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海兵의 回顧錄 - 4. 해병대 창설과 초창기
(10) 제주도 주둔과 경비 임무
해병대가 진주지역 경비 임무를 담당해 온 이래, 육군은 새로 창설된 해병대에 대한 관심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당시 육군은 1948년 이른바 '4·3 제주도 폭동 사건' 이래 제주도 지역의 경비임무를 맡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육군 현지 부대는 군용 물자의 보급과 수송 문제로 많은 불편을 겪어 왔었다. 그리하여 육군측은 해군측과의 협의를 통해서 우리 해병대가 제주도 지역의 경비 임무를 맡아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 결과, 해병대는 진해와 진주 양 지역에 주둔중이던 전 병력을 제주도로 이동시키고 새로운 임무에 들어가게 되었다.
1949년 12월 28일, 해병대의 전 병력은 제주도로 이동, 배치를 완료하였다. 당시 해병대 사령부와 일부 병력은 제주읍 내에 주둔하고, 부대의 주력은 모슬포에, 그 밖의 병력은 서귀포(西歸浦)와 성산포(城山浦) 등 각 요지(要地)에 분산 배치함으로써 제주도전역에 대한 경비 임무에 임하였던 것이다.
1950년 4월 해병대가 창설된 지 만 1년이 되었을 즈음, 나는 국군의 중견 간부에 대한 재교육 과정을 이수하기 위하여 당시 경기도 시흥(始興)에 있던 육군 보병학교(步兵學校)에 입교중이었다.
한창 교육중이던 4월 26일 아침 9시 반경, 교실에서 공부중이던 나에게 국방부 장관이 급히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어서 가보도록 하라는 담당 교관의 허락에 따라, 나는 즉시 국방부로 들어갔다.
국방부 장관실에서 신성모(申性模) 장관은 나에게,"지금 한라산에는 공비가 득실거리고 있어 야단이라는데, 제주도 지역 경비책임을 맡고 있는 자네가 어찌하여 한가하게 교육이나 받고 있단 말인가. 학업은 그만 중단하고 속히 임지로 떠나도록 하시오."라고 지시하였다. 신 장관으로부터 긴급 지시를 받은 나는 그길로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도에 도착한 뒤 사실을 확인해 보았더니, 한라산에 가끔 공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그렇게 놀랄 만한 사태는 아니었다.
당시 해병대는 한라산을 근거지로 둔 공비 토벌 작전을 수행하는 임무와 아울러, 병력과 장비 증강이라는 문제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해군본부에 이 문제의 gorufd,f 계속 요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해군본부에서 전문(電文)으로 회답이 오기를, "해병대의 병력은 1,200명이 한계임. 그 이상의 증원은 불가능함."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전문을 접수한 직후, 해병대의 주요 간부들은 모두 분격한 나머지 동시에 나에게 자필(自筆) 사임서를 제출하였다. 해병대의 병력이 그렇게 적은 슷자로써 제한된다면, 더 이상 부대의 발전을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마당에 내가 여기 남아서 과연 무엇을 바라보겠는가 하는 회의와 실망감이 부대 간부들을 동요시키고 분격케 하여, 전원사표를 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1950년 6월 23일의 일이었는데 이틀 뒤에 6.25 동란이 터지자, 이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소되고 말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6.25 동란은 국가 존망의 위기를 가져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해병대의 사활(死活)이 걸린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해 준 셈이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중장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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