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4. 海兵隊의 濟州道 移動
(1) 濟州道 移動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한 날짜는 1949년 12월 28일이었다.
그 사이 진주에 주둔하여 공비토벌에 임하고 있던 전투주력부대와 덕산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사령부 및 신명 2기 수료생 등 해병대의 전 병력이 제주도로 이동하게 된 목적은 4.3사건 이래 물심양면으로 피폐해 있던 30만 제주도민들에게 재기의 힘을 북돋우어 주는 일과 한라산을 근거지로 하여 민간인을 납치하거나 살인과 약탈, 방화 등을 일삼으며 민심을 흉흉케 하고 도민들의 생업을 위협하는 공비들을 소탕하는 일 그리고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해병대 자체의 정신적·육체적인 훈련을 쌓는 데 있었다.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났던 4·3사건 이전부터 육군 병력이 주둔해 왔던 제주도에는 그 당시까지도 약 1개 연대의 육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병력이나 보급품을 수송할 때마다 해군의 지원을 요청해야만 했고, 또 중요한 통신수단을 이용할 때도 일일이 해군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으므로 불편한 일이 적지 않아 군 당국에서는 육군부대를 철수시키고 해병대를 주둔시키기로 결정을 보게 된 것이었다.
한편 창설시에 불과 400명의 인원으로 고성(呱聲)을 터뜨렸던 해병대는 그 사이 2기 신병들과 해군으로부터 전과한 인원 등으로 병력이 차츰 늘어나 제주도로 이동할 당시에는 약 1,100명 선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러한 병력 가운데 그 해 7월에 모집했던 30명의 해간(海幹·해병대 간부후보생) 1기생들은 태능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로 보내어 위탁교육을 받고 있던 중이었고, 1950년 1월에 모집했던 24명의 해간 2기생들은 시흥(始興)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해방병단에 입대한 지 약 3년 반이 되었지만 제주도에 가 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29일 아침 LST가 제주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멀리 나의 눈에 비친 것은 잿빛으로 칠해져 있는 듯한 원시적인 섬 그것일 뿐 인공적인 구조물은 전혀 눈에 띠지가 않았고, 배가 제주항 가까이 접근했을 때 갑판 위에서 유심히 섬 둘레를 바라보고 있던 나의 시야에 비친것은 해변가의 갈회색 움막집과 그 움막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들이었다. 그리고 그 움막집들의 지붕에는 밧줄과도 같은 새끼줄이 가로 세로 얽혀져 있었고, 처마 밑쪽에는 마치 메주덩이를 연상케 하는 돌덩이가 호박넝쿨이 매달린 호박같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러한 풍경들을 눈여겨보고 있던 나는 직감적으로 과연 돌도 많고 바람도 많은 섬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얼마나 바람이 세게 불기에 처마 밑에 저렇게 큰 돌덩이들을 매달아 놓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부두에 상륙하기가 무섭게 실감한 일이었지만 바람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돌풍처럼 불어닥치는 그 바람이 종횡무진 미세한 모래알을 마구 뿌리고 다니는 바람에 도무지 눈코를 뜰 수가 없을 지경 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마 밑에 돌덩어리가 매달려 있는 것을 바라본 그 순간부터 그런 생각을 떠올렸었지만 어쩐지 귀양살이를 하러 내가 여기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입맛이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제주읍내의 집들도 대개가 초가집들이었지만 우중충한 빛깔을 띤 읍내의 초가집 처마 밑에는 메주덩이 같은 돌들은 매달려 있지 않았다.
12월 29일 제주도에 도착했던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전체 인원으로 사령부를 비롯한 16개 중대를 편성하여 제주읍과 모슬포에 배치했는데 그 편성표는 다음과 같다.
제주읍
사령부(인사·정보·작전·법무·통신·수송·시설·경비 등 각 부서)
제3중대장 (김낙천 중위)
하사관교육대장 (김용국 중위)
대전차포 소대장 (김동윤 소위)
근무중대장 (고상하 중위)
모슬포(부대장 김동하 소령)
제1대대장 (김병호 대위)
제1중대장 (김병호 대위)
제2중대장 (김윤근 대위)
제2대대장 (고길훈 소령)
제5중대장 (김재주 대위)
제6중대장 (화영 대위)
제7중대장 (안창만 중위)
위의 병력 가운데 모슬포부대장 (金東河 소령)은 직접 제주도 일대를 경비하고 있었고, 그 예하의 제1대대는 북제주군, 제2대대는 남제주군 일대를 담당했다. 그리고 한림읍을 비롯한 서귀포와 성산포에는 정보대와헌병 분대를 배치했다.
