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25 - 주변인
나는 어려서부터 해군을 좋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일곱 형제 중 세 명이 선원이었다.
셋째 형님은 원양어선 선장이었고 정년 은퇴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어선을 준비하여 낚시꾼으로 마지막까지 바다위에서 일생을 마감하신 분이었다.
그 분은 원양어선 뿐 만 아니라 거제도 주변해역의 물 흐름과 물고기 서식처를 귀신같이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새벽 뱃길을 나서면 다른 낚시꾼들도 줄줄이 그를 따라 먼 바다까지 나가 큰 수확을 얻고 돌아올 정도로 이름난 낚시꾼이었다.
내가 별 하나를 달고 포항에서 교육훈련단장을 할 때 먼 바다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바다위에서 돌아가신 분이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그분이 얼마나 힘이 세고 건장하였는지 마을사람들이 모두 장수라고 불렀다.
그분의 팔목이 나의 다리목 같았으며 다리는 내 몸 크기 정도가 되어 웬만한 바위도 거뜬히 옮기는 분이었다.
어머니께서 연세 드셔서 늦둥이로 나를 낳으셨을 때 젖이 몹시 부족하셨지만 그 형님이 몸뚱이만한 칡을 산에서 캐어와 절구에 넣고 찧어 그 가루로 나를 키웠다고 하셨다.
나와는 인연이 많은 형님이셨다.
넷째 형님도 잠시 동안 일본을 왕래하는 무역선을 타셨고 바로 위의 형님은 지금도 원양어선의 베테랑 기관장으로 엔진 소리만으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실 정도이시다.
우리 집은 바다와 꾀나 깊은 인연을 가진 집안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직업군인으로 평생을 지낼 생각이 있었다면 물론 처음부터 해군을 택하였을 것이다.
직업군인이란 생각은 당초부터 전혀 없었으므로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장 짧게 군대생활을 할 수 있는 해병대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삶이 무엇 하나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는 듯하였다.
군에 있는 동안은 목숨을 바칠 각오로 몸담았던 해병대가 나로서는 알지 못할 사건으로 해체되었고, 해병대가 해체되었다는 이유에서 생성된 ‘오기’라는 힘 하나로 준비되지 않은 해병대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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