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3. 海兵隊의 晋州駐屯
(4) 國會調査團의 來晋
그런데 그날 새벽녘에 있었던 공비내습사건은 비록 그 정도의 피해를 입히는데 그쳤지만 사회적으로는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1947년 10월 2일에 발생했던 대구 폭동사건을 비롯해서 제주도 4.3사건과 여순사건 등 해방 후부터 정부수립 후에 이르기까지 발생했던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국민들의 불안감이 극도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사건이 보도되기 시작하자 일부 국민들 중에는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기도 전에 혹시 그 사건이 해병대 내에 침투해 있는 남로당 프락치들이 지리산의 공비들과 결탁해서 일으킨 사건이 아닐까 하는 시각에서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사회안정을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국회에서는 내무치안위원회에 소속된 박찬현, 이강우 의원으로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현지로 급파했는데, 해병대를 방문하기 전 두 의원은 관계기관으로부터 공비들의 내습경위와 피해상황을 청취하는 한편 각계각층으로부터 광범한 여론을 청취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해병대의 내부 반란에 의해 일어났다는 사회 일각의 구구한 억측들이 전혀 터무니없는 기우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해병대에 대한 진주 시민들의 신뢰가 큰 것을 확인하게 됨에 따라 그 두 의원의 부대방문은 조사활동을 위해 왔다기 보다는 해병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위해 온 것 같은 인상을 갖게 했다. 진주시민들이 해병들을 그만큼 신뢰하고 있었던 것은 진주에 주둔한 후 애민정신을 누누히 강조한 신 사령관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길을 가다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노인들이 있을 경우 그 짐을 날라주기도 하고 그해 가을 추수를 할 때는 노농봉사를 해주는 등 시민들에게 좋은 모양을 보였으면 보였지 누를 끼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의원들과 대원들 사이에 이러한 질문과 응답이 오갔던 일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즉, 의원 한 분이 나이어린 한 대원에게 "Ml소총과 같은 성능이 좋은 무기가 필요하지 않느냐" 고 했더니 그 해병은 "후방에서는 칼빈소총만으로도 충분하니 그러한 좋은 무기는 38선을 경비하는 군인들에게 보내 주십시오" 라고 했는데 나이어린 그 해병으로부터 그러한 말을 듣게 된 국회의원은 해병의 애국심과 국방의식을 높이 치하해마지 않았다.
한편 그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는 비단 국회에서 뿐만 아니라 내무·국방 당국에 의해서도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한 조사와는 상관없이 주둔부대장이었던 나는 부대 지휘관으로서의 결과적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며 사기가 꺾여 있던 나는 어느 날 검정색 지프차를 타고 부대 정문 위병소에 불쑥 드리닥친 낯선 방문객이 다짜고짜 "내가 김효석인데 나를 몰라봐?" "부대장을 만나야 할 일이 있어 왔으니 부대장실로 안내해!" 하고 명령을 하듯 말하자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고 있던 위병소 근무병이 근무수칙에 따라 일단 출입을 제지시켜 놓고 무슨 일로 부대장을 만나러 왔느냐며 꼬치꼬치 캐물은 것이 그 분에 대한 홀대로 간주되어 말썽을 빚은 일로 마음이 더욱 심란하고 울적했다.
위병소에서 위병들과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 자리에 나타난 위병소장의 안내를 받아 나를 찾아왔던 그 방문객은 당시의 내무장관 김효석(金孝錫)이었는데 부대장실에 들어서면서도 그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내가 김효석이요!" 하는 바람에 도대체 김효석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무례를 범하는가 싶어 조금은 언짢은 기분이었으나 다음 순간 "내무장관 김효석이를 몰라봐요?" 하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 분의 신분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관님을 몰라뵈서 죄송합니다."고 말하면서 위병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무조건 정중하게 사과를 하며 의자를 권했고, 또 그 자리에 동석하고 있던 신 사령관도 인사를 청하며 사과의 뜻을 표했으나 그 분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해 있었던지 "그럴수가 있소? 대한민국의 장관을 몰라보다니..." 하는 말을 남기고는 횡하니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일을 겪게 된 나는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모자를 벗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설상가상 그로부터 수일 후(11월 13일) 국회 내무 치안위원회에 제출된 국회조사단의 조사보고내용을 신문지상을 통해 읽어 보았을 때는 이제는 모든 것이 다 틀렸구나 하고 체념해 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보고서의 결론적인 요지가 진주경찰서장과 주둔부대장에게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보고서의 요지를 간기하면 다음과 같다.
1. 당직경찰관이 주둔부대의 반란으로 속단한 것은 잘못이었다.
2. 진주경찰서에서 막대한 기부금을 거두어 시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
3. 공비들의 소탕을 위해 1만 명의 경찰관을 증원할 것을 건의한다.
4. 진주경찰서장과 주둔부대장에게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처지에 놓여있던 나는 15일 라디오 방송 정오뉴스를 청취하고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주둔부대를 두둔하고 나선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이 그 날 오전의 정례 출입기자회견을 통해 국회조사단의 상황파악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면서, 비록 허를 찔리긴 했으나 주둔군 부대장병들이 군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무기고를 사수하여 사건의 확대를 방지했다는 것은 곧 그 직무를 완수한 것이라고 언명했으므로 나로서는 구세주를 만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오전의 출입기자 회견석상에서 신성모 장관은 진주경찰서장 김주식(金柱式) 총경을 파면하기로 결정을 보게 된 듯한 말도 했는데, 결국 신성모 장관 덕분으로 나 자신은 책임을 면하게 되었으나 진주시에 대한 치안책임을 지고 있던 진주경찰서장은 사찰계장(조정대 경감)과 함께 파면처분을 당하고 말았으니 나로서도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김주식 총경은 해병대의 연고지인 진해 경화동 출신이었고, 또 해병대가 진주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매월 한 번씩 가졌던 기관장 친목회를 통해서도 나와 각별한 정분을 나눈 사이였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진주를 떠나기 전 경찰서로 그를 찾아가 위로의 뜻을 표하기는 했으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4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 때 가졌던 그 김주식 서장에 대한 안스러운 감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
10.27 공비 내습사건은 실전경험이 전혀 없던 해병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부대에서는 비록 사후약방문같은 사후(事後)대비이기는 했으나 그러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부대에서는 공비들이 침투했던 그 사범학교 뒷쪽 언덕 위에 경계시설물을 강화하고 시가지 외곽 요소요소에는 경계분초를 세우는 한편 시 외곽지대에서의 야간훈련도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때로는 나 자신이 직접 순찰조를 인솔하여 공비들의 예상접근로에서 적을 가장한 침투훈련을 실시하는 등 철통같은 경계태세를 확립함으로써 그 해 12월 말경 해병대의전 병력이 제주도로 이동할 때까지 두 번 다시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았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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