지고 있었다. 즉 논두렁 앞에 쓰러진 한 대원이 "소대장닐 날 구해 주세요"하고 연거푸 소리치다가 끝내는 '야 이새끼야, 날 살려 달란 말이야!"하고 소리치자, 얼굴에 총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던 소대장 박 중위는 차마 그대로는 있을 수가 없었던지 한사코 말리는 전령의 제지를 뿌리치고 70~80야드 전방에서 소리치고 있는 그 대원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상반신을 일으키다가 이마에 저격탄을 맞고 꼬꾸라지고 말았다.


  이 날 오후 10중대는 포병관측장교 이우한 중위가 1소대의 피격현장 전방에 백린연막탄을 투하해 줄 것을 포대에 요청하여 연막의 차장 하에 상당수의 피해자들을 끌고 와서 매드백을 통해 후송했으나 매드백을 호위한 건쉽(무장헬기)의 제압사격으로 여러 명의 대원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이 날 밤 2소대장 강인회 소위는 7~8명의 대원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논두렁에 경기관총이 놓여있는 최전방 지점까진 가지 못하고 그 후방에 남아 있는 시신과 부상자를 죄다 끌어 왔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강 소위는 넋두리처림 "우리 소대장님 살려 주시이소"하고 뇌깔이고 있는 중상을 입은 소대장 전령은 함께 끌고 올 수 있었으나 "일어섯"하고 소리치자 벌떡 일어서기까진 했으나 '뚸어갓'했을 때 한 쪽 눈알이 덜렁거리고 있던 통신병은 이내 주저앉아 버리는 바람에 다른 대원들을 시켜 부축해 가게 했다.


  한편 이 날 한밤중에 중대본부에서는 이린 일이 있었다. 즉 개인호 속에서 선잠을 자고 있던 포병관측장교 이우한 중위는 중대장(윤춘웅 대위)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약 5~6미터 떨어진 중대장호로 기어갔는데 바로 그 직후 공중에서 터진 항공조명탄의 큼직한 첫조각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이 중위의 비어 있는 호를 덮치자 그 현장을 목격한 대원들은 이구동성 인명이 재천이라는 말들을 하며 필시 하느님께서 중대장을 시켜 그를 불러내게 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다음날도 10중대는 명령에 따라 공격은 하지 않고 산발적인 적의 사격을 받는 가운데 적과 대치하고 있었으나 오후 3시경에 이르러 2소대의 양 일병을 비롯한 3명의 대원이 논두렁 위에 방치된 경기관총과 논두렁 아래 흩어져 있는 3구의 시신을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용감하게도 경기관총을 목덜미에 울러 메고 달려왔다가 남은 시신 한 구를 끌어오기 위해 재차 현장으로 달려갔던 양 일병은 오는 도중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한참동안을 꼼짝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한쪽 손을 복부에 갖다댄 채 기어이 그 시신을 끌고 옴으로써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대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그 양 일병은 입대 전 싸움박질을 잘 해 전과 3범을 기록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를 후송할 때 여전히 한쪽 손을 복부에 갖다 댄 채 "소대장님, 저는 살아서 돌아갑니다"하며 거수경례를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그 자리에 주저앉는 헤프닝을 연출했다.


  그 다음날 오후 10중대는 총공격을 감행할 예정이었으나 적정이 사라지는 바람에 총공격은 중지되었다.

 

