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3. 海兵隊의 晋州駐屯
(2) 共匪來襲事件
진주사범학교에서 주둔을 하게 된 해병대는 도착 즉시 학교 안팎 요소요소에 경계초소를 배치하여 경계를 강화함과 동시에 특히 야간에는 학교 뒷산 쪽으로부터 공비들이 습격을 해 올 것이라는 가정 하에 수시로 비상을 걸어 이에 대처하는 야간 비상전투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던 중 그 해 10월 중순경 이중업(李重業)이란 자가 지휘하는 약 80명의 공비가 진양군 수곡면 토곡리 지서를 습격하고 면사무소에 방화를 한 것 외에해병대의 외곽초소에서는 여러 명의 비무장 공비들을 체포했고, 또 진주-하포간 도로 상의 평원(平原)지서 부근에서 해병대를 자처하는 3~4명의 폭도가 출현하는 등 공비들의 동태가 수상쩍었다.
그래서 진주경찰서와 해병대에서는 혹시 공비들이 백운산(白雲山)과 합천(陜川) 방면으로부터 진주를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부대 잔류중대와 하사관 교육대로 하여금 시내의 초소경비와 병사 안팎에 대한 경계를 더한층 강화해 나갔으나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못당한다는 속담 그대로 일요일이었던 10월 17일 새벽녁에 불의의 허를 찔려 공비들의 내습을 허용하게 된 것이었다.
간략하게 그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면 그날 새벽 하동(河東) 산청(山淸) 및 합천 등지에서 세력을 규합한 약 300명의 공비들은 두 갈래로 나누어 사법학교와 시내 쪽을 동시에 습격했던 것인데 그들이 노렸던 것은 해병대의 병사를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고 형무소를 습격하여 죄수들을 석방함으로써 제2의 여순폭동사건을 일으키려 했으나 결국 진행과정에서기도가 좌초되고 말았다.
새삼스러운 지적이지만 그날 새벽 공비들의 습격을 가능하게 했던 그 이면에는 공교롭게도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즉, 첫째는 그 전날 밤 해군본부의 위문공연단이 내진하여 시내의 모극장에서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가졌고, 둘째는 그 전날 부대를 방문했던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 김백일(金白一) 대령이 진주에서 일박하는 바람에 지휘관과 일부 참모들이 영접을 위해 "밤중에 부대를 비우고 있었다는 사실인데, 물론 공비들이 그러한 정보까지 사전에 입수하고 습격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러한 일 역시 더욱 강화해야 할 일요일 새벽녘의 경계를 소홀하게 한 일단의 원인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곧 나 자신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공비들이 기습을 했던 곳은 학교 북문 쪽에 위치한 1중대의 제1병사(강당)였는데 당시 교외 경비차 병력이 출동 중에 있던1중대의 병사에는 환자 3명과 1명의 실내 감시병이 잔류하고 있을 따름이었고, 제1병사 건너편에 있는 제2병사(기숙사)에는 3층에 하사관 교육대, 아랫층에는 제5중대가 취침 중에 있었으나 그들은 그 전날 밤 해군본부 위문단의 위문공연을 관람하고 돌아와 곤히 잠을 자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공비들은 이러한 점도 면밀히 파악한 후에 습격을 감행한 것이었겠지만 대체로 이러한 상항 속에 학교 북문 쪽에 있는 제1병사 뒷편 철조망 쪽으로 접근해 와서는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전등을 총으로 쏘아 박살을 냄과 동시에 깜깜해진 틈을 타서 공격조는 위병소를 점령하고 방화조(放火組)는 병사 주변에 휘발유를 뿌려 방화를 함으로써 전격적으로 아군의 허를 찌를 수가 있었고, 더구나 학교 서쪽 구릉 밑에 위치한 그 제1병사는 위병소로부터 불과 50미터 거리밖에 되지 않아 방화조의 기습적인 방화활동이 그만큼 용이했다.
강당에 불길이 솟기 시작했던 시각은 새벽 1시 30분경이었다. 일단 방화에 성공한 공비들은 화영에 싸인 1중대 병사와 북문쪽 경비초소 및 전등불이 켜져 있는 건너편 5중대 병사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고, 그러한 틈을 타서 2~3명의 공비들은 북문 동쪽 부대본부 청사 근처에 있는 무기고로 재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무기고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결사적으로 무기고를 지키기 위해 분전했던 5중대의 김희선 해병을 비롯한 수명의 위병들에 의해 보호되었고, 밤 12시경 한 차례의 순찰을 마치고 취침 중에 있던 당직사관 안창관 중위는 얼마나 놀랐던지 팬티바람으로 밖으로 뛰쳐나와 "진짜 공비가 왔다" 면서 초비상을 걸어 전투배치를 지휘했는데, 그는 실내의 전등불이 공비들의 사격을 유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그 전등불들을 박살을 내게 함으로써 적의 사격감각을 무디게 했다.
한편 이러한 일이 발생하고 있을 때 부대장이었던 나는 공교롭게도 김백일 대령과 4~5명의 수행원들을 영접하느라 시가지의 외곽에 있는 진주호텔에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그 전날 밤 저녁식사를 대접할 때는 신 사령관도 자리를 같이 했으나 식사가 끝난 뒤 신 사령관은 부대로 돌아가고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그 때까지 호텔에 남아 술대접을 하고 있던 사람은 나와 김용국 대위(하사관 교육대장) 및 김종식 중위(수색 소대장) 등 세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실토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내가 진주에 있는 동안 어쩌다 한 번씩 김백일 사령관이나 채병덕 총장 같은 분이 부대를 방문할 시에는 조금이라도 많은 무기와 탄약을 지원받으려는 의도에서 식사대접을 했다는 사실인데, 그날따라 일진이 좋지 못해 그러한 변이 생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 전날 초저녁부터 호텔에 머물고 있다가 자정을 넘은 시각에 요란한 총성을 듣게 되었던 나는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 보았더니 누군가가 사범학교 쪽에서 불길이 솟고 총성이 들린다고 하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김용국 대위와 김종식 중위도 같은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설마 그럴 리가‥‥?" 하는 생각을 했던 나는 급히 부대로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호텔에서 사범학교까지의 거리는 약 3킬로 정도였으나 차가 없어 도보로 가자니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백색 정모에 카키색 근무복을 입고 있던 나는 공비들의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해서 그 정모를 아무렇게나 구겨서 허리춤에 차고서 재빨리 길을 재촉했고, 김 대위와 김 중위도 바쁘게들 움직였다.
