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23 - 해병대가 해체되고
황병○ 장군님은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는 날까지 다시 말하면 해병대라는 군 조직이 존재하던 날까지 내가 직접 모셨던 마지막 장군이었다.
해병대가 없어지고 해군에 통합된다는 소식을 듣는 그날부터 그분은 해병대를 떠날 준비를 했다. 그 분은 서울 미아리 쪽에 큰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품성이 좋고 선이 굵고 호탕하고 술을 즐기는 편 이었다.
1973년 10월. 해병대 해체와 함께 그분은 집으로 갔다. 당시 후암동 사령부에는 관리참모부에 김광○, 서울지구 헌병대보안과에 김무○ 서울경비대에 이강○, 병무감실에 이유○, 경리감실에 방민○, 정보참모부에 나, 여섯 명의 동기생이 있었다. 다른 동기생들에 비하여 김무일과 나는 수시로 만나고 전화통화를 했다.
해병대가 왜 해체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해병대가 미워서 육군이 주동이 되어 해체하게 되었다는 유언비어도 나돌았다.
어느 누가 주동이 되었고 우리 해병대를 없앤 자가 누구인지 알면 그놈을 저격해야 한다는 단호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 당시 헌병대에 근무하던 김무일은 항상 실탄과 총기를 휴대하고 다닐 수 있었다.
우리 모두 너무 억울하다고 여겼다. 6.25때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이 나라를 구하여 수도서울을 탈환하였고 월남전에서는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칭할 정도로 열심히 싸웠다.
언젠가는 해병대를 다시 세우고 이 군대를 지켜가야 한다고 의기가 투합하였다. 그리고 김무일과 나는 후일을 위해 군복을 벗지 않고 그대로 남기기로 합의를 보았다. 해체되기도 전에 벌써 해군본부에서 필요한 서류뭉치를 차량으로 싣고 가는 모습도 보았다.
완전히 초상 난 집 같았다. 해체되는 그날은 건물의 유리창이 모두 박살났다. 도서경비부대가 있는 최북단 백령도로 전속명령서를 받고 떠날 때 해병대 사령부는 흡사 동화 속에 나오는 유령 집 같았다.
인천에서 12시간 넘게 가도 가도 바다였다. 정말 멀고 먼 곳이었다. 그곳에 부임하여 나는 김치○ 도서경비부대장을 만났다. 제주도 출신으로 키가 작고 다부진 몸매였으며 열정적이고 역시 술을 좋아하고 호탕한 분이셨다.
해병대는 없어져 해군에 통합 되었다지만 이곳은 그나마 우리들끼리이고 멀리 떨어져 있어 안볼 것은 안보고 안 들을 것은 안 들으니 뱃속이 편한 곳임을 이내 알았다.(뉴스 피풀 백령도편 참고)
부대장은 나에게 정보 참모직을 주었다. 매일같이 장산곶, 월래도, 해주항에 대한 적 활동을 감시하는 것 이였다.
1974년부터 나는 몹시 바빴다. 느닷없이 김일성이가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등 자기들 영토이므로 즉시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강제점령 하겠다는 것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긴장이 고조 되어 갔다. 정부에서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적의 코앞에까지 전진 배치되어있는 이들 섬을 돌려줄리 만무 하였다.
적의 능력을 다시분석하고 대비책을 다각도로 강구하기 시작했다. 중국군(대륙군)의 상륙을 저지하기위해 요새화되어있는 대만정부의 금문도도 방문하여 도서 요새화 방법을 배워오기도 했다.
화기와 병력과 장애물이 증강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나는 연평도 중대장으로 명령을 받았다. 섬이 크고 중요하여 본래는 보병중대장을 마친 소령 급 장교가 임명되던 자리였다.
대위인 나에게 연평 중대장직을 주었던 것은 김치○부대장의 특별한 배려였고 나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덕분이었다.
전통적으로 연평 중대장은 장군이상의 힘을 실어주는 배후가 없으면 갈 수 없는 곳이라고 구전으로 전해지던 때였다. 그리고 연평도에 조기잡이가 한창 성업 중 일 때는 조기잡이로 인하여 봉급 외 뒤로 들어오는 수입도 꾀 괜찮다고 들었다.
그런데 나는 부임하러 갔던 첫날부터 전임 중대장이었던 소령분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인수인계할 중대 재물조사 결과에 너무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포며 매트, 치약, 칫솔, 비누 등 일용품, 주식인 쌀, 보리 그리고 기름, 삽, 곡괭이 등 재물대장 목록에 있는 품목이 거의 없었다.
