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22대사령관 전도봉

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28 - 이별이라 여겼던 진해로 다시 오다

머린코341(mc341) 2017. 8. 18. 12:51

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28 - 이별이라 여겼던 진해로 다시 오다


1978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교관요원으로 해군대학이 위치한 진해로 명령이 났다. 해병대가 해체되기 전 73년 까지는 이곳에 해병대 지휘참모대학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 그 대학은 간곳이 없고 푸른 간판의 해군대학이 우뚝 서 있다. 나와는 3년간만 연결될 줄 알았던 해병대와의 인연이 이렇게 끈질기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12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고 지금 나는 어떤 모습으로 이곳 진해에 다시 왔는가?


1965년 대학졸업반 당시 군을 필해야 하는 필수적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였던 곳이 해병대이었고 그 다음해에 해병대를 찾아 내려왔던 이곳 진해만은 유난히도 추웠었다.


내가 해병대를 처음 만났던 진해. 싱그럽던 젊음, 단 한점 티도 없던 젊은 시절의 순결했던 열정과 사랑이 바닷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해병대를 만나는 순간부터 이제까지 살아온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완전히 다른 기도와 소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난시절의 나 일수가 없었다.


해병대와의 만남, 그것은 비록 나뿐만 아니라 해병대를 만났던 우리 모두에게 하나같이 또 다른 출발을 의미하였다.


해병대는 우리 모두에게 완전히 달라진 또 다른 인간이 될 것을 요구하고 강요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였다. 해병대를 만나기 이전까지는 우리 모두 그런 세계가 있으며, 또 실제로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해병대! 그는 우리를 어디에서든지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방식으로 서로서로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우리로 하여금 바닷물속이나 갯벌위에서도 M1소총을 머리위에 거꾸로 세워 들고 오리걸음으로 오와 열을 정확히 맞출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온몸이 얼어붙고 남자의 상징마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밤, 조절기능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마비된 육신마저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던 우리들이었다.


모포를 둘러 쓴채로 오와 열, 행간을 맞추고 발을 맞추며 “뒤로 돌아가”, “오른편으로 돌아가”, “왼편으로 돌아가”를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우리들이었다.


우리는 상남훈련연대의 D고지,E고지를 쉴새없이 오르내리며 옆 전우의 무거워 하는 M1소총까지도 대신 메고 F고지까지도 달려갈 수 있다고 믿었던 우리들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숨을 몰아쉬며 오르던 천자봉, 그 가쁜 숨결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육체와 정신과 마음의 변화를 맛보았다.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혹독한 훈련과 피와 땀과 함께 흘리는 눈물을 경험하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싸워보기도 하였다.


우리에겐 서로 못할 말이 없었고 서로를 위하여 하지 못할 행동이 없었다. 전우의 목숨을 구하려고 수류탄위로 몸을 날렸다는 어느 대위의 무용담은 그 당시의 우리들에겐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가 능히 그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목숨이었고, 우리는 같이 달렸고, 우리는 같이 상처 입었고,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같이 미워하고, 같이 사랑하고, 같이 소리 지르고, 같이 꿈을 꾸며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며 같이 딩굴었다. 용지못에 들어가 함께 딩굴며 갈증을 이기지 못한 우리들은 그 흙탕물도 마음껏 함께 마셨다.


내가 다시 돌아온 진해는 옛날의 진해가 아니었다. 10여년의 긴 세월을 뒤집어 쓴 채 온갖 무거운 짐이 사방에서 나를 짖누르고 있었다.


내가 처음 선택했던 해병대는 없어지고 해군도 아니고 해병대도 아닌 자가 상륙병과장교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해군인 척하며 군생활을 계속하기에는 너무 많은 어려움과 제한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소위 군경력상 필수과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보병장교이면 필히 고등군사반을 수료하고 소령이 된 후 일선 보병대대의 작전장교, 연대의 참모잠교를 거쳐야 하며 해군대학의 정규과정을 이수하여야만 중령에 진급할 수 있는 유리한 자격이 주어진다.


