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초대사령관 신현준

老海兵의 回顧錄 - 4. 해병대 창설과 초창기 (8) 해병대의 창설

머린코341(mc341) 2014. 7. 2. 17:30

 

老海兵의 回顧錄 - 4. 해병대 창설과 초창기

 

(8) 해병대의 창설

 

  여순(麗順) 반란사건을 진압한 뒤, 해군지휘부는 상륙작전수행을 위한 해병대 창설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군 참모총장(參謀總長) 손원일 제독(提督)은 1949년 2월 1일부로 나를 해병대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부대가 창설되기 전에 사령관부터 임명하였던 까닭은, 우선 지휘관을 임명한 뒤에 부대창설의 제반 업무를 추진하기로 방침을 정했기 때문이었다.

 

  뒷날 '한국 해병대는 하나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도, 바로 초대 해병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나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일이 출발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해병대 창설이란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된 나는, 즉시 해군 진해통제부 참모장직을 후임자인 김석범 중령에게 인계한 다음, 부대창설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부대를 조직 편성하는 일을 내 혼자 힘만으로 추진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나는 우선 뜻을 같이 하는 동지 간부를 규합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나는 제일 먼저 지난날 준·하사관 교육대에서 함께 일한 바 있는 김성은 중령에겐 해병대 창설에 합세하도록 권유하였다. 당시 해군 통제부 교육부장이었던 그는, 나의 권유를 받고도 쉽게 수락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날 함께 일할 때부터 김 중령이 신의와 재능이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던 나는, 삼국지(三國誌)에 나오는 유비(劉備)의 이른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고사(故事)를 생각하면서, 두 번 세 번 거듭 만나 설득함으로써, 기어코 그의 승낙을 받아 내고야 말았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김성은 중령을 해병대 창설에 애써 참가시킨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만주군 출신으로서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중이던 김동하(金東河) 소령, 그리고 인천기지에서 함께 일했던 고길훈(高吉勳) 대위 등을 차례로 만나서 간부진을 규합 정비해나가는 데 주력하였다.

 

  이와 함께 신병(新兵) 교육 요원으로서 일할 하사관들을 모집해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서 나는 당시 진해에 있던 해군 각 부서에서 2,3명씩을 강제 차출하는 방법으로 충원할 수밖엔 없었다. 그런데 해병대 창설요원의 차출을 강제당했던 각 부서는 평소 맡은 바 직무를 착실하게 잘 수행하고 있던 모범적인 하사관들은 그대로 잔류시켰다. 그리고는 주로 정의감이 강하고 용감하며 씩씩한 사나이들이지만, 가끔 부대 안에서 말썽을 일으키기도 하였던 하사관들을 차출해서 보내 주었다. 결국 이들이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 됨으로써, 오늘날까지 유명한 해병대 특유의 기질과 전통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해병대 창설에 대한 손원일 제독의 확고부동한 신념과 방침에 따라서, 창설작업은 순차적으로 하나하나 진척되어 갔다.

 

  그리하여 1949년 3월 말까지 부대 편성에 필요한 장교와 하사관 약 80명이 확보되었고, 4월 초에는 해군 신병 제13기 중에서 300명을 선발하여 총 380명으로 해병대 창설을 보게 되었다.

 

  본래는 4월 5일을 기해서 부대 창설식을 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국방부 당국의 사정에 의해 4월 15일에 역사적인 해병대 창설식을 진해 덕산(德山) 비행장에서 거행하게 되었다.

 

  창설 당시의 해병대 간부진은 다음과 같았다.

 

사 령 관 申鉉俊 중령

참 모 장 金聖恩 중령

작전 참모 金東河 소령

군수 참모 李炳喜 대위

정보 참모 金龍國 대위

헌병 대장 鄧光鎬 중위

제 1 중대장 高吉勳 대위

제 2 중대장 金載洙 대위

 

  이 날 창설식에서 나는 사령관 훈시(訓示)를 통하여, "해병은 일치단결하여 온갖 고난을 이겨냄으로써 유사시에 대비한 최강부대가 되도록 교육 훈련에 정진하자."라고 정병(精兵) 양성을 강조하면서,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자유를 수호하는 역사를 창조하자."고 다짐함으로써 해병대의 존재 목적과 사명을 제시하였다.

 

  부대 창설식을 거행한 지 20일 만인 1949년 5월 5일, 신생 해병대는 대통령령(大統領令) 제88호에 의거하여 법적으로 승인되었다.

 

  해병대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1949년 2월 1일, 내가 해병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은 어디까지나 해군 내부에서의 첫 출발이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부대 창설 작업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방부 장관을 거쳐서 대통령의 승인을 받기까지 여러 절차를 밟게 되었다.

 

  당시 국방부에는 아직 오늘날의 합동참모본부와 같은 기구가 편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대신하여 육군 출신의 채병덕(蔡秉德) 장군이 삼군총사령관(三軍總司令官)이란 직책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비록 3군이라고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아직 공군이 창설되기 전이었으므로 육군 항공사령부가 이를 대신하였다. 공군의 정식 발족은 1949년 10월 1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해군에서는 김성삼(金省三) 대령이 국방부에 대표로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1949년 3월 7일, 서울의 국방부에서는 3군의 현지 부대장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때 나는 비록 부대를 편성중이기는 하였으나, 일단은 해병대 사령관의 직책에 있었으므로 이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회의가 시작되어 먼저 육군의 현지 부대장들이 차례로 상황 보고를 마쳤을 즈음, 나는 해병대 창설에 필요한 병기(兵器) 보급문제를 처리해야만 하였으므로 회의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려고 하였다.

 

  이때 회의를 진행중이던 채병덕 장군이 “귀관은 누군가?”고 묻기에 "해병대 사령관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채 장군은 "해병대라니, 이건 무슨 소리인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해군 대표인 김성삼 대령이 일어나서, "수일 전에 각하께서 결재하신 바 있는, 이번에 새로 편성되는 바로 그 해병대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김 대령의 답변을 들은 채 장군은 노기를 띤 어조로, "이 사람아! 부대를 새로 편성하는 중요한 사안(事案)에 관한 문서를, 어찌하여 일반 문서와 함께 처리하여 결재를 받았단 말인가!"하고 소리쳤다. 일이 이렇게 되자, 김 대령과 나는 다소 난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채 장군도 일단 해병대 창설에 관한 문서를 결재한 사실만은 인정했으므로, 별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한편, 해병대 창설의 경사를 맞기 전인 1월 20일에는 우리 가족에게도 3남 옹인(雍仁)이가 출생하는 경사가 있었다.

 

 

처 : 예비역 해병중장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