그런데 부대로 돌아가던 도중 나는 문득 시야가 가려 직접 관측할 수없는 사범학교 쪽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촉석루가 있는 강변 언덕 위로 올라가 학교 쪽을 바라보았더니 과연 강당건물이 화염에 싸여 있었고, 눈을 시가지 쪽으로 돌리니 그 쪽에서도 불길이 솟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리고 그 양쪽에서 산발적인 총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던 나는 착잡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촉석루 언덕에서 내려온 세 사람이 부대로 돌아오는 도중 가장 경계를 해야 할 길목은 사범학교로부터 약 500미터 떨어진 것에 있는 교량이었다. 교량 부근에 당도한 세 사람은 혹시 그 길목에 공비들이 매복해 있지나 않을까 해서 30~40분 동안이나 길가에 엎드려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전혀 그런 기색이 없는 듯해서 쏜살같이 다리를 건너왔다.
세 사람이 학교 정문 가까운 지점에 당도했던 시각은 새벽 3시경이었다. 목조건물인 강당의 불길은 저절로 진화되어 벌건 빛깔을 지닌 채 사그러져 가고 있는 중이었고, 부대 안팎에서의 총격전도 그다지 치열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문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으므로 정문 옆에 있는 배추밭 밭머리 쪽으로 해서 부대 안으로 뛰어들기로 작정을 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나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부대 안쪽을 향해 "오-이, 오-이" 하고 큰 소리로 외쳐 보았으나 총성 때문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총성이 다소 약해지는 틈을 타서 두 번, 세 번, 같은 외침을 되풀이한 끝에 가까스로 나의 외침소리를 안쪽 사람들에게 감지시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쪽에서 "나가 누구냐?" 하며 반문을하는 바람에 보안상 부대장이란 말은 하지 못하고 "나야 나, 날 모르겠어?" 하고 되풀이 소리를 친 끝에 간신히 내 목소리를 알아차린 하사관교육대의 강용(姜勇) 상사의 도움으로 총성이 뜸해진 틈을 타서 마치 침투사격훈련을 하는 기세로 부대 안으로 뛰어들 수가 있었다.
그런데 부대 안으로 들어서게 된 나는 정문 안쪽 마당 한 구석에 서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신 사령관의 침착한 모습을 보고 마음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그 자리에는 해병대 사령부 정보참모 고길훈 소령의 모습도 보였고, 인사관 민용식 중위의 모습도 보였다. 전투모의 안창을 머리 뒷쪽으로 돌려쓰고 권총을 뽑아든 채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신 사령관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즉, 공비들이 텅 비어 있는 강당에는 불을 질렀지만 해병들이 무기고를 사수하고 다른 병사를 잘 지켜냄으로써 기습적인 공비들의 습격을 격퇴시키고 있는 중이니 너무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신 사령관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된 나는 과연 실병지휘를 해본 분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욱 마음이 든든했다. 그러던 중 정문쪽에서는 이런 일이 빚어지고 있었다. 즉 정문 바깥 쪽에서 "사격금지" 를 외치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불쌍한 1등해병들아! 이제 더 이상 고생할 생각말고 우리와 함께 손을 잡지 그래..." 하며 선동을 했는데, 학교 안쪽에서 누군가가 "야 이년아 개수작 말고 이 총알이나 받아 처먹어! " 하며 쏘아대자 그 여인의 목소리는 그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시각까지 학교를 포위한 채 공격을 계속하고 있던 공비들은 뜻밖의 일에 놀라고 있는 기척이었다. 그 뜻밖의 일이란 두 대의 GMC가 요란한 클랙션 소리와 함께 강력한 불빛을 투사하며 그들의 배후로부터 질주해 왔던 것인데, 공비들에게 아군의 증원병력을 싣고 오는 차들로 오인하게 했던 트럭들은 전날 밤 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던 해군본부위문단을 진주역까지 실어다 주러 갔다가 역에서 차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중 시가지와 부대가 있는 쪽에서 총성이 들리고 불길이 솟는 것을 보고 급히 부대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한편 그날 새벽 시내로 잠입했던 다른 일단의 공비들은 어떠한 계획하에 어떠한 행동을 취했는지 이에 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해 둔다.
그들은 시내로 잠입하자마자 진양군청과 법원 및 형무소 건물에 불을 지르는 가운데 형무소를 습격하여 죄수들을 석방함으로써 해병대의 무기고를 탈취한 공비들과 합세하여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킬 계획이었으나, 결국 그들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즉, 그 첫째 이유는 그들의 방화로 군청과 법원이 불에 타고 형무소의 사무실까지 불에 탔으나 해병대 방첩대와 해군헌병대 등 군 기관원들과 형무소 당국의 경비원 및 경찰, 한청(韓靑) 방위대원들의 결사적인 응전으로 형무소를 습격하는 데 실패한 때문이었고, 두번째 이유는 사범학교를 습격한 공비들이 그 목적을 달성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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