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4. 海兵隊의 濟州道 移動 (3) 共匪討伐

머린코341(mc341) 2014. 7. 5. 14:49

국방의 멍에 - 4. 海兵隊의 濟州道 移動

 

(3) 共匪討伐

 

  공비토벌에 관한 얘기를 하기에 앞서 4.3사건을 알지 못하는 후진들을 위해 그 폭동사건의 배경과 진상에 관해 간략하게 언급해 두고자 한다.

 

  4·3사건이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대대적인 폭동사건을 말함인데 이 사건의 배경과 발생과정을 간추려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해방 후 인구 약 30만의 제주도에는 이른바 남로당 전남도위원회산하 군사부 직계로 제주인민해방군이란 것이 각 면 단위로 조직이 되기 시작했고, 이 기구를 직접 지휘 운용한 자는 제주 인민해방군사령관으로 있던 학병 출신의 이덕구(李德九)와 남로당 지구당 총책인 김달삼(金達三)이란 자였다.

 

  이들은 과거 제주도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군이 종전과 함께 본국으로 철수할 때 한라산 산중에 묻어두고 간 무기와 탄약 등을 발굴하여 그것으로 수백 명의 불순분자들을 무장시킨 다음 계속 그 세를 규합한 끝에 약 1,000명의 지방 폭도들과 합세하여 그 해 5월 10일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위해 시행할 예정이던 총선거를 방해함과 동시에 전국적인 폭동을 유발시키려는 목적으로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해 제주읍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끔찍하기 이를 때 없는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한편 폭동이 일어나자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9연대와 제주경찰서에서는 즉각 병력을 투입하여 폭동진압에 나섰고, 5월 중순에는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10연대가 제주도로 이동하고 7월 중순에는 대구에서 육군 6연대의 1개 대대가 한라산으로 잠입한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는 육군 9연대와 5·6연대의 1개 대대 및 제주경찰대가 배속된 제주도 경비사령부가 설치되고 1949년 3월에는 9연대와 교대된 육군 2연대 및 6여단 유격대가 배속된 제주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충남에서 파견된 경찰응원대와 합동하여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함으로써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했을 당시에는 약 200명 정도의 공비들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었다.

 

  당시 한라산 산록 일대에는 공비들의 하산과 그들과 내통하는 자들의 입산을 막기 위해 토벌대와 주민들이 구축해 놓은 성벽같은 긴 돌방축이 구축되어 있었는데, 한라산 약 1킬로미터 안팎 지점으로부터 내륙까지 완전히 연결시켜 놓은 그 원형의 돌방축은 그 당시의 나에게는 중국의 만리장성을 연상케 하는 축조물로 비춰졌다.

 

  한편 한라산의 공비들은 일제시대에 개설한 일명 머리띠 도로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4개 처에 위병소같은 관물을 설치해 놓고 위장을 한 몸으로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망을 보고 있다가 토벌대가 접근해 오면 민첩한 신호에 따라 잠적을 해버리기 때문에 좀처럼 포착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서정남 소위가 지휘하는 3개 분대의 토벌대(분대장 진두태 상사, 김익태 중사, 조기원 하사)는 한라산 및 그 서쪽 오백장군(五百裝軍)과 1394고지 부근의 세오름(三岳), 돌오름(石岳)을 중심으로 토벌전을 전개하고, 모슬포부대의 중대단위급 토벌대는 주로 한라산 상봉을 중심으로 그 서북부에 해당하는 제주, 애월, 한림지구와 남부, 안덕, 중문, 서귀, 남원지구에서 약 1개월간씩 교대로 투입되어 토벌전을 전개했다.

 

  공비들의 아지트를 색출하기가 어려웠던 토벌대 대원들은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고는 했다. 즉 공비들이 배설한 인분의 냄새와 동물이 썩는 냄새를 맡고 그들의 아지트를 포위 공격하기도 했고, 모락모락 나는 취사연기와 까마귀들이 선회하고 있는 곳을 덮쳐 밥을 짓고 있거나 소나 말을 잡고 있는 현장을 덮치기도 했다.

 

  해병대의 공비토벌작전은 6.25동란으로 인해 일단 중지될 수밖에 없었으나 1.4후퇴(1951년)때 북한지역에서 철수한 5대대의 1개 중대장 (권석기 중위)를 한라산에 투입하여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약 80명의 공비들을 소탕하게 했는데, 그 당시 제주도에서는 제주도민의 뜻에 따라 해병대를 중심으로 군·관·민 합동전투지휘소를 설치하여 최후의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