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22대사령관 전도봉

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31 - 대통령이 죽어 내가 살다 (2)

머린코341(mc341) 2017. 8. 18. 13:01

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31 - 대통령이 죽어 내가 살다 (2)


결국 그해 10월 해대총장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탈고하였다. 그 다음 책자로 만들어 해군본부와 해병대 장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해 주었다.


며칠 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서울 국군 보안사령부가 발칵 뒤집혀졌다. 해군본부 보안부대도 바빠졌다. 진해보안부대가 당장 나를 호출하지만 나는 이에 응하지 않고 버티었다.


“조사할게 있으면 직접 나를 찾아와서 조사하면 될 것 아니야?”


이튿날 보안사 조사요원들이 학교로 들이 닥쳤다. 논문작성의 저의가 무엇이며 인쇄는 어디에서 어떻게 하였는지 꼬치꼬치 묻기 시작하였다.


사실 일반 인쇄소에 의뢰하였더니 최소 12만원을 요구하기에 경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해군대학 등사실의 군무원들에게 수고비와 담배 몇 갑을 사주고 몰래 부탁하여 인쇄하였었다. 만약 이 같은 사실을 그대로 말하면 등사요원이 단칼에 날아간다는 것쯤은 뻔히 알고 있었다.


“논문을 쓰게 된 배경은 논문 첫머리에 모두 나와 있고 인쇄는 서울에 내가 아는 친구 인쇄소에 맡겼소”

“거기가 서울 어디입니까?”

“내가 왜 그런 것까지 다 말해 주어야 하나?”


나는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해군의 보안요원들은 거의 다 나를 알고 있었다. 해군본부 정보참모부 핵심부서에서 근무하였고 해병대 사령부 정보국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는 정도는 모두 알고 있었다. 전문요원쪽은 아니더라도 돌팔이축에 끼어 정보, 보안에서는 함부로 다루지 못하였다.


첫날 그 이상 나와의 정면충돌은 피하고 해군대학내의 주변정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흩어졌다. 문제가 점점 확산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변재○ 보안부대장을 찾아갔다. 그분은 내가 정보참모부에 함께 근무할 때 보안처장으로 계셨던 분으로 고교 씨름선수 출신답게 골격이 크고 우람하며 대범하신 분이었다.


나는 이미 그분에게도 논문 한편을 우송하였다. 부대장 방에 들어가니 그분 책상위에 나의 논문이 놓여있는 것이 보여 좀 안심이 되었다.


“어이. 전중령 아닌가? 앉게. 그래 요즈음 무슨 문제가 있다며?”

“예. 부대장님. 바로 저 논문 때문에 난리들입니다”

“그래? 뭐가 문제인데?”


보안부대장이 일어서며 강택○(해사17기, 해군보안부대장, 준장예편) 운영과장을 불렀다.


“이봐 운영과장. 저 논문이 뭐가 문제인가? 나도 읽어 봤네만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사실 보안부대장은 아직 나의 논문을 읽지 않은 듯 보였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 왔습니다”

“그래? 운영과장이 잘 좀 처리해봐”


올 것이 왔다. 이 일로 인하여 최소한 옷을 벗을 수 밖에 없겠구나. 그러나 나는 이것이 가치 있는 일이며 후배들에게는 유용할 것이라고 수없이 되뇌이며 모든 것을 각오한 채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원점에 되돌아온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이 이것뿐 아니었는가? 눈물고개 위를 달리던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 이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며 뛰었었다. 역사 속에 묻혀 모든 것이 잊혀지기 전에 누군가는 하여야 할 일이 아니었던가?


모두가 입을 닫고 죄인모양 침묵만 하고 있을 때 비록 아무도 관심이 없고 들어주는 자 없는 허공일지라도 외쳐야하였고 텅 빈 광야일지라도 그곳에 대고 외칠 자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나는 내 자신을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절대 비굴하지 말자. 모든 것 앞에서 당당하자.


그날 밤차를 타고 진해로 내려왔지만 그 다음날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자료의 출처를 조사하고 내가 접촉하였던 사람들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이다.


조사가 계속되었다.


“나는 혼자서 미친듯이 찾아 다녔지만 어느 누구하나 나를 도와주지 않았소. 더구나 해군대학 총장님도 절대 그 논문을 써서는 안된다는 경고도 받았소”

“왜 이제와서 해병대 해체이유를 밝히려 하였소? 바닥에 깔린 저의가 무엇이요?”


조용해진 이 마당에 괜히 이런 논문을 작성하면 군통수권자와 수뇌부에 반론을 재기하는 꼴이 되고 해병대 장병들과 예비역들에게 동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매일 일과가 끝나는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조사요원이 들이 닥쳤다.


그들도 잘 알고 있었겠지만 당시 내 형편은 해병대에 오래 남아있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해병대를 떠나기 전에, 그리고 내가 할 수 있을 때에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해병대 구성원의 전통의식은 어떻게 생성되어 왔는가?


왜 해병대가 갑자기 해체되어야 했는가?


해체된 후 현존하는 문제점이 무엇인가?


역사를 거울삼아 앞으로 어떻게 해병대를 이끌고 나가야 하는가?


간단명료하고 꼭 필요한 것 아닌가?


나는 매일같이 그들과 논쟁이 아닌 논쟁을 되풀이 하여야만 했고 먹구름 같은 앞날을 바라보며 너무나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그날따라 조사요원들에게서 전화 한통 걸려오지 않고 해군대학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라고만 생각하며 한낮이 지났다. 밤 10시경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후에 알고 보니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보안사의 조사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아! 아마 10.26 사건이라는 국가적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나는 ‘체제비판 죄’라는 엄청난 중죄인으로 법정에 섰을 수도 있었으리라.


주변상황과 맞물려 당시 그 논문은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모험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오로지 작품하나를 남기고 군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 커가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왜 나의 논문에 대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 하였는지 그들의 저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보참모부에 근무할 때는 딴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직위였다. 앞길이 막혀 유학이라도 가보고자 딴 곳에 눈 돌릴 틈도 없이 살았고 영어학교, 미국유학, 해대교관 등 나는 오랫동안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왔다.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독재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소요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던 사실조차 나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