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29 - 눈물고개에서 찢어진 가슴
해군대학으로 온 후 나의 유일한 취미는 오직 달리기였다. 아침이건 저녁이건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달렸다.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며, 나를 달래기도하고, 위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달리기 하나 뿐이었다. 달리는 동안 만큼은 나를 누르는 온갖 짐과 어두운 그림자, 갈등, 진급같은 근심 걱정이 송두리째 사라져 갔다.
나는 경화동 해병대 보급창고를 지나 해병대 교육기지사령부의 제1정문, 제2정문, 제3정문이 있었던 곳을 마냥 달렸다.
10여년 전 내가 처음 해병대 사관후보생 입교통지서를 받고 진해에 도착하였을 때는 진해 시내가 온통 붉은 간판으로 도배된 듯이 보였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적은 간곳 없고....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나’
73년 해병대가 해체되고 해군에 통폐합된 후 이곳은 모두 해군이 접수하였다. 그 많던 붉은 간판이 모두 제거되고 해군식의 푸른 간판으로 색칠되어 있다.
붉은색만 바라보며 살아왔던 내가 지금은 온통 푸른색 간판 사이를 달리고 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던 그때 그 젊은이들의 함성소리도, 고통과 신음소리도, 배고픔의 절규도 모두 사라졌다.
나는 어머니가 흰옷을 입고 머리에 흰수건을 쓰시고 서 계셨던 그 철조망 곁에 그날 그 이후에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었다.
울컥하고 찡하며 깊은곳에서 콧등에 와닿는 그리움과 어머니를 만났던 희미한 추억을 안고 그 철조망 곁을 지금 내가, 그때와는 달라진 사람이 다리고 있다.
총성이 산울림이 되어 메아리치던 산비탈 밑 사격장 앞을 달린다. 몸통과 머리가 있는 사람 상체모양의 표적을 향하여 실탄을 마구 퍼붓던 곳이다.
농촌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여 세웠다는, 그래서 거름 냄새가 늘 코를 찌르는 진해비료공장 앞을 지나 달린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돌아서는 반환점은 해군대학으로부터 정확히 7.5km 떨어진 어릴 때 살던 고향마을의 바닷가와 흡사한 작은 어촌마을 입구였다.
나는 42.195km의 1/3인 15km룰 매일 달려야 한다고 정해놓은 길이다. 해병대는 없어졌지만 손기정 선수처럼 언젠가는 해병대 마크를 달고 1위로 스타디움에 들어서는 꿈을 꾸는 것이다.
진해에서 상남 훈련장으로 넘어가는 긴 고갯마루. 무거운 배낭을 메고 바삐 가기엔 너무 가파른 고갯길이고 누구나 이 고개를 고통없이, 눈물없이 넘을 수 없다고 하여 이 고개를 걸어 넘었던 수많은 젊은이가 눈물고개라고 불렀다.
고개중턱에서 뒤돌아 본 진해만은 모든 것을 다 묻어버린 듯 지금은 어찌 저렇게도 평온하고 아름답게 보일까?
부리들이 머물렀던 그곳은 폭풍이 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번쩍이던 곳, 배고픔과 아픔과 절규와 눈물이 범벅이 되었던 곳, 앞도 뒤도 옆도 볼 수없이 사방이 막혀버린 깜깜한 지옥같은 곳이기도 했었는데. 아~ 아. 그래도 그곳을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쏟아 둔 눈물 때문에, 묻혀있는 아픔과 추억이 그리움이 되었었나보다.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도, 엉덩이와 허벅지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아픈 자국도, 기억하기조차 싫은 고약한 추억도, 그래서 우리는 이 고개를 바보 같은 사나이들처럼 눈물을 흘리며 지나갔나 보다.
지금은 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 언덕길을 달리고 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나의 숨이 멎을 것 같다고 자꾸만 경고를 보내고 있다.
그래도 나는 달리고 싶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슴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 귀로 내가 듣는다. 그것은 내허파가 한계점을 넘어 찢어지는 소리다. 나는 그렇게라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찢어지는 고통이 사방에서 밀려드는 어두움과 갈등, 불확실성의 성안에 갇혀 주저 앉아있는 것 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상남 훈련장에서부터 창원을 돌아오는 지옥의 100리길은 누구에게나 육신의 한 부분이 미이라가 되게 한 경험을 주었던 지옥의 길이었다.
반드시 무장을 하고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 가야만하였다. M1소총을 들었던 양쪽 팔은 석고처럼 굳어있어서 ‘세워총’ 구령에도 어느 누구하나 총을 내려놓지 못하였다. 이미 그 부분은 미이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먼지 나는 시골길가에 물동이를 양손에 든 동네 여인네들이 모여 들어 긴 줄을 만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옥을 넘어온 듯 허우적거리며 지나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나보다. 스쳐 달려가면서도 우리는 그들 눈가에 맺혀있던 이슬같은 눈물을 보았다.
물 한모금 주지 못하게 찢어지게 소리쳐대는 구대장의 목소리에 기가 질려 눈치를 보며 물동이의 물을 바가지로 퍼서 지나가는 대열 속으로 냅다 뿌려주는게 고작이었다.
그 물은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였다. 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기억 속에서 만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흐르는 땀과 함께 흘러내리는 그 물을 혀를 내밀어 핥아가며 우리는 계속 달렸다. 이제는 그때 그 어머니 같던 여인네들의 흔적도 없어졌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되어 서로 다른 추억을 간직한 채 세월 속에 묻혀버린 그 길 위로 나는 지금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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