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24 - 해병대가 해체되고(2)
내가 연평도를 떠나던 날. 여객선 선착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 당시는 백령도에서 연평도를 거쳐 인천에 들어가는 여객선이 꼭 보름 만에 한 번씩 왔다.
한 번 배를 놓치면 한 달을 고스란히 기다려야 한다. 때마침 태풍이 불어 닥쳐 여객선이 한 번 결항되었다.
추석 명절에 고향에 왔다가 육지로 나가려는 사람과 체육 대회 등 부대 사정으로 휴가를 가지 못하고 밀려 있던 장병들과 오랜만에 여객선이 왔다 가는 날에는 의례히 환송하고 구경하는 사람들까지 합쳐 부둣가는 온통 사람들의 물결이었다.
나는 질서 유지에 문제가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우선 여객선 사무소에 가 이 많은 인원이 다 탈 수 있는지 확인했다. 충분히 여유가 있어, 모두 태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배를 타려고 하는 장병들 중 내가 최고 선임이었다.
객선이 부둣가 선착장에 닿기 전에 공터에다 장병들을 집합시켰다. 이곳 주민과 민간인이 모두 승선하기 전에는 일체 승선해선 안 된다고 일렀다.
민간인이 모두 타면 그 다음부터는 해군부터 태워주도록 했다.
해병대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 주고, 신뢰와 사랑을 받자고 외쳤다. 그렇지 않고는 날쌔고 동작 빠른 대원들이 무슨 일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착장에 배가 닿았을 때도 질서는 잘 유지되었다. 차례로 주민과 민간인이 모두 승선했다.
이제부터는 해군이 탈 차례였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여객선이 마지막 민간인을 태우고 군인들이 타려하는 그 순간 선착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모두가 소리쳤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여객선은 떠나갔다.
부둣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여객선에 박격포 사격을 가해야 한다고 소리치는 자도 있었다. 기관총을 빨리 가져오라고 야단인 자도 있었다.
드디어 해군기지 쪽에서 뱃머리에다 기관총으로 사격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뱃머리 앞에 실탄이 떨어지는 물보라도 보였다. 그래도 여객선은 포구 밖으로 점점 멀어져 갔다.
대원들이 몰려다니며 여객선 사무소와 임검을 위해 파견된 경찰 파출소를 습격하고는 기물을 부수고,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또 다시 보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더 참기 힘든 분노처럼 보였다.
나 역시 그들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들처럼 분노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해군 레이더기지에서 연락이 왔다.
근해에서 여객선을 호송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해군 함정에서 이 소식을 듣고, 여객선을 회항시켜 군인들을 태우기 위해 부둣가 선착장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른 장병들은 술까지 마신 후였다. 여
객선이 부두에 다시 돌아왔을 때, 대원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여객선 승무원과 승선하고 있던 경찰관을 묵사발로 만들어 놓았다.
그제서야 분이 풀렸는지 흥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참만에 사태를 겨우 수습하고 장병들 모두를 태운 여객선은 인천항으로 향했다.
육지로 간다는 설레임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큰 것인지, 오래도록 섬에 갇혀 있어 보지 못 한 사람은 알 턱이 없을 것이다.
인천에 불빛이 보인다고 누군가 소리쳤다.
나도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바다 건너편 휘양 찬란하게 수놓은 인천항의 불빛을 보았다.
섬에 들어간 지 얼마만인가. 가슴이 울렁이고,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여객선 난간에 서서 부두에 닿을 때까지 찬란한 불빛을 계속 바라보았다. 아이들과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이 잔잔한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부두엔 수십 명의 해군 헌병들이 오와 열을 갖추고 평양광장의 북괴군 같이 꼼짝 않고 서있는 것이 불빛에 보였다.
나는 사태를 직감했다. 서울 헌병감실에서도 수사관들이 내려와 있었다.
그때 이미 나는 연평부대의 소속이 아니었고, 해군본부 정보참부 소속으로 되어 있을 때였다.
