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4. 海兵隊의 濟州道 移動
(5) 入校命令
해병대가 제주도로 이동한 직후 나는 해군본부로부터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과 육군참모학교 고급지휘반 과정에 입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초등군사반 입교일은 1월 6일이었고, 참모학교 입교일은 2월 1일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해병대 장교로서는 내가 제일 먼저 입교했던 교육과정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내린 입교명령은 초등군사반과 참모학교 과정을 3개월 간에 걸쳐 차례로 이수하라는 것이었는데, 초등군사반 입교일자가 워낙 촉박해 있었으므로 겨우 부대배치가 끝나는 상황에서 부대를 떠나야만 했다.
따라서 모든 일을 신 사령관에게 떠맡겨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는 1월 2일 해군본부에 들려 상급자들에게 입교인사를 들인 다음 입교식에 참석했다.
당시 육군초등군사반은 시흥(始興)에 위치한 육군보병학교 내에 있었다. 1948년 2월 21일 수색(水色)에 있는 육군 제1여단사령부에서 통위부(統衛部) 보병학교로 발족이 되었던 육군보병학교는 1949년 7월 1일 시흥에 있던 육군17연대 병사 내에서 개편이 되어 고등군사반과 초등군사반 외에 갑종간부 후보생과 포병간부 후보생 등 여러 과정을 병설하게 되었는데, 초등군사반에서 나는 군에 입대한 후 처음으로 미식(美式) 교육을 받았다.
1개월 간으로 편성이 되어 있던 교육과정을 통해 내가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화기학과 전술학 등이었고, 가장 인상이 깊었던 과목은 분대에서 연대에 이르는 대소 단위부대의 공방전과 야간에 실시했던 화망구성훈련 등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교육을 받으면서 내가 깊이 인식했던 바는 그러한 미식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육군의 대비(對備)였다. 육군에서는 1947년 7월부터 주한미군의 철수문제가 거론되고 주한미군의 장비를 이양받는 수원(受援) 문제가 화급한 일로 대두됨에 따라 일차적으로 각 연대의 병기장교들에게 실시한 Ml소총과 칼빈소총에 대한 조작 및 사격술 교육에 이어 1948년 6월에는 대구와 용산, 진해 등지에 훈련학교를 설치하여 경·중기관총과 박격포, 2.36인치 로켓포, 0.5기관총, 57밀리 대전차포, 105밀리 곡사포 등에 대한 교육을 실시했고, 1948년 7월과 1949년 7월에는 미식 교육·훈련의 도입을 위해 고급장교들을 미국을 유학시켜 우수한 교관요원들을 확보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러한 대비가 곧 6.25동란에 대한 대비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1946년 3월 해방병단(解放兵團)의 참위(소위)로 임관될 때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던 나 자신으로서는 1948년 1월 초순경 진해기지에서 받았던 그 함정 항해술 및 운용술 교육이 내가 받은 최초의 군사교육이었고, 또 그 교육과정을 통해 해군장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지식을 갖출 수가 있었지만, 내가 해병대 장교가 된 후 처음으로 받게 된 초등군사반 과정은 비록 과정이 짧긴 했으나 보병장교로 성장을 하게 된 나에게 있어서는 일생의 기초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것을 배우고 닦은 과정이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엄동의 날씨가 혹독하게 추웠던 초등군사반 교육기간 중 나는 광희동(서울시 중구)에 있는 나의 삼촌 집에서 시흥까지 매일 출퇴근을 하였는데, 그때 달리 차편을 이용할 사정이 못되었던 나는 나와 지면이 있는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양국진(楊國鎭) 대령의 지프차에 편승하여 불편없이 통학할 수 있었다.
그 때 승·하차를 했던 곳은 을지로 6가에 있는 계림극장 앞이었고 그 차에는 왕십리에서 통학하고 있던 이춘경 중령(육군)도 동승을 했었다. 그 후 양국진 대령은 소장의 계급까지 승진했다가 예편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지금도 그 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한편 2월 1일에 입교했던 육군참모학교는 용산에 있는 미8군기지 내에 소재하고 있었다. 1949년 7월 1일에 개설이 된 육군참모학교 고급지휘반과정에서는 사단급 이상 참모들과 연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을 대상으로 8주간에 걸쳐 미식 전술교리와 화기학 및 참모업무 등을 가르쳤는데 그때 보병학교를 거쳐 고급지휘반에 함께 입교했던 동문수학생들은 김홍일(金弘一) 장군을 비롯하여 원용덕(元容德), 강영훈(姜英勳) 장군 등 약50명의 피교육자 모두가 육군의 수뇌부 인사들이었다.
