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30 - 대통령이 죽어 내가 살다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니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처음 마음 먹었던대로 내가 계획하였던 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함께 남아있자고 약속하였던 김무일(전 인천제철 사장, 현대 부회장)도 해병대를 떠났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았는데 진작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은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것이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있는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대학을 다닐 때만해도 나는 훌륭한 외교관이 되어 이 나라를 세계무대위에 높이 세워 부끄럽지 않은 나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병역문제는 그 길목에서 시험에 응시조차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이사회를 바로 이끄는 사회의 목탁, 어둠의 등불같은 일류기자가 되기 원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병역문제로 좌절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장 짧은 군생활을 택한다는 것이 이렇게 긴 세월을 보내며 떠돌다가 출발점에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해병대가 없어진지도 벌써 5년이 흘렀다. 이제는 내가 없어진지 오래된 해병대의 장교라고 우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군장교라고 하기엔 다른 점이 너무나 많았다. Uniform도 다르고 역사도, 전통도, 싸우는 방법도, 정신세계도 모두 다른 것뿐이다.
그렇다고 육군도 공군도 아니다.
나는 지금 누구란 말인가?
‘상륙병과’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해군인 것처럼 해군대학에 온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해군대학에 와서 해사17기 신종칠선배와 19기 지혁선배를 만났다.
두 분 다 나와는 인연이 많은 분으로 해병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존경하는 선배였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신종칠선배는 내가 해병대와 첫 인연을 맺고 소위계급장을 달고 있었던 초등군사반 시절 우리 기초반중대의 구대장이었다.
모든 면에서 훌륭하였지만 단한가지 빳다만큼은 매우 서툰 분이었다. 키가 좀 큰 탓도 있었지만 빳다를 엉덩이와 수평으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 한쪽은 엉덩이에 다른 한쪽은 허벅지에 걸리도록 대각선으로 때렸기 때문에 허벅지의 통증은 맞을 때도 아프지만 꽤 오랫동안 통증과 후유증을 동반하였다. 그렇기에 그분에게 빳다를 맞을 때가 제일 힘들고 괴로웠던 적이 많았다.
그러나 해병대와 첫 인연을 맺었던 분이기에 언제나 강하게 나를 사로잡고 있었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분이었다.
강의가 없는 날에는 하루종일 비어있는 시범강의실에 셋이 모여 온갖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서로서로 모든 것을 의논하고 토의했다.
어쩌면 내가 처음 시작하였던 이곳에서 처음 만났던 사람들과 함께 다시 돌아와 내 군생활의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78년 가을이 접어들 때 쯤 오랜만에 서울 대방동 해군본부의 임경○ 정보참모부장을 찾아갔다. 그분은 내가 연평중대장을 하고 있을 때 해군본부로 명령을 내게 하신 분이다.
해군 헌병대 구치소 감옥에 갇혀 있을 때부터 나를 예수믿는자로 만들기 위하여 매 주일마다 감옥안으로 심방팀을 들여보낸 분이다.
그러나 나는 예수믿는것이 그렇게도 싫었다. 심방팀이 철거덕거리며 감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는 여러장의 모포를 겹겹이 겹쳐 둘러쓰고는 그들이 찬송하고 볼일을 다보고 돌아갈 때까지 그냥 누워있었다.
그렇게 감옥안에 있었던 자를 소령으로 진급시키고 미국유학의 길까지 열어 주셨던 분이다. 서울역 앞 지금의 힐튼호텔이 있는 산언덕에 산성교회가 있었다.
그분은 그 교회의 장로님이었고 감옥에 들어온 심방팀도 그 교회 신도들이었다. 물론 나 역시 그 교회에 소처럼 끌려간 적이 여러번 있었다. 그리고 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해군본부의 임경○부장님은 반갑게 맞아 주셨다.
“부장님. 저는 아무래도 딴 길을 가야할 것 같습니다. 필수적인 작전장교도 못해보고 정보참모부와 미국유학에 후방의 해군대학에서만 세월을 다 보냈으니 중령진급이란 이제 바라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도봉. 가만 있어봐. 무슨 길이 있을거야”
그분을 항상 나를 계급으로 호칭하지 않고 이름을 통째로 부르시는 분이었다.
“딴 생각 말고 해군대학에 그대로 있어”
사실 내가 부장님을 만나러 간 이유는 이번 중령진급에 낄 수 없으니 낙제할 경우 유학 후 의무복무기간을 빼고 조금이라도 빨리 전역하여 사회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한 채 옛날 정보참모부에서 함께 일하던 변재○ 보안부대장(해사8기, 준장예편)과 강택○중령(해사16기, 준장예편), ○기구중령 등을 만나고 진해로 내려왔다.
