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봉 장군님 회고록 27 - 1977년 7월 미국으로 떠나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몹시 어렵게 살고 있었다.
실제로 북한보다 국민개인소득(GNP)이 낮았고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 태국이나 필리핀보다도 생활수준이 낮고 어려운 시기였다.
국가관이나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일반 국민들보다 월등하다고 자부하던 군장교들까지도 미국에 유학을 가면 현지에 머물러 귀국하지 않으려하던 사례가 빈번하여 가족과 함께 유학을 떠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온가족을 인질로 잡혀놓고 단신으로 유학을 떠나는 꼴인 셈이다.
미해병대 상륙전학교가 있는 Quantico, Virginia 는 미국의 수도가 있는 워싱톤D.C. 근처이고 미해병대 교육기지 사령부가 있는 곳으로 미국 해병대와 미국의 F.B,I. 교육의 메카로 유명한 곳이었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위하여 김포공항을 출발하던 그날이 나의 동기생인 통신장교 박건길이 소령으로 예편한 후 ‘버하마’로 이민을 떠나는 날이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몇 일전 그는 꼭 나와 같은 비행기로 버하마로 가야한다고 고집하였고 나에게 007가방을 하나 건네주며 미국까지 들어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미국으로 떠나던 날 비행기에 탑승하고 보니 내 뒷자리에 바로 그 친구가 앉아 있었다. LA국제공항에 도착한 후 가방을 돌려주고 그는 ‘버하마’행 비행기로, 나는 달라스 국제공항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작별인사를 하고는 서로 헤어졌다.
당시 나는 정복을 입고 출국하였기에 그 가방에 대하여 아무런 조사도 받지 않았고 LA공항의 검색대에서도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친구가 부탁했던 가방속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아직도 궁금할 뿐이다.
나는 드디어 말로만 듣던 신천지에 도착하였다. 모든 것이 새롭고 온통 익숙하지 않은 것 투성이었다.
달라스 공항에 도착하니 군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미해병대 대위가 거수경례를 하며 나를 맞아주며 자기는 미 해병대에서 나를 위하여 지명된 안내장교(escort officer)라고 소개하였다.
지구 반대편에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적은 나라에서 온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정중한 예의를 갖춰 영접하였다.
들고 간 짐도 직접 챙기며 그가 타고 온 해병대 차로 유학기간 중 머물기로 예정 된 장교숙소 리버세지홀까지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숙소에 짐을 푼 다음 식당을 비롯하여 각종 내부 시설들을 안내하며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고 내일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한 후 그는 돌아갔다.
모든 것이 서툴고 익숙하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시작한 유학생활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줄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맨 먼저 찾아온 어려움은 식당에서 먹을 것을 주문하는 일이었다. 저녁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안내장교가 알려주었던 장교식당에 가니 여러명의 미해병장교가 기다랗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들 맨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어 미국땅에서 처음 먹을 식사를 영어로 주문하였다.
“밥(rice) 하고 쇠고기(beef) 구운 것하고 달걀(egg)을 달라”
배식구 건너편에 있던 병사는 전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난감해 하더니 고개를 내 쪽으로 내밀고 귀를 가까이 들이대며 다시 주문해달라는 모습을 취했다.
한번 더 같은 주문을 했지만 전혀 못 알아 듣겠다는 듯 “I beg your pardon, Sir. I beg your pardon, Sir."만 되풀이 하는 것이다.
내 뒤에서 배식을 기다리며 길게 줄서있는 사람을 외면한 채 계속 통하지 않는 영어로 버티고 서있을 수가 없어 슬그머니 뒤로 가는 척하며 내방으로 돌아왔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용기도 없고 어떻게 할 방법도 생각나지 않아 고픈 배를 움켜쥔 채 잠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풍요한 미국 땅에서 첫날밤을 쫄쫄 굶은 채 자야한다니. 다음날 아침 용기를 내어 다시 장교식당을 찾았으나 어제저녁과 마찬가지 결과였다.