나는 이런 상태로 중대를 인수 받을 수 없다고 취임식도 거부한 채 버텼다. 전임중대장은 이 취임식도 하지 못한 채 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 후 연평 중대가 이곳에 배치된 이래 계속 누적되어온 손실이며 전임중대장도, 그 전임중대장도 그런 식으로 인계인수를 해왔다고 말했다.
어떤 경우든 나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번기회에 모두 해결하고 다음 중대장부터는 이런 악습이 계승되지 않도록 새로운 전통을 세우고 싶었다. 나는 고집스럽게 타협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부임하고 한주일이 지났다. 소령분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자기가 육지로 가서 자기 돈으로 부족분을 채우고 모든 것을 해결 할 테니 대신 2개월 치 먹을 것과 기름과 치약, 칫솔, 비누 등 일용품만을 맡아 달라고 사정했다. 나는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해병대가 다 망하고 없어졌는데 자기도 중대를 인계하고 나면 군을 떠날 계획이라고 전역지원서를 제출한 선배를 그 이상 괴롭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서울의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중대의 형편을 계산해보니 최소한 4개월분까지 내가 받는 봉급을 보내 줄 수 없다고 알렸다.
그리고 사람을 인천에 보내 쌀과 보리 소금과 말똥비누(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빨래 할 때 쓰던 지금의 세탁비누 크기만 한데 시꺼멓게 말똥 같은 색깔이라고 말똥비누라 했다.)를 사와서 각 소대에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중대사정을 알리고 쌀과 보리는 1:1 비율로, 그리고 치약 칫솔은 아예 없으니 손가락과 소금으로 이빨을 닦고 이 말똥비누는 옷이며 얼굴, 목욕할 때 떼를 씻는 것에 쓰도록 명령했다.
어렵게라도 버텨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기름 이였다. 밥하고 국 끓이는데도 필요하고 난방, 그리고 등불에 불을 켜는데도 경유가 필요했다. 경우가 없이는 살수가 없었다. 가만히 궁리를 했다.
연평도에 해군이 운용하는 214 R/D기지가 있었다. 산 언덕 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수백 드럼의 경유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군견 두 마리가 철조망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린 그곳을 털기로 모의했다. 밤중에 마을로 내려가 R/D기지로 올라가는 그 언덕길에 깔아놓은 자갈밭 위를 덮을 가마니와 포대 등 소리가 나지 않게 할 수 있는 도구를 구해와 중대 창고 뒤에 숨겼다.
몰래 며칠을 계속했다. 그리고 군견 병에게 R/D기지 군견을 다스리는 비법을 개발토록 했다. 우리는 별빛만 반짝이는 깜깜한 그믐밤을 택했다. 1-2시 사이가 가장깊이 잠든 시간임도 알았다.
자갈밭위로 가마니와 푸대를 깔기 시작했다. 기름 창고로부터 드럼하나가 여유 있게 소리 내지 않고 굴러 갈수 있도록 100여 미터 넘는 곳에 소리 나지 않게 하는 고급 카페트를 깐 셈이다.
그날 밤 우리는 30 드럼을 굴려 내려왔다. 기름 창고를 지키던 군견도 소리하나 내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중대는 풍족하게 기름을 썼다. 그러고 한 달 이상이 지났다.
하루는 뜻밖의 방문자가 중대본부로 왔다. 214 기지 장 갓 진급한 해군 소령 이였다. 그전 중대장은 기지장보다 선임이고 해군사관학교의 선배였다. 그런데 이번엔 좀 껄끄러운 관계 속에 있는 것을 서로 안다.
소위임관은 내가 먼저이고 나는 여러 가지 연유로 그 당시 국방부 전체 최고참 대위였다. 기지장은 실은 후배이면서도 먼저 갓 진급해서 소령계급장을 달고 왔다. 물론 나도 그를 정중하게 대하지 않았다.
“중대장님! 다 좋은데 빈 드럼만은 돌려주시오” 그는 나에게 존칭을 써주었다.
그러면 ‘아! 미안하게 되었소’ 하고 빈 드럼은 돌려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역공을 했다. 그날 우리는 일체 그러한 일을 한 적도 없고 돌려줄 드럼도 하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기지 장은 그 후로 다시 우리중대를 방문하지 않았다.