○기구중령(사관후보생24기, 해병대준장예편)은 내가 연평도에서 나올 때 있었던 여객선 난동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검찰과 법무, 헌병감실을 오가며 큰 역할을 담당해 주었던 분이다.
그해 늦은 가을 또 한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해대 교관을 하고 있던 내가 뜻밖의 중령진급자에 포함되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유학가기 전 해군본부 정보참모부에서는 아무에게도 말 할 수없는 국가적 비밀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극소수 인원만이 제한적으로 알고 참여하고 있었다. 해군본부에서는 중령진급 선발가능자 규정을 개정한 것이다.
미국해병대 상륙전학교를 수료한자 중에서 해군대학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교관요원으로 근무할 시 고등군사교육과정과 보병부대의 작전장교를 필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개정한 것이다.
이 역시 임경○ 정보참모부장이 해군참모총장의 승인을 받아 인사참모부에서 관련규정을 개정하게 한 것이다.
뒤돌아보면 어린장교 시절 아무것도 모른 채 해병대가 해체되어 억울하다고 여기는 의분과 오기로시작했던 군생활이 여기까지 끈질기게 이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중령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 앞에는 또 다른 진퇴양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진급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진급이 되었으니 해병대를 떠나야겠다는 말은 입 밖에도 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장기복무장교인 경우 군대에서 진급하여 높이 올라갈 수도 있고 장군이되어 평생토록 직업군인으로 살 수 있도록 보장되었지만 나 같은 단기복무장교는 군의 필요에 의하여 임시로 보직운용하다 불필요하면 언제든지 페기처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아직도 시한부 군생활 밖에 할 수없는 단기복무장교로서 1~2년씩 복무기간이 연장되고 있었고 나의 화려한 경력 때문에 장기복무로의 전환이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그러다보니 국방부 전체, 전군에서 전과기록이 가장 많은 단기복무장교인 내가 중령까지 진급된 유일하고 특별한 기록을 가진 자가 된 셈이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괴로움도, 슬픔도, 갈등도, 아픔도 수없이 있었지만 지나온 모든 일들이 기적같이 여겨지고 더없이 감사한 것뿐이었다.
그러니 진해에 다시 돌아온 후부터는 해병대 군복을 입고 있을 때 내가 받았던 고마움과 감사함을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로 보은한 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해병대 교육의 산실이었던 이곳 진해기지 곳곳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과거의 역사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다. 역사관과 유물관의 곳곳을 뒤졌다.
정말 해병대는 해병대답게 깡그리 모두 없앴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쓸어버렸던 청룡부대 살인중대 때와 비슷하였다.
해병대와 관련된 쓸만한 역사자료는 해병대가 해체되던 날 사령부의 유리창처럼 박살이 나고 그것도 모자라 모두 모아서 홧김에 불까지 질렀다는 증언도 들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아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져다 읽고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해군대학 도서관이나 해군사관학교 도서관에도, 서울 국방부 전사편찬실과 역사자료실, 국회도서관까지 해병대에 관한 자료를 찾기 위하여 미친듯 돌아다녔다.
한편으로는 예비역 장성과 당시의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비화와 조언도 들었다.
미국유학중 미국 해병대의 흥망성쇠에 관한 자료도 모두 모아왔다. 정말 나는 정신 나간듯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갔다.
통상적인 장교활동을 벗어난 나의 모습이 요주의 장교의 냄새를 전담하는 보안대 요원들에게 포착되었는지 그들은 오래전부터 나를 감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79년 7월부터 해군대학에서 지휘참모과정을 공부하는동안 내가 작성한 논문제목을 아예 “해병대 구성원의 전통의식고찰”이라고 정하였다. 모든 해병대 출신 상륙병과 장교들은 물론이거니와 해군장교들의 관심도 상당히 높았다.
변대호중위, 신기남중위(전 열린우리당 대표), 권재일중위(서울대교수) 등 서울대 박사과정에 있던 인재들은 해군대학에서 영입한 교관요원들이었고 그들 역시 내 논문을 위해 조언하고 지도해주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해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고 일반대학 학부출신인 나에게 특별한 관심과 조언을 아낌없이 다 해주었다.
사실 해군대학에 있는 동안 나는 모든 것을 뒷전에 두었다. 후배들에게 가치있고 유용한 논문한편을 남기는 이것이 내 군생활의 마지막 종지부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욱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이다.
