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2. 海兵隊 創設期 (10) 蔣介石總統 迎接行事

머린코341(mc341) 2014. 7. 2. 19:11

국방의 멍에 - 2. 海兵隊 創設期


(10) 蔣介石總統 迎接行事


  해병대가 창설된지 4개월이 채 못되던 그해 8월에 접어들면서 진해 통제부사령부와 해병대사령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진해를 방문하는 장개석(蔣介石) 중화민국 총통의 예방을 앞두고 부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귀한 국빈의 방문에 즈음해서 해병대가 맡아서 했던 일은 20만평에 달하는 비행장과 대통령 별장지대에 대한 경비임무와 정부 당국의 의전행사를 위한 의장대의 편성과 예포의 발사 등이었고, 통제부에서는 양국 국가원수와 수행원들에 대한 영접과 회담장의 준비를 위해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처음으로 맞는 외국 국가원수에 대한 의전행사를 해군·해병대의 협조하에 치르게 된 정부 당국에서는 모든 일이 생소하여 심지어는 예포를 몇 발을 발사해야 하는지 조차도 알지 못해 집행부서의 의전행사 준비에 차질을 빚게 할 정도였다.


  한편 의장대를 편성해야 했던 해병대사령부에서는 7월 초순경에 훈련을 마친 1기 신병들 가운데서 약 40명의 신체가 건장한 자들을 선발하여 임시 의장대를 편성하여 사열준비를 시켰는데 해병대에서 그 일을 맡게 되었던 것은 그 당시 통제부에도 의장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해병대에서 맡게 된 예포 발사는 바로 그 무렵 해군사관학교 육전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해병대로 전입하여 사령부의 작전참모로 임명된 김동하 소령에게 그 임무가 부여되었다.


  만군에서 포병장교를 근무했던 김동하 소령은 신병교육대로부터 10여명의 인원을 차출받아 통제부로부터 운반해 온 6문의 37밀리 대전차포를 가지고 사격연습을 실시하게 되었으나 공포탄이 없어 실탄을 가지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


  통제부에서 운반해 왔던 6문의 37밀리포는 1948년 10월 해군에서 임시함대를 편성하여 여순 폭동사건을 진압하러 갈 때 미 고문단에서 지원해준 20~30문 중의 일부였다. 당시 해군에서는 진해 공항에서 그 포들을 분해하여 야간작업을 통해 포가 장비되어 있지 않은 임시함대의 함정(소해정)에 1~2문씩 적재해 주었었는데, 장개석 충통 영접시에 가지고 왔던 6문의 포는 그 후 해병대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그해 연말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할 때 제주도로 운반해 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장개석 총통이 진해를 방문하기 하루 전날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 국무총리(겸 국방장관)를 위시해서 임병직 외무, 윤치영 내무, 윤보선 상공, 허정 교통체신, 김도연 재무장관과 총무·공보 양 처장 및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등을 대동하고 열차편으로 진해에 도착했고, 통제부에서는 동문 안 영관급 장교들의 갑호관사를 비워 그 국무위원들과 처장들의 숙소로 제공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기로는 그때 신현준 사령관의 관사에는 허정 장관이 유숙을 했고, 김동하 소령의 관사에는 윤보선, 김도연 장관이 함께 유숙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장개석 총통이 진해를 방문했던 날짜는 8월 6일이었고, 장 총통이 탑승한 전용기(美齡號)가 덕산비행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40분경이었다.


  장복산 남쪽 상공으로 모습을 나타내어 경화동과 속천 상공을 거치며 차츰 고도를 낮추어 활주로에 안착했던 그 미령호(장총통의 영부인 송미령 여사의 함자를 딴 명칭)의 동체 앞쪽에는 청천백일(靑天白日)기와 태극기가 꽃혀 있었다.


  그리고 미령호가 착륙할 즈음 다른 한 대의 쌍발비행기가 남쪽하늘로 진입하고 있었는데 그 비행기에는 장총통의 수행원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날 덕산비행장에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과 국무위원 및 손원일 참모총장 일행이 출영하고 있었다.


  마침내 탑승기의 트랩에서 내린 장 총통은 이 대통령을 비롯한 출영인사들과 악수를 나눈 다음 사열대가 마련된 격납고 앞의 의전행사장으로 안내되었다. 사열대 앞에는 통제부 군악대와 해병대의 의장대가 도열해 있었으며, 행사부대의 지휘관은 바로 나였다.


  장 총통과 이 대통령이 사열대에 오르자 나는 '받들어 총'의 구령을 걸었다. 그 구령이 떨어지자 의장대는 받들어 총을 했고, 군악대는 중화민국 국가를 연주했다. 그리고 구령과 함께 행사장 바로 옆 동네산(△43) 앞에 방열해 둔 6문의 37밀리 대전차포대에서는 김동하 소령의 지휘하에 21발의 예포를 실탄으로 발사했는데, 포신을 수령으로 눕혀서 발사한 그 포탄들은 불과 20~30미터 떨어진 동네산 기슭에 폴싹폴싹 흙먼지를 일으키며 낙탄하고 있었다.


  양국 국가의 연주와 예포 발사가 끝나자 곧 해병의장대의 사열과 분열식이 거행되었다. 해군에서 빌려 온 산뜻한 세일러복과 내피가 없는 일본 해군의 철모와 신발 및 각반 등을 착용한 의장대를 사열하며 장 총통은 카키색 헬멧을 쓴 채 시종 '하오(好), 하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개석 층통과 이승만 대통령의 진해회담은 태평양동맹 결성에 대한 의견 교환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 정상회담은 8월 7일 오전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다.


  정상회담이 끝난 저녁에는 손원일 참모총장이 주재한 칵테일 파티가 이 대통령의 진해별장에서 개최되었는데 그 자리에는 이범석, 신익희, 이청천, 김흥일, 최용덕, 김신씨 등 과거 중화민국 정부 및 중국 국민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인사들이 초청되어 장 총통과 즐거운 교관을 가졌던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장개석 총통이 이승만 대통령과의 진해회담을 마치고 한국을 떠난 시각은 8일 오전 10시 30분 경이었으며 그날 양국 정부에서는 공동성명을 통해 태평양 제국(諸國)의 연맹 형성에 관하여 양국 정상들이 충분한 의견을 교환했으며, 1949년 7월 12일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과 장개석 총통이 바기오에서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의도한 바와 같은 연맹 구상에 관해 충분한 동의를 함으로써 필리핀 대통령이 제안한 동맹 탄생을 위해 필요한 일체의 방책을 취하도록 요청할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간략한 회담결과를 발표했다.


  그해 연말 중국 공산당에 패배하여 동설에서 대만으로 정부를 옮겼던 장 총통이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가운데 절치액완(切齒扼腕), 대륙반공(大陸反攻)의 기회를 노리며 전력을 가다듬었으나 끝내 그 뜻을이루지 못한 채 1975년 향년 88세를 일기로 그의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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