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무기·장비/전략·전술·핵무기

일본, 유사시 핵무기 오키나와 재반입 美와 비밀 합의

머린코341(mc341) 2017. 10. 22. 21:01

일본, 유사시 핵무기 오키나와 재반입 美와 비밀 합의


▲ 플루토늄 재처리를 할 수 있는 일본 후쿠이현 쓰루가시의 몬주 고속증식로. photo 위키피디아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 사토 에이사쿠 전 일본 총리(1964~1972 재임)가 1967년 12월 11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천명한 ‘비핵(非核) 3원칙’이다. 사토 전 총리는 1968년 2월 5일 시정연설에서도 비핵 3원칙을 비롯해 핵폐기와 핵군축, 미국의 핵억지력 의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4대 정책을 밝혔다. 일본 의회는 1971년 11월 24일 비핵 3원칙을 결의안으로 공식 채택했다.
  
   사토 전 총리의 이런 행보는 당시 국제사회의 상당한 평가를 받았다. 첫 피폭국가인 일본이 핵무장을 스스로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었다. 당시 각국은 앞다투어 핵무장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국은 1964년 첫 원자폭탄 실험을 실시한 데 이어 1967년 첫 수소폭탄 실험에도 성공했다. 중국과 전쟁을 벌였던 인도도 1974년 첫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반면 일본은 1970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는 등 비핵 노선을 준수했다. 노벨상위원회는 1974년 이런 노력을 인정해 사토 전 총리를 아일랜드 인권운동가 숀 맥브라이드와 함께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다.
  
   1954년 오키나와에 핵무기 실전 배치

  
   그런데 실제로 사토 전 총리는 친형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1957~1960 재임)와 함께 핵무장론자였다. 기시 전 총리는 어릴 때 부친의 친척에게 양자로 갔기 때문에 사토 전 총리와는 성(姓)이 다르다. 기시 전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A급 전범으로 체포돼 연합국의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에서 재판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확전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지 않고 풀려난 뒤 총리를 역임하는 등 일본 정계의 거물이다. 기시 전 총리는 자위대가 교전권을 확보하고 핵무장까지 갖추길 바라는 군국주의자다. 기시 전 총리는 1957년 5월 7일 참의원에서 “자위를 위한 핵무기 보유는 합헌이지만 정책으로서 핵무장은 하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기시 전 총리는 재임 시절인 1960년 미국과의 안보조약을 개정할 때 “미국이 일본에 중거리와 장거리 미사일을 포함한 핵무기 및 이런 무기를 위한 기지 건설에 대해 양국 정부가 협의를 한다”는 비밀 조항을 포함시켰다. 친형의 핵무장론에 공감해온 사토 전 총리는 1964년 중국의 핵실험이 성공하자마자 에드윈 라이샤워 주일 미국대사와 만나 “중국이 핵을 보유하면 일본도 마찬가지로 핵을 갖는 것이 상식”이라고 밝혔다. 사토 전 총리는 1965년 린든 B. 존슨 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에 맞서 일본도 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력하게 핵무장론을 피력했다. 적의 핵 위협에는 핵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토 전 총리는 자신의 이런 주장을 미국과의 오키나와 반환 협상에서 관철시켰다. 미국은 1954년 12월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처음으로 실전 배치했다. 미국은 또 일본에 있는 다른 기지들에 핵탄두만 뺀 미사일과 부품들을 보관했다. 미국은 이런 핵무기들을 최소한 세 차례 중국에 대해 사용할 것을 심각하게 검토했었다.

 

   대만해협 위기가 처음으로 일어난 1954년 9월 1차 대만해협 위기, 2차 대만해협 위기가 일어났던 1958년 8월,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때였다. 당시 오키나와에 있던 핵미사일은 15분 내에 발사할 수 있었다. 일본은 2차 대전 패전으로 미국이 점령했던 자국 영토인 오키나와를 반환받는 것이 지상 과제였다. 문제는 오키나와를 반환받을 때 미국이 핵무기를 철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사토 전 총리는 일본의 안보를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미국의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토 전 총리는 1969년 11월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유사시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미국의 핵 반입과 오키나와를 통과할 권리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비밀 합의문에 합의했다. 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에 반환됐다. 이후 양국 역대 정부는 이 밀약의 효력을 인정해왔지만 존재 자체는 부인해왔다. 그러다 2000년 밀약을 증명하는 문서가 미국 국립공문서관에서 발견되면서 그 내용이 공개됐다. 노벨위원회는 2001년 출간한 ‘노벨평화상-평화를 향한 100년’에서 사토 전 총리를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밝혔다.
  