해병대의 창설 배경, 해병대의 역사, 해병대 해체이유와 현존하는 문제점, 해병대의 앞날에 대한 올바른 방향제시 등이었다.
해병대는 다시 살아나야 하며 다시 살아난 해병대가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제시하고 싶었다.
어느날 갑자기 윤동휘 해군대학총장(예비역 해군준장)이 학술처장과 나를 동시에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그분은 해사9기로 인품과 외모가 출중하여 우리 모두 존경하였던 분이다.
그러나 이런 때 높은 분이 찾는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총장실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가니 김경섭(해사15기, 예비역 해군소장) 학술처장이 나보다 먼저 와 함께 계셨다.
“전중령. 지금 쓰고 있는 논문 있잖아. 그것 그만두게”
“예?”
“아무래도 자네에게 좋을 것 같지 않네. 그리고 김대령도 그리 알고 잘 지도하고 감독하게”
“총장님! 그 논문은 오래전부터 제가 열정을 가지고 준비 해왔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해병대에 극히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모두 잠잠히 있는데 유독 자네혼자 자꾸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 걱정이 되어 그러네. 그만 두는 것이 좋을걸세”
“총장님! 거의 완성단계라 시기적으로 볼 때 지금 다른 논문으로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만두는 것이 좋을걸세. 명령이네. 내 말 명심하게나. 옛날에 필화사건으로 크게 손해 본 사람을 내가 알고있네”
윗사람과 그이상의 논쟁은 쓸모없을 것 같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총장실 문을 나와 고개를 숙인 채 2층 복도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틀림없이 보안요원들이 총장에게 지휘조언을 하여 논문을 쓰지 못하게 쇄기를 박으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뒤에서 김경섭처장이 나를 불렀다.
그분은 해사 15기로 내가 해대교관시절 모든 교관요원들을 관장하는 학술처장이었으므로 교관이라면 그분의 지시와 통제를 받아야했다.
나는 그분이 대구의 명문 경북고를 나왔다는 것과 미국에서 해군 무관으로 활약한 국제적인 신사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사고방식이 합리적이고 확 트여 젊은 장교들과도 잘 어울릴 정도로 총장과는 다른 면이 많은 분이었다.
“전중령!”
“예. 처장님”
“자네 그 논문을 꼭 쓸 생각인가?”
“예. 처장님. 저는 이 논문만은 꼭 쓰고 싶습니다만 무엇이 , 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까? 논문이란 일종의 학문 영역이고 어느 분야에 관한 것이든지 연구하고 발표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래야만 건강한 군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처장님. 후배들에게 교훈을 줄수있고 해병대는 비록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장교들에게 나아갈 방향에 대해 길을 제시하는 것이며 진실을 알리는 차원인데 전혀 잘못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 자네가 정 그런 생각이라면 하고 싶은대로 하게나. 내가 그런 것까지 말릴 수는 없네”
누가 뭐라든지 군복을 벗을 각오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던 나에게 힘을 더해주었던 학술처장은 해군대학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늘 내 마음에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분이었다.
어느날 해병대 후배인 37기 안병민소령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대뜸 선배님이 쓰시는 논문에 자기도 일조를 하고 공동저자로 이름을 넣어 줄 수 없겠느냐고 제의하였다.
“어이. 한소령. 여기에 이름을 잘못 넣었다간 군복을 벗을 수도 있어”
“아이구. 선배님. 이판에 군복 벗으면 어떻습니까? 저도 별 미련이 없습니다. 짧게 살다 갈랍니다”
“그런 각오라면 좋다”
나는 논문 저자란에 안병민소령을 추가시켰다. 해병대 창설배경, 역사와 전통, 의식세계 등 정립이 잘 되어갔다.
해병대 해체이후의 문제점과 해병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도 장 정리되어갔다.
그런데 73년 10월 왜 갑자기 해병대가 해체되었느냐는 질문에 당시로서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그에 관련된 많은 기록을 확인하고 많은 선배들과 예비역 장성분들도 만났다.
그러나 중요한 부분에 가서는 어느 누구하나 명쾌한 설명을 하려들지 않았고 모두 입을 다물거나 조심하는 듯한 인상이 역력하였다.
해병대 자체내의 내분이라는 설과 육군과 해군의 견제설, 군의 경제적 운용설, 정권안보설 등 여러 가지 설이 뒤섞여 있었다.
'★해병대 사령관 글 > 22대사령관 전도봉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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