그들은 나를 정중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나 모든 대원들의 하선은 금지시켰다.
나는 헌병대 수사관들에게 사건의 시종을 대충 설명하고, 이 대원들은 1초라도 빨리 육지에 발이 닿고 싶어 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들은 죽을힘을 다해 진지를 팠고, 손이 부릅트고 피와 땀을 흘리면서 진지공사를 마친 휴가자들이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모든 책임을 어떤 처벌도 받겠다. 나 외엔 제발, 여기서 바로 휴가를 떠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다.
나의 간청은 순조롭게 받아들여졌다. 무척 다행이었다.
서해 5 도서지역의 급박함과 장병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상급부대에서 이미 어떤 복안이 서 있는 듯 했다.
나는 부둣가 간이 사무실에서 아내와 세 아들, 그리고 처남을 만나고 곧바로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그 날로 나는 서울지구 헌병대 구치소에 수감되어 세 번째 별을 달았다.
옹진호 여객선 사건은 신문 방송에서 야단들이었다. 긴장이 고조되어 있는 서북도서에서 인천으로 휴가 나오던 군인들이 집단으로 술을 먹고 선상난동을 벌렸다느니 선원들과 경찰에게 행패를 부렸다는 등 악의적으로 크게 보도하였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노하셨다고 하여 이 문제는 해군 안에서 조용히 처리될 수 있는 문제를 넘어섰다.
구치소 안에까지 내가 예전에 모셨던 황병○ 장군님께서 직접 면회를 오셨다.
그분은 자기야 당연히 해군 측 장성들에게 잘 선처해 달라고 당부를 하였고 반응도 괜찮은 편이라고 일러주셨다.
그리고 나의 대학 동창, 고교 동창들이 큰일을 당한 나를 위해 매일같이 면회실에 몰려들었다.
연평부대에서는 모든 것을 혼자 책임지겠다고 나서서 구치소에 수감되어있는 옛 중대장을 돕고 다친 선원들과 경찰관을 위해 모금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해군에서도 점점 동정적인 분위기로 돌아섰고 헌병과 법무감실에서도 아주 호의적이 되어갔다.
그런데 청와대가 문제였다.
이 사건은 청와대 상황실에 보고되어 대통령께 보고된 사항이라 한번 보고된 사항에 대하여서는 계속 진행 상태를 파악하고 처리결과를 대통령께 보고하는 체제였기 때문이었다.
해군참모총장도 함부로 자기 뜻대로 처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루는 내 대학동창이었던 ○기덕, 윤한○, ○영용 등 신문, 방송 언론계에 있던 친구들이 면회를 왔다.
헌병감실에서는 그들을 특별 배려하여 감실 수사계장실에서 좀 더 자유로운 면회를 허용해 주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당시 서울 북쪽지역인 구파발 기자촌에 살고 있었던 ○기덕 KBS TV 방송국 기자가 큰 묘안이 있는 듯 불쑥 말을 꺼냈다.
“우리 뒷집에 청와대에 근무하는 계급이 높은 군인이 살고 있는데 아주 영향력이 있는 사람 같아. 내가 그 집에 대하여 더 알아보고 다시 오겠네”
그 다음날 급하게 다시 면회를 왔다.
그 군인은 오두창이라는 현역 육군대령인데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중요사항을 파악한 후 보고하는 청와대 상황실장으로 전반적인 상황보고에 대해 대통령께 책임을 지는 분이었다. 그
날 저녁 구치소를 관리 감독하는 헌병감실에 있던 동기생 김도삼 수사계장과 이 문제를 놓고 다각적으로 협의를 하였고 나는 그를 졸라 5시간만 감옥에서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물론 밤 12시 전에는 틀림없이 다시 돌아와 구치소로 복귀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물론 이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자를 임시 석방하여 무려 5시간이나 자유 시간을 준다는 것은 해군참모총장이나 승인 가능한 사항인지 모르지만 일개 감실 수사계장이 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란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주요지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 문제가 해군 안에서 해결될 수 없는 엄청난 사안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뢰하나로 나와 함께 큰 모험을 감당해준 김도삼 동기생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잊을 수 없다. 그가 주선하여 밤 12시까지 감옥에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탈주계획을 수립하였다.