따라서 나는 그 교육과정을 통해 필요한 군사지식을 습득하여 내 자신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도 물론 큰 수확이었지만 그러한 소득 못지않게 유익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곧 그러한 분들과 배우며 안면을 익히고 또 인간적인 교분을 두텁게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때 그 분들과 맺었던 그 인간적인 교분과 유대는 6.25동란 때는 물론 오늘날까지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육군참모학교 입교식 날 육군참모총장 신태영(申泰英) 소장은 매우 감명깊은 훈시를 했었다. 사병들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라고 했던 신태영 총장은 사병들을 위하는 것이 곧 내 자신을 위하는 것이며, 사병들을 괄시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괄시하고 자신의 팔 다리를 자르는 일과 같다고 했는데, 사병제일주의를 강조했던 신태영 총장의 감명깊은 훈시는 지금도 나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인상이 깊은 카이젤 수염을 하고 있던 신태영 총장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일본군 대좌의 계급으로 8.15를 맞이했고, 광복 후 조국의 건군에 참여했던 군의원로 중의 한 분이었다.
그리고 강의를 들을 때 특히 인상깊게 여겨졌던 일은 인사, 정보, 작전, 군수 등 미군 편제상의 사단급 일반참모부서의 참모업무에 대한 강의를 미군 교관들이 통역관을 동반하여 직접 하고 있는 점이었다.
물론 번역이 된 교재를 가지고 한국군 교관이 강의하는 것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리고 불편스럽게 여겨지는 단점도 없지 않았지만 그들의 강의를 직접 듣게 된 피교육자들의 수강자세와 열의가 워낙 진지하고 높아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믿고 있다.
참모학교 강의실에는 한 가운데에 난로 한 대가 놓여 있었다. 난로 주변에는 반장을 맡았던 김홍일 장군 등 원로급 인사들이 앉아 있었고,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던 나는 난로로부터 멀리 떨어진 강의실 변두리 쪽에 앉아 있었는데, 조개탄을 태우고 있던 난롯가에 둘러앉아 간혹 노변잡담을 나누기도 했던 그 동문수학생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교육기간 중 어느 하루는 강의시간에 교관 자격으로 모습을 나타낸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 준장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했었다. 즉, 북괴군이 약 5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는데 만약 그들이 그 전차를 앞세우고 남침을 감행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고 물었더니 그는 한국에는 산악지대가 많고 현지에는 논이 많아 전차의 기동작전을 저해하기 때문에 북괴군의 전차는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결국 그의 그러한 판단오류로 말미암아 한국군은 대전차무기는 커녕 대전차 장애물조차 구축해 놓지 못한 상태에서 전차부대를 앞세운 북괴군의 기습적인 남침을 맞게 됨으로써 개전 초기의 그 참담한 패배가 기록되었다.
내가 육군참모학교에 입교한지 불과 수일 후인 1월 12일 에치슨 미 국무장관은 일본의 오끼나와와 필리핀으로 연결되는 태평양 방위선의 확보가 미국의 안전에 필수적이라는 요지의 연설을 함으로써 전략적으로 한반도가 미국에게 덜 필요하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결과가 되어 한국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고, 북괴로 하여금 미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오판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그날 그러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던 나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필시 숙명적인 전쟁이 일어나고야 말 것 같은 그러한 예감이었는데, 나로 하여금 그러한 예감을 느끼게 했던 것은 정부수립 직후부터 개시된 주한미군 철수가 1949년 6월까지 이미 완료된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던 북괴와 전후의 냉전을 주도하고 있던 소련이 필시 그와 같은 미국의 방위선언에 고무되어 전쟁을 도발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며, 그 해 6.25에 감행된 북괴군의 전면남침으로 적중이 된 셈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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