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22대사령관 전도봉

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26 - 미국 가는 길

머린코341(mc341) 2017. 8. 18. 12:44

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26 - 미국 가는 길


1976년 초 나의 책상위에는 미국 유학생 선발모집 공문이 결재함 속에 함께 섞여있었다.


해병대가 해체되고 해군에 통폐합 된 후 우리 해병대는 모든 병과가 폐지되고 해군의 일개 전투병과인 ‘상륙병과’로 분류 되어 있었고 이 상륙병과 장교 중 미해병대와 미해군의 상륙전학교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공문서였다.


나는 보병장교였지만 필수교육과정인 초등군사반 과정이나 고등군사반 과정을 졸업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중대장을 마치고 소령까지 진급하였던 것이다.


초등군사반 과정 중 1966년 8월 8일 김해공군비행학교와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퇴교 당하여 해병대를 떠났었고, 1년 뒤 해병대소위로 다시 임관하였을 때는 한참 후배기수인 38기와 함께 초등군사반에 다시 입교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군생활을 오래 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후배들과 함께 꼭 교육을 받아야 하는 과정이 너무 싫어 거부하다 결국은 그마져 졸업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어디서든지 탈출구를 찾고 싶었고 그 중 하나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길이었다.매일 밤늦게까지 머리를 싸매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면서 틈틈이 유학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그 당시 해군본부는 해군사관학교 출신들이 어느 부서에서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유학시험에 관련된 자료나 정보는 해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나에게는 철저히 차단된 상태였다.


심지어 나와 가까이 지내던 후배장교들 역시 유학관련 자료를 보다가도 내가 나타나면 자기 책상 설합 속에 넣고 얼른 문을 닫고는 자리를 뜨기가 일수였다.


유학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실력뿐이었으므로 미친듯이 영어 테잎을 듣고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6개월 뒤 해군고시관실 주관으로 77년도 유학생 선발시험이 실시되었고 나는 미해병대 상륙전학교를 지원하고 응시하였다.


또 한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해군사관학교 출신들의 독무대였던 유학생 선발시험에 별종 한명이 합격하여 선발된 것이다.


경이적인 눈으로 쳐다보고 수군대더니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나갔다.


정말 자기 실력으로 선발 되었을까? 아니면 이번에도 임경섭 정보참모부장이 압력을 넣어 선발된 것이 아닐까? 하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지원한 입학시험에서 수학은 만점을 받고 영어에서는 단 한문제만 틀릴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10년 조금 지났지만 외교관 지망생이었던 나에게 영어는 필수적인 학문이었고 해병대에 입대한 후에도 틈틈이 타임지나 뉴스위크지를 읽고 있었다.


틈만 나면 술만 먹고 주먹만 휘두르던 무지한자로 알려졌는데 이게 왠일일까?


물론 해군사관학교 출신들을 제치고 유학시험에 선발되었다는 사실에 가장 놀란 사람은 임경섭 정보참모부장이었다.


그러나 놀람과 기쁨도 잠시, 해군인사참모부에서 성적대로 유학인원을 선발하였으나 합격자의 복무기록을 확인 한 결과 나에게는 감옥에 3회씩이나 수감되었던 기록이 발견되었다.


해군 규정에는 징계이상의 사유만 있어도 유학생 선발에서 제외한다는 조항이 있으므로 나의 경우 규정대로 처리한다면 선발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 된 셈이었다.


해군본부 수뇌들은 전도봉소령의 문제로 또 한번의 회합을 열었다.


불과 얼마 전에 옹진호 여객선 사건으로 해군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한 그 자가 이번에는 유학시험에서 좋은 성적으로 선발되었지만 복무기록과 관련된 규정에 걸림돌이 있으니 이미 선발된 자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최종적으로 선발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회합이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회의의 분위기는 ‘보기 드물게 책임감과 의협심이 강할 뿐만 아니라 경이적인 영어실력을 갖춘 자를 과거의 죄과 때문에 유학의 길을 막는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해군의 관련규정을 고쳐서라도 유학을 보내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함경도에서 피난 왔다가 거제도를 거쳐 해군에 입대하여 인사참모부 인사처장으로 재직중이던 ____ 대령이 주도적으로 의견을 이끌었었다.


그가 거제도 피난시절 그 곳 어느 분에게 큰 은혜를 입은 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임경섭 정보참모부장의 배후조정도 결정적인 역할이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