74년 여름부터 이른바 서해 5개 도서 요새화 계획인 81계획이 적극 시행되기 시작했다. 우리 연평 중대에도 큰 변화가 왔다.
부대가 증편되어 연평 중대가 연평 부대로 되고 윤상덕 중령님이 부대장 겸 대대장으로 부임했다. 전방방어를 21중대와 22중대로 증강하였다.
기존에 있던 내가 지휘하던 연평 중대가 21중대가 되어 전방의 우일선, 소일영 대위가 지휘하는 22중대가 포항에서 증편되어 들어와 전방의 좌 일선을 맡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전방소대를 수시로 둘러보아야 했다. 새로 부임한 소대장은 사관학교 졸업생인 손인승 중위였다. 좌일선 소대를 맡겼다.
키도 훤칠하고 제법 괜찮은 장교였다. 손인승 1소대장을 통하여 내가 하나 이루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1소대지역에 50m넘게 해군기지에서 말장을 박고 만들어 놓은 좋은 천연어장을 빼앗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밀물과 썰물의 차가 심할수록 그물에 걸려드는 물고기가 꾀 많았다. 어떨 땐 1m 가 넘는 농어가 대여섯 마리나 걸려드는 경우도 있다 했다.
전임중대장이 214 R/D기지에 허가한 어장이었다. 물때를 맞추어 기지에서 해군수병들이 내려와 그물에 걸려 매달려있는 고기를 걷어가는 것이었다. 1소대장에게 엄명을 내렸다.
다음 물때에 기지에서 사전 허가 없이 예전처럼 그냥 해안 방어선을 넘어 물고기를 걷어 가면 이번에는 모른척하고 사격을 가하는데 기지대원을 피하여 근방에다 위협사격을 가하도록 서로 내밀하게 짰다.
그날 밤에 1소대 지역에서 사격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어김없이 물때를 맞추어 깜깜한 밤중에 레이더 기지 대원들이 그물을 쳐놓은 해안가에 접근했던 것이다.
물고기를 걷어 가지고 해안가로 나올 때 일제히 사격을 가한 것이다. 혼비백산한 기지대원들이 물고기를 내동댕이치고 달아났다.
해군 레이더 기지에서 야단이 났다. 해병대에서 사격을 해서 자기 대원들이 총 맞아 죽을 뻔 했다는 것이다. 나는 해군레이더 기지 장에게 전화를 했다.
전방소대가 교체되고 소대장도 새로이 부임하였고 중대장인 나도 그곳에 어장이 있는 줄 전혀 모르고 우리대원들이 실수를 했다고 사과했다.
다음에는 절대로 야간에 해안에 접근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일렀다. 안전을 책임 질수 없다고 했다. 그 후부터 1소대지역의 해군기지 어장은 우리 것이 되었다.
연평도의 요새화 계획은 급진전의 빠른 물결을 탔다. 부대가 다시 연대 급으로 증강되고 대령급부대장이 또 부임했다.
3~4개월 사이에 연평도의 제1수장이 2단계 밑 나락으로 떨어진 셈이다. 내 위에 대대장, 연대장급부대장이 새로이 생기고 나 혼자 우뚝 서서 연평도를 다스렸던 수장이었던 내가 그 밑의 여럿 가운데 묻혀 눈에 띄지 않는 졸이 되었던 것이다.
큰 변화였다. 새로이 화기도 증강되었다. 90m/m 전차포, 155m/m 포 해군함정에 장착되었던 3“ 포 등 전에 보지도 못하였던 화기들이 속속 들어왔다.
화기 진지를 선정하고 진지를 구축해야 하는데 이건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북괴군의 요새처럼 절벽바위를 뚫고 들어가 포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징이며, 쇠망치며 돌을 깨고 부수는 도구가 넉넉지 못하였으니 더욱 어려웠다.
우리는 매일 돌과 사투를 했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영국군 포로가 목조다리를 만들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작업이었다. 정말 돌과 사투를 했다.
그리고 돌을 파고 들어간 그곳에 포를 설치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무거운 쇳덩이를 인원이 많다고 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온갖 방법이 다 동원되었다. 배수선 때 쓰는 도르레, 쇠줄 그리고 긴 장대도 부둣가 마을에서 공출해왔다. 삼각대를 만들고 도르레를 걸고 쇠줄을 연결하고 그 무거운 쇳덩이를 1m. 1m 씩 옮겨갔다. 날이 갈수록 더 어려운 게 나타났다.