그런데 나는 후방인 해군본부 정보참모부에서 소령시절의 절반 이상을 보냈고 해군영어학교에서 유학 준비과정 등 미국유학과 관련하여 거의 일년반을 보낸 상태이었다.


또다시 일선 보병부대에서 근무할 기회가 없이 후방의 해군대학 교관으로 명령이 난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해군규정상 유학 후 귀국한 장교에게는 배운 것을 해당대학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적 조건이 부과되어 있으므로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정황이라면 상식적으로 나에게는 중령에 진급할 수 있는 기회는 자동적으로 상실하게 되어있다.


그렇다고 전역하여 세상 속으로 가서 새롭게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길도 봉쇄되어 있었다. 유학 후에는 유학기간 1년을 포함하여 유학기간의 1.5배인 2년 6개월 동안에는 일체 전역할 수 없도록 해군규정에 명시되어있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나에게도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 갈수 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나와 나의 Escort였던 Micky Bradly와는 형제 이상으로 가까워 장래의 꿈과 자신의 계획 등에 관하여 이야기하곤 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미해병대 장교 출신이었고 전역 후 고향마을의 소방대장으로 봉사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학 졸업 후 미해병대 장교로 입대하여 일본 요꼬스까, 파나마 운하등 세계 여러 곳에서 근무하였고 상륙전학교에 입교하기 전에는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는 나토군 사령부의 보급지원처에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미해병대 장교의 필수 교육과정인 이 학교를 졸업한 후 진급에 실패하면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낸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틈틈이 진급 실패에 대비하여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듯 하였다. 우표수집과 동전수집을 취미로 하였던 그가 어느 날 은으로 된 백년이 넘은 미국 은화 한달라를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것을 꼭 간직하면 세월이 갈수록 값을 계산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보물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가 하루는 권총을 소지한 채 철제로 된 박스 하나를 들고 왔다. 휴식시간중 화장실에 가거나 책상의 자리를 비울 때는 나에게 자기대신 그 철제박스옆에 앉아 있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수업이 끝난 후 박스를 열어 보이자 누런 금으로 만든 미국 동전이 가득하였고 그는 백년이 훨씬 넘은 금화라고 자랑하였다.


나는 영화에서 본 것을 제외하고는 내 생전에 그날 이전 이후로 그렇게 많은 금으로 만든 동전을 본 기억이 없다. 틈틈이 수집한 것으로 그것이 그의 전 재산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가 서부극 연출장소도 아닌데도 권총을 차고 온 이유를 알 수 있었고 그렇게 귀중하게 다루는 것으로 짐작컨대 상당한 금액의 물건임은 틀림 없는 듯하였다. 그


의 말에 의하면 그 금화를 팔면 그 돈으로 당시 두 개의 작은 호수가 있고 비록 오래 됐지만 스페인식의 석조건물이 하나 있는 오크라호마의 시골지역에 ___ 에이커의 목장을 살수 있다고 하였다.


만약 그 석조건물을 잘 수리하면 세상에서 보기드믄 아름다운 집이 될 것이라고 연신 자랑하곤 하였다. 그렇지만 나를 유혹하는 것은 그 다음 말이었다.


언젠가 석재 아취모양의 입구를 가진 아름다운 석조건물 사진 한 장을 손에 쥐어 주며 이 집은 언제나 너의 몫으로 언제든지 너의 가족이 사용할 수 있도록 비워놓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는 세계 각국의 흥망성쇠에 대하여도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도 이야기 하였다.


그는 그럴 때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에 편안한 나라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렇게도 좋은 미국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조국이 비록 가난하고 힘이 없으며, 불리한 지리적 특성과 아픈 역사 속에서 살아 왔지만 조국을 지켜야 할 장교가 조국보다 더 살기 좋은 나라를 인정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의 권유에 대한 대답 만큼은 철저히 유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