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海兵의 回顧錄 - 4. 해병대 창설과 초창기
(9) 진주 지역 경비 임무
1949년 6월 1일부로 나는 대령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8월 중순경에는 해병 제1기 신병 교육이 끝났고, 이보다 앞서 8월 1일에는 해군 14기 중에서 선발한 440명의 해병 제2기생으로 3개 소총 중대의 증편(增編)이 이루어졌다.
그 뒤 8월 29일, 대구에 있던 이응준(李應俊) 육군 참모총장으로부터 나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이 장군은 대구로 찾아간 나에게 “해병대가 창설되었고, 또 훈련도 잘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그런데 경남 진주 지역의 경비 임무를 해병대가 즘 맡아 주었으면 하오. 현재 진주 지역 경비를 맡고 있는 육군이 보유중인 장비는 차량을 포함해서 전부 해병대에 인계할 작정이오. 다만 기관총과 박격포만은 그 병력과 함께 당분간 해병대에 배속시킬 작정이오. 부디 나의 청을 들어주길 바라는데, 사령관의 생각은 어떻소?"하며 물었다.
당시 진주 부근의 도시와 촌락에는 여순 반란 사건의 잔당들이 지리산(智異山)을 근거지로 하여 각 곳에 출몰하면서 살인과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나는 그 요청에 대해 즉석에서 답변할 처지가 못 되므로, 이를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께 보고한 뒤에 회답하겠노라고 말한 뒤 귀대하였다.
그 뒤 나는 손원일 제독의 승인을 받아 8월 29일 해병대의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1개 대대 병력을 진주로 이동 주둔시켰다.
당시 손원일 제독은 나에게 당부하기를, "이번 임무는 해병대 창설 후 처음에는 맡게 된 지역 경비 임무요. 더욱이 진주는 현재 공비(共匪)들과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을 수 없소. 그러니 신 사령관은 진해보다는 오히려 진주 지역주둔 부대에 중점을 두고 해병대를 지휘해 주기를 바라오."라고 하였다.
손 제독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후에 나는 진주 지역의 작전·경비 임무에 중점을 두고 부대를 지휘하였다. 아울러 나는 진주에 머물면서 임무 완수를 위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인 10월 27일이었다. 당시 지리산 지구의 육군 전투사령관인 김백일(金白一) 대령이 진주 지역의 경비 상황을 시찰하기 위하여 진주를 방문하였다. 나와 김 대령은 일찌기 봉천군관학교 시절의 동기생이었으므로, 우리는 오랫만에 만난 반가움에 시내 진주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환담하였다.
한참 동안 환담을 나눈 뒤, 나는 김 대령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부대로 돌아가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여급(女給) 몇 명이 현관까지 따라 나와서 하는 말이, "오늘 밤에는 사령관님도 여기서 주무시도록 모든 준비가 되어 있고, 저희들이 그 책임을 맡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지금 부대로 돌아가야 하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김 대령이나 잘 모시라고 말한 뒤 호텔을 떠났다.
진주호텔에서 부대 본부가 주둔하고 있는 진주농업고등학교로 돌아온 지 한 시간이 채 안된 밤 12시경의 일이었다. 별안간 부대주변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났다.
이 날은 광양(光陽)에 있던 육군 부대가 공비들에게 기습당한지 1주일째 되는 날이었으므로, 우리 해병대는 매우 긴장된 상태에서 경계에 임하고 있었다.
나는 총소리를 듣자마자, 즉시 옆방에서 대기중이었던 작전참모 고길훈 대위를 불러서, 지금 들리는 이 총소리는 우리 부대가 실측하는 훈련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경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하였다. 내가 고 대위에게 이러한 특별 지시를 내린 까닭은, 당시 진주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가 적의 기습에 대비한 야간 실탄 사격 훈련을 여러 차례 실시해 왔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칫하면 훈련과 실제 상황을 혼동할 수 있었으므로, 특별히 주의를 준 것이었다.
고 대위의 지휘로 부대원들은 평소의 훈련 때나 다름없이 각자 지정된 위치로 가서 경계에· 임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로 이동하면서 "오늘밤의 총탄은 너무나 가까이 우리 옆을 스치는 것이 즘 이상하다."고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한편, 시내 진주호텔에서 김백일 대령을 모시고 있던 진주 주둔 부대장 김성은 중령과 해병대에 배속 근무중이던 미군 고문관은 부대가 위치한 방향에서 들려오는 총성에 크게 놀라 급히 달려 왔다.
우리 부대를 기습 공격했던 공비들은 병사(兵舍) 일부에 방화를 한 뒤 탄약고를 점령하려고 돌진해 왔으나, 우리 사병들의 대응사격으로 저지되었다. 이 날 밤에는 날이 새도록 전투가 계속되었고, 결국 공비들은 해병대 주둔지를 기습 점령하려던 기도에 실패하자, 산청(山淸) 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해병대는 다음날 오후까지 산청 방면으로 공비들을 추격하였다가, 다시 진주로 귀환하였다.
이때 하동(河東) 방면으로부터 육군의 백선엽 대령이 부대를 인솔하고 진주로 들어왔다. 앞에서 썼듯이 백 대령은 만주군 출신으로 간도특설대 시절부터 함께 근무한 바 있어 매우 친근한 사이였다.
백 대령은 나를 보자, "형님, 해병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아니, 이 사람아. 해병대가 반란을 일으키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 해병대는 적 공비의 기습 공격을 격퇴하고 산청 방면으로 추격해 갔다가, 이제 막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네."하고 말해 주었다.
이러한 어이없는 오해와 착각이 생긴 것은 다음과 같은 경위에서였다.
전날 밤, 공비의 기습 공격으로 요란한 총소리가 시내까지 들렸을 뿐 아니라, 공비들의 방화로 인해 발생한 불길과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때 진주 경찰서장은 요란한 총소리를 듣고 나서, 다시 해병대 주둔지 쪽에서 불길과 연기가 치솟는 광경까지 목격하자, 그만 몹시 당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태의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지도 못한 채, 즉시 부산의 경상남도 경찰국장 앞으로 "진주에 주둔중인 해병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긴급 전문을 보냈다. 그 결과 백 대령의 부대가 급히 출동하였다가 나와 마주친 것이었다.
해병대는 진주에서 12월 26일까지 만 4개월 간 주둔하면서 공비토벌만이 아니라, 민심 수습, 선무 공작 등에도 많은 성과를 거둔 뒤 제주도로 이동하게 되었다.
출처 : 예비역 해병중장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초대사령관 신현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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