우선 구치소 수감복장으로 그분을 찾아가 만날 수 없어 서울을 떠나 백령도로 들어갈 때 벗어두고 갔던 오래된 정복을 정비하여 수사계장실에 갖다 놓도록 부탁하였다.
구치소 안에서 저녁을 먹고 감실 수사과에서 조사 받을 것이 있다는 연락을 신호로 김도삼 수사계장실로 갔다.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고무신을 구두로 바꾸어 신은 후 ○기덕 기자와 함께 유유히 정문을 빠져나와 기자촌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오두창 청와대 상황실장에게 접근할 방법을 궁리해 보았지만 별다른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덕 기자의 집에 도착하여 차를 마시며 접근방법을 의논하였지만 결론을 얻지 못하고 정공법으로 접근해 보기로 하였다.
○기덕 기자가 초인종을 누르고 이웃에 산다며 자신을 밝히니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힘차게 거수경례를 하고 김기자와는 아주 친한 대학동창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는 해병대 장교 중에 연세대학교 출신도 있냐고 호감을 보이며 들어오라고 하였다.
응접실로 안내 되자마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렸다.
“상황실장님. 실은 제가 지난번 백령도에서 나오던 여객선 옹진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시면 대통령 각하와 조국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똑바로 선채 군인다운 목소리로 우렁차게 외쳤다.
오두창대령은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나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내가 그 일을 담당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가?”
“저는 어디 아는 분도 없는데 이 친구가 자기 집 이웃에 높은 분에 한분 살고 계신다기에 막무가내로 그분을 한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상황실장님, 젊은 장교에게 한 번 더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이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나에게 들려왔다.
“내일 자네가 출근하면 해군참모총장님을 찾아뵙고 나를 만났었다고 말씀드리게. 청와대 일은 내가 책임 질테니 나머지 일은 총장님께서 알아서 처리 하시라고 전해드리게”
일시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동안 임경섭 정보참모부장님과 제__대 해군참모총장님을 지내시고 현재 강원도 ______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계시는 함명수 의원께서도 황정연 참모총장에게 선처를 당부하였으나 청와대 때문에 처리되지 못하고 미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차 한 잔을 어떻게 마셨는지도 모르게 훌쩍 마시고는 집을 나섰다.
○기덕 기자의 집으로 가던 중 무엇인가 좀 이상하였다.
나는 현재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데 나의 신분으로 어떻게 이분을 만날 수 있으며 이 사실을 어떻게 참모총장님께 전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정상을 벗어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정신을 차려 보니 낭패 그 자체였다.
○기덕 기자를 졸라 다시 그 댁으로 되돌아가 초인종을 눌렀다.
“저는 지금 수감 중입니다만 실장님을 만나 뵈려고 5시간동안 탈옥한 상태입니다”
나의 당돌한 행동에 기가 찬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오두창 실장님께서 한마디를 던지셨다.
“야! 전대위. 좋아. 내가 내일 아침 총장님께 직접 전화해줄게”
대방동 서울구치소로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새털처럼 구름 위를 나는듯 하였다.
다음날 나는 즉시 석방되었다. 수습이 발 빠르게 진행 되었다.
그뿐 아니었다. 깜짝 놀랄 일이 또 하나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해 진급심사에서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예정자로 선발되어 있었다.
비록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지만 아직은 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진급예정자로 우선 선발이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차후에 죄과가 인정되면 진급예정이 무효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임경섭 정보참모부장의 배려이었지만 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진급을 한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는 번번이 위기 때마다 묶였던 올무가 풀려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을 맛보았다.
오두창 대령은 나에게 큰 은인이었고 그 이름만큼이나 쉽게 잊혀지지 않는 분이었다.
나는 그분의 성함을 죄송하지만 ‘구두창’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병대 사령관 글 > 22대사령관 전도봉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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