해병대사령부가 들어서게 된 건물은 육군부대의 본부가 사용하고 있던 2층 목조건물이었다. 그 2층 건물에 사령관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참모부서가 자리를 잡고 근무중대와 932부대(전투정보대)만은 다른 건물을 사용했다. 그리고 근무중대에는 6문의 37밀리 대전차포가 있었는데, 그 포들은 장개석 총통이 진해를 방문할 때 예포 발사를 위해 통제부로부터 가져 온 것들이었다.
부대배치는 제주도에 도착한 그날 오후 늦게까지 진행이 되었다. 부대배치가 완료되자 나는 신 사령관을 모시고 그 다음 날 모슬포부대와 도내의 실정을 살펴 보기 위해 지프차를 타고 섬을 일주해 보았다.
제주읍에서 모슬포로 가는 도중에 목격했던 일이지만 해변가로 나 있는 도로변으로부터 내륙 쪽으로 약 200미터 거리 내의 공간지대는 마치 사계청소를 해둔 것처럼 불에 탄 채로 있었다. 그리고 그 불탄 지대 안쪽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인지, 돼지들을 기르는 움막집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몽고천막 모양의 허술한 움막들이 있었다.
필시 그 속에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현장으로 가 보았더니 나무 막대기를 세워놓은 그 위에 옥수수 대와 지프라기를 얼기설기 지붕을 엮어서 만들어 놓은 움막 속에는 분명히 짐승들이 아닌, 남루한 감색 빛깔의 누더기 옷을 걸친 원시인같은 사람들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심히 그 움막 안을 살펴 보았더니 움막의 바닥에는 지푸라기가 깔려 있었고, 찌그러진 남비 속에는 먹다 남겨둔 듯한 누런 좁쌀죽이 얼어붙어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서귀포 앞바다에서 본 포경선(捕鯨船)도 매우 인상깊은 영상으로 떠올랐지만 제주도의 첫 인상 가운데 가장 잊혀지지 않는 것은 똥돼지를 키우고 있는 지붕도 울타리도 없는 옥외 뒷간이었다.
똥돼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돌로 쌓놓은 네모꼴의 돌담 위에 양 다리를 벌리고 앉아 뒤를 보고 있던 어떤 장교가 빨리 똥을 싸주지 않는다고 성이 났던지 느닷없이 꿀꿀거리며 펄쩍 뛰어오른 주둥이가 긴 제주도 똥돼지에 하마터면 불알을 따먹힐 뻔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모슬포 부대의 첫 인상은 매우 삭막했다. 모슬포 부대가 위치하고 있던 곳은 대정읍 상모리(上慕里)에서 약 1킬로 떨어진 삼방산(三妨山) 앞 하모리였다. 병사로 사용된 건물은 일제 때 일본군(항공대)이 건립해 놓은 7~8동의 병사(兵舍) 건물이었다. 돌과 시멘트로 축조해 놓은 폐사같은 나지막한 단층건물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뻐끔뻐끔 창문이 나있는 사면의 벽만은 돌벽으로 되어 있었다.
기와로 이어진 지붕은 삭아빠진 상태였고, 돌벽 사이사이에 뚤려 있는 창문에는 유리 한 장 제대로 끼워져 있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 뻐끔한 창문에는 거지 움막같은 꼴모양이기는 했지만 거센 모랫바람을 막기 위해 우선 유리 대신 가마니라도 달아붙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제주도로 이동한 해병들은 진해 덕산비행장 시절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2의 창설기를 개척하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정신력을 배양했다.
한편 모슬포 부대가 주둔했던 모슬포에는 과거 일본군이 닦아 놓은 소형 비행장이 있었으며, 진해 덕산비행장을 연상케 했던 그 비행장 주변의 요소요소에는 일본군이 시설해 놓은 포진지도 있었고, 직사포와 고사포의 잔해도 목격되었다. 일본군은 모슬포 비행장을 이용해서 산동반도(중국) 이남지역에 대한 도양(渡洋) 폭격을 감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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