   사토 전 총리는 재임 시절 독자적인 핵무장 추진 방안을 내각정보조사실과 외무성에 검토할 것을 지시했었다. 내각정보조사실은 핵물리학자와 군사 전문가들을 모아 핵폭탄 제조법, 미사일 제조법, 유도장치 개발, 플루토늄 생산 방법 등을 검토한 뒤 소수의 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며 비교적 용이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만들어 사토 전 총리에게 제출했다.


   외무성도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는 정책을 추진하지만 핵무기 제조의 경제적·기술적 능력을 항상 보유함과 동시에 이에 대한 간섭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사토 전 총리는 일본이 독자적인 핵무장을 추진할 경우 미·일 동맹관계가 파탄 나는 것은 물론 국내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반핵 투쟁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미국과 밀약을 맺었던 것이다. 
   

 ▲ (좌) 핵무장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토 에이사쿠 전 일본 총리.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총리로 재임했다. photo 위키피디아 (우) 1969년 미국과 오키나와 핵무기 반입밀약을 맺은 사토 일본 총리가 닉슨 미국 대통령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카소네의 핵무장 검토 지시
  
   일본 역대 정부들은 사토 전 총리처럼 비핵 3원칙을 지킬 것이라고 강조해왔지만 핵무장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본의 대표적 핵무장론자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1982∼1987 재임)는 ‘자성록(自省錄)-역사법정의 피고로서’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자신이 방위청(현재 방위성) 장관이던 1970년 비밀리에 핵무장 검토를 지시했었다면서 당시 돈으로 2000억엔만 있으면 5년 이내에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1985년 8월 15일 종전기념일에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강경우파의 대부였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1982년부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설득해 플루토늄 규제 대폭 완화, 핵연료 재처리시설, 고속증식로, 우라늄 농축시설 건설 등을 할 수 있도록 미·일 원자력협정을 개정하는 데 합의했다. 나카소네 전 총리와 레이건 전 대통령은 서로 ‘론’과 ‘야스’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양국이 1988년 원자력협정을 개정함으로써 일본이 사실상 핵폭탄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퇴임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과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 일본의 핵무장화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이 6차 핵실험과 중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등 도발과 공격 위협을 계속하자 안보 위기에 직면한 일본에서 핵무장론이 다시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를 이용해 일본열도를 바다에 침몰시키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북한 노동당 외곽기구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지난 9월 14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 “일본은 더 이상 우리 주위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면서 “일본열도의 4개 섬을 주체의 핵폭탄으로 바다에 침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 유일한 피폭 국가인 일본은 핵폭탄에 대한 공포가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심하다. 북한이 발사한 탄도미사일이 일본 상공을 넘어 날아가자 일본이 초비상에 걸린 것도 이 때문이다. 오죽하면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일본열도 상공을 넘은 북한의 미사일이 일본인 수백만 명을 꼭꼭 숨게 하는(duck and cover) 상태로 만들었다는 말까지 했을까. ‘몸을 숙이고 얼굴을 덮어라’라는 의미의 ‘duck and cover’는 냉전시대 미국의 핵폭탄 대처 교육이다.


   이 때문에 일본 안보 전문가 중 상당수가 자체적인 핵 억지력 확보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국의 민간연구기관인 국제전략연구소(IISS) 마크 피츠패트릭 소장은 “일본 안보 전문가들 가운데 일본에도 핵무기를 배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이들이 사회의 주류라는 점에서 새로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이 투하한 핵폭탄으로 고통을 겪은 일본 국민들은 핵 보유 문제에 있어서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왔다. 하지만 일부 극우주의자들의 주장으로 간주돼왔던 핵무장 필요성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거부감이 갈수록 없어지고 있다. 미국 비확산연구센터의 도키 마사코 연구원도 “반핵 정서가 여전히 강하지만 일본의 핵무장에 대한 생각이 이전보다 자유롭게 논의되고 있다”면서 “핵무장 얘기를 꺼내는 것을 터부시하던 정서가 약해졌다”고 지적했다.