배고픔이었다. 윤상덕 중령님이 대대장으로 부임할 때 우리는 좀 긴장했다. 소문에 대대장은 북한괴뢰군 소위출신인데 전향하여 해병대 사관후보생 23기로 재임관한 장교라는 것이었다. 해병대장교 23기는 깡패기수이고 주먹 쓰는 사람이 많다고 소문났었다.
그래서 성질도 고약하고 괴뢰군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은 정반대였다. 솔직히 말해 생긴 모습은 그렇게 생겼는데 깨끗하고, 정직하고, 청렴한 분이었다. 부대에서 나오는 것 그대로 빼먹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 배고프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새로 연대장이 부임하고 나서부터는 주식은 물론 부식이 엉망이었다. 여러번 건의도 하였으나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하는 수 없이 중대장인 내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보급관이 쌀과 부식을 싣고 중대에 전달하는 시간에 중대 본부 앞에 지키고 서 있었다. 쌀과 보리 푸대를 트럭위에서 받아 어깨에 메고 중대창고로 옮기는 것이었다.
차마 눈뜨고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쌀자루를 어깨에 메면 들어있는 내용물이 너무 적어 보기 흉하게 양쪽으로 축 늘어지고 끝부분만 조금 볼록해지는 정도였다. 나는 야구방망이를 가지고 보급관을 사정없이 마구 내려쳤다. 그는 수송차량을 버린 채 도망갔다.
그리고 부대장에게 21중대는 중대장이 무서워 보급품수송을 할 수 없다고 일렀다. 나는 그 뒤에도 야구방망이를 들고 그 보급관을 기다렸다. 그는 중대 입구에서 나를 보고 도망쳤다.
소대장들은 대원들이 배가고파 더 이상 무리하게 작업을 강행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소대장들보다 중대장인 내가 더 사정을 더 잘 알고 있었다.
밥을 먹을 반찬이라고는 바닷물에 끓인 미역국한그릇 뿐이었기 때문이다. 간을 맞출 소금이고, 간장이고, 고춧가루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중대 보급하사관이 궁리하다 못해 중대장인 나에게 왔다. 중대장님 식사를 드려야 하는데 부대본부에서 나눠 준 것은 이렇게 누렇고 불그스레하게 물든 미역 뿐 이라고 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라고 물었다.
“소금이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사와야 해결 되겠습니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야 인마! 소금이 없으면 바닷물 퍼 다가 끓이면 될 거 아니냐!”
나는 그때 소금 대신 바닷물을 퍼다 끓이면 먹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날 저녁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도 나는 바닷물을 끓인 미역국 하나로 밥을 먹었다. 너무 힘들어 입속이 쓴 형편이었지만 미역국은 그보다 훨씬 더 썼다. 나는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전방소대는 물론이고 중대본부아래 있는 우물가에는 먹다버린 누런 미역가닥이 흐르는 개울물과 함께 줄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전령이 전화를 받고 진지 작업 중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부대장이 찾고 있으니 부대장실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부대장실로 갔다. 왜 찾았는지 웬만큼 짐작이 되었다. 보급관놈이 우리 중대 상황을 낱낱이 일렀다는 소문도 들었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니 심상치 않았다.
“21 중대장은 오늘부로 보직해임이야” 버럭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부대장님 화만 내시지 말고 제가 왜 보직해임이 되어야 하는지 이유를 말씀해 주셔야 하지요”
“네놈은 군용물 불애호죄야”
군대 경력도 짧고 군법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처지라 ‘군용물 불애호죄‘ 가 어떤 죄인지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다.
“부대장님 ’군용물 불애호죄‘ 란 것이 어떤 죄 입니까? 저는 어떤 죄를 지었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너희 중대에 가봐! 온통 가는 곳 마다 내다버린 미역천지야”
아! 나는 보급관을 못 살게 군 죄가 아니고 그 미역국 때문이구나.
“예! 그 미역은 저도 먹지 못하고 버렸습니다. 그게 죄가 된다면 좋습니다. 부대장님 구두로 보직해임 시키지 말고 문서로 보직해임 명령서를 발송해 주십시요. 돌아가겠습니다.“
나도 문을 꽝! 닫고 나와 버렸다. 중대본부에 돌아와 우물가를 다시 돌아보았다. 정말 온통 미역 천지였다. 나만 먹지 못하고 버린게 아니라 나의 부하모두가 먹지 못하였구나. 그들도 나처럼 지치고 배가 고플 텐데, 그리고 자기 상관을 원망하고 있을 텐데. 중대장실에서 돌아온 나는 끝까지 중대를 지키기로 마음을 굳혔다. 벌써 21중대장이 총대를 메고 부대장에게 덤비다 보직 해임되었다고 소문이 퍼졌다.
