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초대사령관 신현준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7) 네바다 주립대학으로 유학

머린코341(mc341) 2014. 7. 4. 14:44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7) 네바다 주립대학으로 유학

 

  1961년 7월 4일, 5·16 군사혁명으로 예편되어 현역에서 물러난 나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즉, 육군에서 전역된 세 명의 장군과 내가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 경비는 미국 정부측에서 부담(실제로는 대한(對韓) 군사원조비에서)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를 제외한 육군 출신의 세 장군들은 모두 5·16 군사혁명 당시 이른바 혁명 주체세력과는 반대편에 섰던 제1군 사령관 이한림(李翰林) 장군, 제1군 사령부 참모장 황헌친(黃憲親) 장군, 그리고 육군 사관학교장 강영훈(姜英勳) 장군(현 국무총리) 등이었다.

 

  결국 우리들은 1961년 8월 20일, 미군 군용기 편으로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우리가 공항에 나가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를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 내용은, 이 비행기가 무사히 떠나가는 것을 보아야만 마음이 놓이겠다는 것이었으니, 당시의 분위기를 알 만한 일이었다.

 

  결국 우리 일행은 무사히 김포공항을 떠나기는 하였는데, 각자의 행선지는 달랐다. 즉, 이한림 장군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강영훈 장군은 뉴 멕시코 주립대학, 황헌친 장군은 아리조나 주립대학으로, 그리고 나는 네바다(Nevada) 주립대학으로 각각 학교를 분리하여 배정받았던 것이다.

 

  내가 띠나는 것을 보기 위하여 나온 사람들 중에는 당시 주한 교황청(敎皇廳) 대사대리(大使代理)였던 몬시뇰 무똥(Msgr. Charles B. Mouton)과 골롬반외방전교회의 쿠퍼(Cuper) 신부가 있었다. 무똥 몬시뇰은 내가 무사히 출발하는지 확인하고자 일부러 비행장까지 나와서 말하기를, 이곳 서울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걱정하지 말고, 가서 학업에만 전념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또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쿠퍼 신부도 역시, 가족들은 자신이 책임지고 돌볼 테니 그렇게 알고 안심하고 떠나라고 말해 주었다. 쿠퍼 신부님은 우리 가족이 다니던 돈암동(敦岩洞) 본당의 주임신부이셨다.

 

  당시 나는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생계대책을 마련해 놓지도 못하고 떠나게 된 터라서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분 성직자께서 이렇게 우리 가족의 어려운 형편을 알아차리고 격려해 주자, 나는 물론 배웅을 나왔던 아내 혜룡도 그 분들의 호의와 배려에 대해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그 두 분은 내가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친히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격려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베풀어 주셨던 것 이다.

 

  이에 대해 우리 부부는 그 분들께는 물론, 이토록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께 대해 깊이 감사드렸었다.

 

  당시 47세였던 나는 6남매나 되는 어린 자식들을 아내 혜룡에게 맡기고 유학을 가게 되니 안타깝고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당시 우리가 의지할 것이라곤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뿐이었는데, 결국은 그 믿음을 통해서 구제의 손길이 미쳤던 것이다.

 

  나는 9월 개학 때에 맞춰서 미국 네바다 주립대학에 도착한 뒤, 일당(日當) 12불을 지급받아 기숙사비와 식비, 세탁비를 비롯한 잡비에 충당하는 가난한 학생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대학에서 수강한 과목은 정치학과 경제학으로서, 나는 1961년 9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 만 1년 간의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재학중에 나는 정치학 담당 교수로부터 학위(學位)를 받아볼 생각이 없느냐는 문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나는 염려해주셔서 감사하나, 자신은 정해진 기간 동안 청강생(聽講生)으로서 공부를 계속하겠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때 나는 그 교수의 친절한 권고가 고합기도 했으나, 서울에 남아서 어렵게 지내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할 때, 수학 기간이 더 오래 걸릴 학위 과정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1년 11월 20일, 당시 이른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이었던 박정희(朴正熙) 장군이 케네디 미 대통령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샌프란시스코를 들르게 되었다.

 

  이때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대학의 군사 담당 선임장교인 그레이(Grey) 중령이 나에게 이런 기회에 박 의장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권유하였다. 이에 대해 나는 "귀하의 권고는 고맙게 생각하오만, 나는 지금 학생의 신분으로 와 있는 처지이니 샌프란시스코에는 가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남들은 이런 나를 보고 고지식하다든지, 융통성이 없다든지 하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나의 생각은 한결 같았다.

 

  나는 평소 사적인 친분 관계를 기화로 공적인 면에서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앞서 장 면 총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지켜온 신념이었거니와 그 뒤로도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5·16 군사혁명 당시 반대편에 섰던 육군출신 세 장군과 나는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것 같다. 더욱이 흥미있는 사실은 타의에 의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4명이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이다. 아무튼 당시 우리 네 사람을 미국으로, 그것도 각기 멀리 떨어진 대학으로 입학하도록 조치하여 유학을 보냈던 것은, 이른바 혁명 주체세력에 의한 정치적인 조처였다고 할 수 밖엔 없었다.

 

  그러나 유학하게 된 사연이야 어떻든지 간에, 어렸을 때부터 배움에는 항상 의욕적이었던 나로서는 뜻밖에 갖게 된 배움의 길에서 얻는 기쁨이 더 컸었다.

 

 

처 : 예비역 해병중장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老海兵의 回顧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