   에바타 겐스케 다쿠쇼쿠대 교수는 “룰은 바뀌었다. 미국의 핵우산만으로는 일본의 안전 보장은 불충분하며 일본은 향후 평양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핵무장론을 강조했다. 시마다 요이치 후쿠이현립대 교수도 “중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일본이 핵미사일 개발에 나서는 것인데, 중국이 강력한 대북 제재를 단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일본이 핵무장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 핵무장론자 아베
  
   이런 주장들이 나오는 것에 아베 총리는 공식적으로 언급을 자제하고 있지만 내심으론 박수를 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베 총리는 대표적인 핵무장론자다. 아베 총리가 외조부인 기시와 사토 전 총리의 DNA를 물려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베 총리는 2002년 관방부 장관 시절 “현행 헌법 아래서 핵무기를 갖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실제로 일본 평화헌법에는 핵무기 보유 금지를 규정하지 않고 있다. 이런 발언은 일본의 핵 보유 여부는 헌법이 아니라 내각의 정책판단에 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베 총리는 이후에도 줄기차게 핵무장론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총리 취임 이후에는 핵무장론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다만 아베 총리는 201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70년 추모행사에서 이례적으로 비핵 3원칙을 언급하지 않았다. 비핵 3원칙을 언급하지 않은 총리는 당시 아베 총리가 처음이었다. 비핵 3원칙을 폐기하는 것을 희망하는 아베 총리의 속내를 반영한 것이다. 아베 총리로선 일단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을 명분으로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아베 총리로선 핵무장이나 전술핵 배치 문제가 거론될수록 일본 내 여론이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는 데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 미국 핵무기의 일본 반입·배치 필요성을 주장했는데도 아베 총리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방위상을 역임한 이시바 전 간사장은 “미국의 핵우산으로 일본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일본 국내에 핵무기를 두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타당한 논의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면서 미국의 핵무기 반입·배치를 강조했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아베 총리의 가장 강력한 도전자이다. 아베 총리는 또 자신의 최측근을 앞세워 적기지공격론을 확산하려는 전략까지 구사하고 있다. 가와이 가쓰유키 자민당 총재 외교특별보좌관(특보)이 일본이 적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중거리 탄도미사일과 크루즈미사일을 보유할 필요성을 강력히 제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아베 총리는 미국 내에서 일본의 핵무장론이 나오고 있는 것도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미국에선 대북 억지수단으로 ‘재팬 카드’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재팬 카드는 일본이 스스로 핵무장을 하든지, 미국이 핵미사일을 일본에 제공하든지 해서 북한과 북한을 지원하는 중국에 대항시키는 것을 말한다. 트럼프 정부가 “중국이 대북 압박을 강화하지 않으면 한국과 일본이 독자적인 핵무기 프로그램을 추구할 수 있으며, 미국은 이를 막지 않겠다는 뜻을 중국에 전달했다”는 내용의 미국 NBC방송 보도(9월 8일자)가 나오기도 했다. 
 

 ▲ 지난해 5월 아베 일본 총리가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photo 백악관


   “3개월이면 핵폭탄 만들 수 있다”
  
   일본은 현재 원자력 발전용 우라늄 농축 기술과 시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무기용 고농축우라늄을 만들 수 있다. 일본은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할 수 있는 기술과 시설도 갖고 있고, 플루토늄 48t을 추출해 보유하고 있다.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들 가운데 미국으로부터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허용받은 국가는 현재 일본뿐이다.


   일본은 또 핵무기에 쓸 수 있는 고순도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고속로(몬주) 연구도 계속하고 있다. 국제정치학에선 일본처럼 완벽한 핵 잠재력(Nuclear Latency)이 있으면서도 핵을 보유하지 않는 선택을 ‘일본 옵션(Japan Option)’이라 부른다. 다모가미 도시오 전 자위대 항공막료장(한국의 공군 참모총장)은 “플루토늄 보유량과 무기용으로 재처리하는 시간 등을 감안할 때 정부가 결정만 한다면 핵무기 보유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모가미 전 막료장은 “플루토늄을 순도 93% 이상으로 농축해야 하기 때문에 핵농축 시설 건설에 10개월이 걸리지만, 일단 시설이 가동되면 농축은 단시간 만에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구마가이 히로시 전 관방장관은 “3개월이면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일본이 플루토늄을 전량 무기화할 경우 나가사키 원폭(21㏏) 수준의 핵무기를 6000발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히로시마 원폭(16㏏)과 비슷한 위력의 핵폭탄을 제조할 경우 5개월이면 가능하다. 핵탄두와 이를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 항공모함, 잠수함 등을 도입하는 데 연간 1조5000억엔(15조원) 상당의 국방예산 증액이 필요하다. 자위대가 이를 통해 주일미군 전력을 모두 대체하는 데까지는 10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의 핵무장은 NPT 탈퇴와 미·일 동맹 해체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핵 보유에 따른 국제사회의 제재조치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세계 3위 경제대국을 제재하기는 어려운 만큼 일본은 인도의 사례처럼 핵보유국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일본의 핵무장은 가능성이 아닌 현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출처 : 주간조선 2476호


[조선Pub.] 2017.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