소일영 22중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싸울 수 있는 분은 선배님뿐이라고 격려를 했다. 군수참모 남명우 대위도 전화가 왔다. 나는 내가 요구한대로 부대장의 서면 보직해임서가 도착할 때까지 중대장직을 계속 수행하겠다고 부하들에게 선언했다.
이상스럽게 중대사기가 갑자기 더 높아졌다. 우리 중대장이 자기들을 위하여 보직을 걸고 윗분과 투쟁하고 있는데 대한 감사와 충성과 격려의 표시였다. 매주 화요일은 지휘관회의가 열리는 날이다. 그 날까지도 보직해임 문서는 중대에 전달되지 않았다.
“오늘부로 보직해임이야!”
버럭 고함을 친 부대장 앞에 지휘관 회의에 참석 한다는 건 좋은 모양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참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진지 공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요새화 계획에 따른 진지작업은 모두 예산사업이었다.
진지작업을 시작하기 전 부대장은 우리 중대장에게 음밀하게 약속하는 것이 있다. 이 작업은 일반 민간 노무자들이 하기엔 너무 힘들고 보안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그러니 작업은 우리 해병대가 맡고, 그 대신 그 예산으로 각 중대에 그에 상응하는 혜택, 즉 돼지 등을 하달하여 부하들에게 잘 먹일 수 있도록 조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달이 지나도록 그 약속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대에서 제공해야할 주식과 부식은 전임 대대장이 있을 때와 비교할 수 없도록 황폐화되어 갔다. 불만이 많이 쌓였다.
그런데 이러한 은밀한 약속과 전후사정 모든것은 소대장도 다 알고 있고, 소대원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형편이었던 것을 부대장은 모르고 있는 듯 하였다. 그 날 지휘관 회의에서도 부대장의 나에 대한 질책은 계속되었다.
회의가 끝나자 모든 참모와 지휘관들이 나를 격려하고 위로했다. 나는 부대장 방으로 갔다. 2주일이 지나도록 진짜 보직 해임을 시키지 못하고 있는 사정을 헌병과 보안대장이 나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연평 부대의 여러 가지 상황과 사정을 보고받은 상급부대장인 벽령도의 여단장은 중대장을 보직 해임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부대장에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부대장은 지난번처럼 험상궂은 표정은 아니었다. 중대장직을 계속 수행하겠다는 것과 주 부식을 개선해야 하고 대원들에게 해주겠다고 중대장들에게 한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부대장은 나를 바라보고 아무 대답도 없었다.
1975년 추석 명절을 전후한 9월은 부대체육대회 준비로 부대 전체가 온통 야단들이었다. 축구, 배구, 릴레이, 무장구보, 줄다리기 등 종목도 많았다. 단연 우리 중대가 우승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평도를 지켜왔던 토종 중대인데다가 선임 중대였기 때문에 전통을 세우고 지켜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벼르고 준비 중이었다.
그런 중에 해군본부로 전속 명령이 났다. 알고보니, 내가 해병대 사령부 정보참모부에서 열심히 우수하게 일하였던 소문을 듣고 해군본부 정보 참모부장이었던 임경섭 장군님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현지 부대 사정을 알리고 명령은 났지만 부임은 한 달 뒤로 미루기로 합의를 하고, 열심히 우승 준비를 했다.
모든 종목이 앞섰다. 마지막 남은 무장구보가 승패를 결정할 만큼 점수를 많이 주었고, 중요시했다. 그런데 마지막 결승점 100여 m 앞에서 우리 중대 한 대원이 쓰러졌다.
전혀 일어서지를 못했다. 이를 악물고 일어서려 하였지만 또 주저앉았다. 대원들이 무장을 나누어지고 그를 들쳐 업고 결승점까지 왔다.
정강이 가운데가 피로골절로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우리 중대는 우승을 22중대에 넘겨주고 눈물을 삼키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나보다 10여기 후배인 남명우 대위에게 중대를 인계하였다.
일체의 환송 선물과 전별금을 받지 않았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부하들의 주머니를 축내어선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남명우 중대장에게도 너도 떠날 때는 나처럼 하라고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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