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2. 海兵隊 創設期
(7) 海兵隊의 첫 軍歌
1. 우리들은 대한의 바다의 용사
충무공 순국정신 가슴에 안고
태극기 휘날리며 국토통일에
힘차게 진군하는 단군의 자손
나가자 서북으로 푸른 바다로
조국 건설 위하여 대한 해병대
2. 창파를 헤치며 무쌍의 청룡
험산을 달리는 무적의 맹호
바람아 불면 불라 노도도 친다
천지를 진동하는 대한 해병대
나가자 서북으로 푸른 바다로
국방의 최강부대 대한 해병대
3. 백두산 봉우리 폭풍이 불고
태평양 검은 구름 구비치어도
우리의 젊은 피가 약동하는 곳
원한의 삼팔선도 부서지리라
나가자 서북으로 푸른 바다로
전장을 선구하는 대한 해병대
3절로 된 이 '나가자 해병대'의 노래는 창설기에 제정한 유일무이한 해병대의 군가였으므로 창설기의 해병들에 의해 그야말로 목청이 터지도록 애창되었다. 이 군가가 제정이 된 시기는 해병1기 신병들이 입대식을 가진 후 약 한달 정도 경과된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군가의 가사는 당시 1중대 2소대장이었던 강복구 중사(예비역 대령)가 증언하고 있듯 때마침 2소대에 있던 신영철(申暎澈· 예비역 소령)씨가 입대 전 영화사의 조감독으로 활약한 이력도 있고 장미악극단이란 공연단체에서 극본도 썼다는 말을 듣고 우리도 해군 노래만 부를 것이 아니라 우리 군가를 하나 만들어서 불러야 되지 않겠냐고 말하면서 가사부터 한 번 지어 보라고 제안을 했던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후 어느날 강복구 소대장이 신영철씨가 지었다는 2절로 된 가사를 나한테 가지고 왔기에 군가에 대한 관심이 남달리 컸던 나는 그것을 신 사령관에게 보여 드리며 군가를 제정하는 문제를 건의했더니 사령관께선 "그것 참 좋은 생각" 이라면서 그 일을 내가 맡아서 추진하라고 했다.
원래 군가에 대한 내 자신의 관심은 네가 해병대로 지원하기 전 전 해군본부 정훈감실에서 해군 군가 가사모집을 했을 때 나 자신도 몇 편의 가사를 지어 응모한 사실이 있었고, 또 그 가사 중에서 한 두 편의 가사가 그 후 작곡은 되지 않았지만 입선이 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바로 그날로부터 해병들이 힘차게 애창할 해병대의 첫 군가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던 나는 때로는 신영철씨와 신 사령관과도 머리를 맞대어 수정작업을 거듭하는 한편 제3절을 별도로 만들어 마침내 완성을 보게 되었다.
전체 가사 중 '바다의 용사'라는 낱말로써 해병의 참모습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놓은 제1절에서는 충무공의 순국-정신을 이어 받아 국토통일을 위해 진군한다는 굳건한 의지를 표명했고, 제2절에서는 청룡과 맹호라는 대조적인 동물명을 가지고 바다와 육지에서 싸우는 해병대의 특수성을, 그리고 제3절에서는 설사 어떠한 풍파가 닥치더라도 해병의 끓는 피로 국난을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후렴에서는 나아가는 키(舵)의 방향과 의지, 다시 말해서 통일조국의 건설과 해양국가로서의 무궁한 발전을 염원하고 있다. 해방 후 하얼빈에서 귀국할 때 나는 한반도의 입지적인 조건 때문에 언젠가는 북서방에 위치한 중공과 소련 등 공산주의 집단과 일전을 치러야 할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나가자 서북으로·.'라고 한 이 대목에는 우리 해병대의 진군의 방향과 결전의 의지가 함께 내포되어있다.
그 군가의 제목을 '나가자 해병대'라고 정했던 것은 앞으로 전진하려는 진취적인 기상이 충만한 가사 전체의 절신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제목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 군가를 작곡한 사람에 관한 증언을 남겨 두고자 한다. 이에 관해서는 해병대에 입대하기 전 신영철씨가 몸담고 있었다는 그 장미악극단의 단장 김형래씨가 악극단이 도산된 후 수도경찰청의 악대장으로 있을 때 신영철씨의 부탁을 받고 작곡을 했다는 설(신영철씨의 말)과 해병대가 창설될 때 진해 특설기지사령부의 군악대에서 근무하다가 해병대로 넘어와 있다가 그 군가가 제정되었을 때 군가지도를 맡아서 했던 이병걸 하사관이 작곡했다는 설(이병걸씨의 말)이 있으나 나 자신의 판단으로는 김형래씨가 작곡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왜냐하면 작사에 관여했던 신영철씨가 외부에 부탁을 해서 송부되어 왔던 음표를 자신이 직접 나에게 제출했다는 강복구씨의 증언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고, 나팔을 가지고 있던 이병걸 하사관은 그 악보를 가지고 군가지도를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에게 작곡을 의뢰했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을 뿐더러 만약에 작곡을 군 내부 인사들에게 의뢰를 했다고 한다면 그 당시 진해특설기지에는 해군군악학교와 특설기지 군악대가 있었으므로 학교장인 남궁요열씨와 한상기씨 등 외국에서 음악공부를 마친 유명한 음악가들에게 의뢰를 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이병걸씨는 다시 해군으로 복귀했으나 군악대에서는 근무를 하지않고 휼병부에서 근무를 하다가 전역을 했고, 그 당시 경찰악대에 몸담고 있었다는 김형래씨(영화배우 김진규씨의 친삼촌)는 6·25동란 초기서울에 입성한 북괴군에 의해 마포의 한강변에서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한편 이 군가가 제정되자 해병대에서는 이병걸씨의 지도하에 조별과 시간과 석별과 시간을 이용해서 열심히 부르기 시작했는데, 모든 해병들의 사기를 용솟음치게 했던 이 군가는 그 후 해병들이 누볐던 6·25의 격전장과 남십자성, 빛나는 베트남 전선 그리고 현재까지도 힘차게 불려지는 자랑스런 군가이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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