  다음은 특공중대의 상황이다. 그 날(1.31) 정오경 10중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투입이 된 특공중대(-)는 중대본부 제대보다 약500미터 앞에 가고 있던 1소대(장, 서정호 소위)가 상황도 상의 좌표를 잘못 짚은 것이 화근이 되어 몇 채의 독립가옥이 산재해 있는 개활지로 들어섰다가 갑자기 울린 총성과 함께 M79 유탄발사기 사수 김지원 일병이 저격을 당해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자 1소대의 첨병분대장 김영대 하사가 70~80미터나 되는 거리를 쏜살 같이 달려가 이마에 찰과상을 입고 쓰러진 김 일병을 끌어안고 돌아왔으나 현장에 버려둔 유탄발사기를 챙겨오지 않아 재차 달려가서 그것을 가지고 오던 김 하사가 도중에 어깨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자 이번에는 통신병 황종만 일병이 분대장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는데 볼행하게도 그는 분대장 곁으로 다가가기도 전에 이마를 저격 당해 즉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박재순 병장 등 2명의 분대원이 달려가 누운 자세로 분대장을 끌고 와서 응급조치를 했는데 황 일병이 죽음을 무릅쓰고 분대장을 구하려 갔던 것은 언젠가(추라이지구에서) 황 일병이 말랄리아에 걸려 수용중대에 입원해 있을 때 어려운 틈을 타서 자주 문병을 와 준 그 친형 같은 인간성에 감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첫 총성이 울렸을 때 총성이 들린 방향을 탐지하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던 1소대장 서정호 소위는 약 100미터 전방에 있는 야자수 숲이 수상쩍게 여겨져 휴대용(1회용) 로켓포로 맨 앞쪽에 있는 나무를 공격하게 했으나 포탄이 빗나가는 바람에 몇 개 안되는 포탄이 동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중대본부에 야자수 숲을 포로 때려 줄 것을 요청했으나 중대본부에 위급한 상황이 벌어져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서 소위는 현장을 소대선임하사관 박 중사에게 맡겨 두고 1회용 로켓포를 가져 오기 위해 전령과 함께 약 500미터 후방에 있는 중대본부로 달려갔는데 현장에 가본즉 중대장(지순하 대위)은 복부에 총탄을 맞아 쓰러져 있있고, 중대본부와 2소대(장, 김무일 소위) 및 화기소대(장, 박병훈 중위)에서 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포병관측장교와 미 해병대의 엥클리코맨이 계속 포사격과 매드백의 출동을 요청했지만 월맹군의 전면공세 때문인지 그 요청이 묵살되고 있었다.


  한편 전령과 함께 5문의 휴대용로켓포를 가지고 소대본부로 돌아왔던 서 소위는 그 로켓포로 맨 앞쪽의 야자나무 두 그루를 쓰러뜨려 그 나무 위에서 뛰어 내리는 2명의 저격병을 사살했다. 그때까지 묵살을 당하고 있던 지원 포사격이 이루어지고 매드백이 날아온 시각은 오후 4시경이었다. 그러나 구급헬기는 착륙할 때를 노려 집중사격을 가하는 보이지 않는 적병들 때문에 2시간 동안이나 상공을 선회하다가 되돌아가려고 했으나 엥글리코맨의 읍소(泣訴)로 결사적인 착륙을 결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엥글리코맨이 읍소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화기소대장 박병훈 중위가 중대장을 비롯한 중상자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엥글리코맨에게 권총을 들이대곤 "만약에 저 매드백이 그대로 돌아가게 되면 당신을 사살해 버리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포격이 끝난 후 1소대에서 목표지역의 촌락을 수색해 본 결과 그 마을에는 개활지에 산재해 있는 독립가옥과도 연결이 되는 거미줄 같은 지하 땅굴이 파여져 있었고, 7~8구의 적 시체는 유기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는 찾을 길이 없었다. 적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그 지하 땅굴에 있었던 것이다.


  이 날 일몰시까지 분산된 위치에서 산발적인 사격을 받고 있던 특공중대는 실탄이 떨어져 개인호에 의지하여 백병전을 치를 각오를 하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적의 공격은 받지 않았고, 날이 밝은 후 C레이숀이 떨어져 허기져 있던 1소대 대원들은 밭에서 자라고 있는 대추알만한 토마토를 따서 요기를 하려고 했으나 혓바닥이 아려서 먹을 수가 없었고, 2소대 대원들은 근처 개천에 떼지어 다니는 10여 마리의 오리를 잡아 탄통에 넣어 삶아서 먹었다. 그리고 중대본부와 화기소대 대원들은 야자열매를 칼로 베어 그 속에 든 물을 미시고 있었는데, 식량(C레이숀)이 공수된 시각은 그 날 오후 2시경이었다. 그 다음날 특공중대는 같은 위치에서 보이지 않는 적과 대치하고 있다가 밤을 세웠으나 별다른 사고는 없었고, 3일째 되던 날 오후 1시경 명령에 따라 10중대에서 인계해 준 시체 2구를 인수하여 중대기지로 철수했다.


