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7. 統營上陸作戰
(3) 奇襲的인 賜動作戰
작전이 개시된 시각은 8월 18일 오후 6시경, 그러니까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신속하게 이루어진 기습적인 상륙작전이 아닐 수가 없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지도 동안에 대기하고 있던 소해정 512호와 FS평택호는 즉시 견내량(見乃梁) 수로 입구쪽으로 항진하여 상륙지점인 장평리로 향했다. 그리하여 두 척의 함정이 상륙지점 전방 접근이 가능한 해상까지 접근하여 닻을 내리게 되자, 이미 장평리에 도착하여 그곳 나루터에서 몇 척의 나룻배와 전마선(傳馬船) 등을 구해 놓고 있던 수색대 대원들이 그 배들을 끌고와서 병력과 장비를 옮겨 실을 수 있게 했다.
현재는 장평리와 그 대안(對岸) 쪽인 거제군 사동면 해안 사이에 1971년 4월에 준공된 거제대교(길이 740미터)가 놓여 있지만 그 당시엔 예로부터 있어 왔던 장평리 나루터와 그 대안 쪽의 나루터가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감행했던 견내량 해협은 임진왜란 때(1592년 7월) 70여척의 왜군(倭軍)이 들어섰다가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되어 전멸을 당한, 이른바 충무공의 한산대첩(閑山大捷)과 관련된 유서깊은 전적지인데, 특히 견내량 해협의 유속(流速)은 매우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병력과 장비의 하선 순위는 2중대를 선두로 3중대, 7중대, 화기중대, 본부중대 순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모든 대원들은 각자의 무기와 장비 등을 소지한 채 일단 그 수송선에서 흔들림과 요동이 심한 작은 배를 옮겨 타야만 했고, 그런 다음에 작은 배들의 노를 저어 상당 거리에 있는 장평리 해변으로 상륙을 해야 했으므로 몇 척의 작은 배를 번갈아 이용해서 더구나 밤중에 전 병력이 상륙을 완료하는 데는 약 3시간이 걸렸다.
상륙시기를 전후해서 나는 행여 적이 아군의 작전기도를 간파하여 상륙지점에 대한 기습공격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염려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만약에 그러한 일을 당할 경우 전멸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륙부대의 상륙개시 시간을 전후하여 기함(旗艦)인 703함과 307, 302등의 소해정은 양동작전 계획에 따라 적으로 하여금 아군이 통영항구 정면인 통영 남안(南岸)으로 상륙하는 것처럼 판단하게 하기 위해 그 남쪽 해안지대에 맹렬한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었는데, 어둠이 짙어지자 요란한 포성과 함께 섬광이 번쩍 번쩍 번득이고 있었다.
한편 그러한 상황 속에 맨 먼저 상륙을 감행했던 2중대는 원평리(院坪里)에서 그 남쪽의 덕골을 잇는 선으로 교두보를 확보하여 모든 후속부대의 상륙을 엄호했다.
그날 밤 부대본부 보급반에서는 인력이 부족해서 수십명의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보급품의 양육작업을 돕게 했다. 동원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50~60대의 노인들이었고, 약간 명의 여자와 중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쌀가마를 지게에 져 나르기도 하고 박격포탄을 운반하는 등 한밤중에 말 못할 고생을 했으나 우리 해병들이 내일 아침이면 통영읍에 쳐 들어와 있는 공산군을 다 때려잡게 될 것이란 말에 고무되어 아무런 불평없이 묵묵히 잡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전 병력의 상륙과 배에 실려 있는 보급품의 양육이 완료된 시각은 그날 밤 11시경이었다. 그러한 작업이 완료되자 다음날의 작전을 위해 부대를 전방으로 이동시켰다. 2중대와 3중대가 선두에 서서 전진하고 7중대와 화기중대 및 본부중대가 그 뒤를 따랐다.
수색대가 전방지대를 정찰하고 있었지만 언제 어느 방향에서 적이 공격해 올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부대이동을 하는데 있어서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만약에 그러한 단계에서 적에게 피격을 당하기라도한다면 아군의 작전은 그것으로 끝장이 날 수밖에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적의 수색대나 정찰대에 발각되지 않도록 중대장들에게 설사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절대로 소리를 내지 말고 은밀히 기동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하여 그날 밤 통영읍으로 가는 도로 우측방 고지의 능선을 따라 철야행군을 했던 2중대는 그 이튿날 19일 동이 틀 무렵 삼봉산(△246) 전방지대까지 진출한 다음 그곳에서 원문고개로 향하고, 통영읍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전진했던 3중대는 동암리(東岩里) 고지를 거쳐 동이 틀 무렵에는 화포리(花浦里)의 우측 능선지대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예비중대인 7중대와 화기중대 및 본부중대는 3중대의 뒤를 이어 계속 전진했는데, 새벽녘쯤 부대본부가 위치하고 있던 곳은 동달리(東達里)였다.
날이 밝자 간밤에 적정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아군의 양동작전이 성공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혹시 망일봉에 적이 그대로 배치되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며 예비대인 7증대를 3중대의 좌측방으로 전개시켜 급히 망일봉(望日峰)으로 올라가도록 명령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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