그들은 나의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였다. 나는 지금도 “I beg your pardon”을 가장 듣기 싫어하는 영어 문장중 하나로 기억한다.
나에게는 정말 소름끼치는 문장이었다. 나에게도 진해 영어학교에서 2개월간의 유학준비과정이 있었다.
읽고, 듣고, 이해하고, 글쓰는 많은 과정이 있었지만 어떤 문제이든 95점 이하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다는 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하였다.
일과시간이 가까워 오자 안내장교가 나의 숙소로 찾아왔고 그 동안 무슨 불편한 것이나 어려움이 없었는지 물었다.
무척이나 배가 고팠지만 식당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고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소령계급장을 달고 멀쩡하게 생긴 장교가 말을 제대로 못하여 두 끼씩이나 굶고 있다는 말을 하기에는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차라리 굶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한 선택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후 처음 이틀은 이렇게 꼬박 굶었다. 일주일간은 입교준비기간으로 별다르게 하는 일이 없었다.
물론 빠짐없이 하루에 한 번씩 정해진 시간에 안내장교가 숙소로 왔다. 그는 나의 행동과 안색을 보더니 이상한 것을 감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생각하면 태평양을 건너는 긴 여정에서 오는 jet lag(시간차이로 인한 피로감)가 있는 상태에 꼬박 이틀을 굶엇으니 아마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리라. 나는 얼떨결에 배를 만지며 배가 좀 아프다고 하였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어디엔가 전화를 걸더니 10분도 채 되지 않아 현관 앞에 앰브런스가 도착하였고 그와 함께 기지내에 있는 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군의관인 듯한 의사가 나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는 호흡하는 것부터 맥박, 혈압, 심지어 뱃속까지 온몸을 검진하기 시작하였다.
검진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하자는 대로 몸을 맡기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검진을 마친 의사는 별 문제가 없는것 같다는 표정으로 약국에서 주는 약을 하루에 세 번씩 식후에 먹으라는 것이다. 아니 식후라니 밥을 먹어야 식후가 있는것 아닌가?
지금 이 시점에서는 약보다 밥이 더 필요한데... 먹을 필요가 없는 약이지만 주는 약을 받아 BOQ로 돌아왔다. 내 문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안내장교가 돌아간 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배고픔을 달래고 있던차에 하나의 기막힌 묘책이 떠올랐다. BOQ에서 마을 쪽으로 한 2Km즘 떨어진 기지입구 Triangle을 지날 때 중국음식점을 한번 본 기억이 났다.
몇 끼를 굶으니 머리가 맑아졌나보다 생각하며 걸어서 그곳을 찾아 나섰다. 걸어가는 도중 머릿속에는 온통 우동, 짬뽕, 자장면, 탕수육등 그동안 먹어본 중국음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흉 볼 사람도 없는 곳에서 체면이고 뭐고 편안한 마음으로 실컷 좀 먹어보자.
Chinese Restaurent 라고 쓰인 휘황찬란한 간판이 내눈에 확 들어왔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한국에서 정겹게 드나들던 중국집이 아님을 이내 알 수 있었다. 낯선 한 이방인이 구석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미국인 웨이터가 메뉴를 가져왔다. 익숙한 자장면, 짬뽕을 온대간대 없고 이상한 음식만 와글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이곳 역시 다른 세계였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벽에 붙어있는 여러개의 그림을 보았다.
그중 밥과 새우, 조개가 보이고 우리나라 해물덮밥과 비슷한 그림을 가리키며 웨이터에게 저것을 원한다고 손짓하며 말하였다.
음식을 기다리며 굶은 끼니를 세다보니 다섯 손가락이 다 접혀진다. 무려 여섯 끼째에 밥을 먹어보나보다. 나는 이처럼 미국말을 제대로 못하여 고생하며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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