  끝으로 남겨 둘 두 토막의 후일담이 있다. 먼저 소개하는 얘기는 1소대장 서정호 소위가 귀국 후 그가 김 하사를 위해(월남 전선에서) 내신했던 화랑무공훈장을 직접 수령하여 진해병원에 입원중인 김 하사에게 전달함으로써 김 하사의 가습을 뭉클하게 했다는 얘기이다.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필자로서는 대원들이 세운 전공을 그들이 전사를 했거나 부상을 당해 후송이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전공으로 내세워 훈장을 상신한 부도덕한 소대장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은 있어도 자신의 훈장은 상신하지 않고 후송된 부하대원을 위해 상신한 훈장을 대신 수령하여 병상을 찾은 지휘관이 있었다는 얘기는 달리 전해들은 적이 없었다.


  다른 하나의 얘기는 전상제대를 한 김영대씨가 자기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다가 전사를 한 황종만 일병의 양친을 자신의 친부모처럼 지성을 다해 받들어 모셨다는 얘긴데, 외아들을 잃은 그 노부모(당시 경남 창녕에 거주)를 현충일 때마다 국립묘지로 모시고 왔던 그 감동적인 후일담은 언젠가(약 20년전) '선데이 서울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다음은 6중대의 상황이다. 그 날(1월 31일) 6중대가 위치하고 있던 곳은 대대본부와 쨔큐촌 중간지점에 있는 도로변의 임시진지였다. 기지 남쪽에는 공동묘지가 있고, 북쪽에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전날 오후 월남군의 포진지가 있던 40고지로 이동하던 중 구정 휴전이 취소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월맹군이 6중대를 공격할것이란 정보가 입수됨에 따라 일시 점거하고 있던 그 임시진지를 보강하여 그 날 밤을 맞게 된 것이었다.


  6중대의 상황은 새벽 1시 10분경 기지 동쪽으로부터 20여 발의 포탄이 날아옴으로써 터졌으나 그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 났고, 쌍방 간의 공방전은 2시 50분경 재차 10여 발의 포탄이 날아옴과 때를 같이 하여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적은 아군의 화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1·2·3소대의 정면으로 쇄도해 왔고, 간간이 징소리와 호각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적이 공격을 개시하자 아군 진지에서는 60밀리 박격포의 조명탄을 계속 상공에 띄워 올려 그 불빛 속에 노출된 적병들에게 화력을 집중시켰고, 105밀리포와 4.2인치 중박격포 진지에선 포병관측장교(김형남 중위)와 관측하사관의 요청으로 적의 예상접근로를 강타하여 적 후속부대를 차단했다.


  추라이지구에 있을 때 청룡부대의 시범중대로서 여러 차례 야간방어전투훈련을 실시한 바 있던 6중대 장병들은 적과 교전을 하는데 있어서도 숙련된 전투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2소대 3분대장 이 모 하사와 1소대 1분대장 오석찬 하사는 용감하게도 교통호 밖으로 뛰쳐나가 공동묘지의 봉분과 비석을 방패삼아 공격을 하고 있는 적병들에게 수류탄을 투척했다. 그런데 전투가 계속되면서 아군 진중에서는 화기의 실탄과 60밀리 박격포의 조명탄이 부족해서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대장(국종표 대위)과 화기소대장(강성원 소위)은 "실탄을 아껴라!" "실탄이 떨어지면 다 죽는다!" "조준사격을 하라!" "크레모어를 아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렸고, 소대장들과 선임하사관들도 복창을 하듯 같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다그침에도 불구하고 조명탄이 꺼지기만 하면 저돌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적 때문에 실탄 걱정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끝에 1소대(장, 홍대선 소위) 진지에선 마침내 백병전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2소대 진지에선 소대장(최상범 중위)의 지시에 따라 야전삽을 빼들고 육박전에 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3소대장 이상원 소위는 "한 사람이 열 명은 때려 잡아야해!"하고 소리쳤고, 이 때를 기해 포병관측장교는 위험을 무릅쓰고 진내사격을 요청했으나 포대에서는 이에 응하지 않고 진지 주변을 때려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60밀리 박격포의 조명탄이 동이 나자 미 해병대의 엥글리코맨은 끈덕지게 항공조명을 요청하여 한 발을 띠워 올리면 3분간 켜져 있는 대형 조명탄을 오래도록 발사하게 했는데, 이날 밤 6중대는 운이 좋게도 여단의 105밀리포와 4.2인치 중박격포 외에 FSCC(화력지원협조단)의 도움으로 인접부대인 미 육군2사단과 다낭지구의 미 해병11연대의 155밀리포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동이 틀 무렵까지 탄약이 소진된 상태에서도 끝까지 진지를 고수할 수 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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