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초대사령관 신현준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6) 장면 박사와 나

머린코341(mc341) 2014. 7. 4. 14:41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6) 장면 박사와 나

 

  여기서 나는 1952년 11월 부산에서 영세할 때 대부가 되어 주셨던 장면 박사에 대한 회상을 해 보게 된다.

 

  나는 당시 유봉구 신부의 소개로 그 분을 알게 된 뒤, 단지 나의 대부로서만이 아니라 학자이자 지극히 민주주의적인 정치인이었던 장면 박사의 겸손하고 고상한 인격을 보고 매우 흠모하고 존경해 왔다.

 

  장면 박사는 1960년 9월 4·19 의거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에 세워진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그 분은 막중한 책임을 진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 하의 국무총리였기에 국사(國事)로 매우 바쁘고 힘든 나날을 보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장 총리의 부르심을 받고 찾아간 기회에,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군사 상황에 대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다. 그때 장 총리는 나에게, "내가 귀관에 대해 좋은 평을 많이 듣고 있는 터인데, 앞으로는 귀관이 우리 해군을 맡아서 지휘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즉, 그 분은 나에게 해군 참모총장직을 맡길 뜻이 있음을 밝혔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나는 "송구스럽게도 저를 그토록 특별히 생각해주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해군의 지휘를 맡아달라는 말씀을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나는 내가 해군에서 해병대로 전과한 처지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여 설명드렸다. 그러자 장 총리는 "신 장군처럼 벼슬을 주려고 하는데 마다하는 사람은 세상에 처음 보았다."라고 하면서, 유감스럽기는 하나 이 또한 아름답고 좋은 일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장면 총리와 나는 공적 신분을 떠나서 천주교 신앙으로 맺어진 대부(代父)와 대자(代子)의 관계였으므로, 그 뒤에도 나는 혜화동(惠化洞)에 있는 자택을 방문, 군사 문제에 관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다.

 

  이때 나는 총리실이나 자택을 막론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줄을 이어서 찾아오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다. 나 자신을 비롯해서 방문객들의 대부분이, 과연 장 총리가 그 막중한 국사를 처리해 나가는데 얼마나 큰 도움을 제공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장 총리가 어려운 당시의 국내사정 속에서 얼마나 고심하고 힘들게 일하는지를 목격하면서 동정심을 느끼기도'하였다.

 

  장 총리께 말씀을 드리는 동안에도 비서관이 계속 새로운 방문객이 찾아 왔다고 보고 드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 분이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될 정도였다. 장면 박사는 그 뒤 5·16 군사혁명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나 정계를 은퇴한 뒤, 오직 신앙인으로서 기도생활에만 전넘하며 조용히 사시다가 작고하셨다. 나는 그때 '역시 정치인이기 보다는 학자로서 사셨어야 할 분이었는데...'하고 생각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렸다.

 

 

처 : 예비역 해병중장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