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7. 統營上陸作戰 (4) 望日峰의 奇襲占領

머린코341(mc341) 2014. 7. 27. 09:04

국방의 멍에 - 7. 統營上陸作戰

 

(4) 望日峰의 奇襲占領

 

  통영 시가지 동단(東端)에 우뚝 솟아 있는 망일봉(△148)은 통영 시가지와 항만지역 뿐 아니라 그 서북방에 있는 원문고개까지 완전히 감제할 수 있는 고지이므로 그 고지를 먼저 점령하지 않고서는 전쟁에 승리할 수 없는, 말하자면 승패의 관건이 되는 고지였다.

 

  그런데 7중대의 첨병소대가 망일봉 9부 능선까지 거의 다 올라갈 때까지 아무런 적정이 없는 것을 지켜 보고 있던 나는 드디어 작전이 성공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시가지쪽에 있는 적을 망일봉으로 끌어 올려 결판을 내고 싶은 생각이 나서 그러한 목적을 위해 화기중대장 한예택 대위에게 지시하여 약 10발의 81밀리 박격포탄을 시가지쪽으로 발사하게 했더니 그 포탄들 중 2발의 근탄(近彈)이 7중대 후미쪽에 떨어지는 바람에 7중대장 안창관 대위가 SCR-300을 통해 "7중대 다 죽이려고 이러느냐" 며 항의를 했다.

 

  그래서 나는 죽지 않으려거든 속히 올라가라고 재촉을 했는데, 그로부터 불과 몇 분 후, 7중대장이 미처 올라가기도 전에 망일봉 꼭대기에서는 요란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망원경으로 관측을 했더니 분명히 먼저 올라간 7중대의 첨병소대가 적을 요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광경을 살펴 본 나는 드디어 망일봉을 기습 점령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7중대장을 무전기로 호출하여 빨리 올라가서 전황을 보고하라고 재촉하는 한편 나 자신도 부대본부 참모들을 대동하고 망일봉으로 향했다.

 

  한데 그로부터 약 10분 후 계속 볶아대고 있던 총성이 멎는 듯 하더니 이내 7중대장 안창관 대위의 거친 평안도 음성이 무전기의 안테나에 와닿기 시작했다.

 

  "부대장님, 기뻐하시라구요, 우리 7중대가 서사면으로 기어 올라오는 북괴군 아새끼들 무수히 쏴 죽였소다." 하는 것이 보고의 요지였다. 그리곤 적이 또 공격을 해 올지 모르니 철저히 지키고 있겠노라고 했다. 그의 말소리는 흥분과 기쁨으로 합성된 목소리였다.

 

  7중대장으로부터 그러한 보고에 접하게 된 나는 성급하게도 이젠 이겼구나 하는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서 더욱 빠른 걸음으로 망일봉으로 접근해 가던 중 이번에는 원문고개에 배치되어 있는 2중대장 김광식 대위로부터 SCR-300을 통해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았다. 즉 잠시 전 통영 읍내로부터 외부로 탈출하기 위해 원문고개를 향해 질주해 오는 122밀리 소련제 박격포가 트레일러처럼 매달려 있는 소련제 지프차를 요격하여 그 차에 타고 있던 지휘관으로 보이는 군관 등 4명의 탑승자를 전원 사살하고 길 옆 벼논에 처박힌 그 지프차와 122밀리 박격포를 노획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보고에 접한 나는 지프차가 크게 망가지진 않았나 하고 물어보았더니 그런 것 같지가 않다고 말하면서 "대원들을 시켜 끌고 와 손을 봐 놓을 테니 시가지를 점령한 후 부대장님이 타십시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말을 들은 나는 얼마나 기했던지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 제주도를 떠난 후 단 한 번도 지프차를 가져보지 못했던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유용한 전리품(戰利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20분후 동천에 아침 해가 불끈 솟아오르는 바로 그 시각에 망일봉 꼭대기와 서쪽 사면 쪽에서 또 한 차례 요란한 총포성이 울리기 시작했는데, 잠시 후 무전기의 안테나를 거칠게 때리기 시작한 7중대장의 흥분된 보고에 따르면 재차 공격을 해 오는 적과 교전 중인데 이제 막 솟아 오른 아침 해에 눈이 부셔 달아나고 있는 적을 노루새끼들 때려잡듯 마구 쏴 죽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고에 접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승기(勝機)가 확실히 굳혀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망일봉 정상에 올라갔을 때는 아군의 일방적인 요격전이 이미 끝이 난 상태였고, 두 차례에 걸친 요격전이 벌어졌던 서쪽 사면 일대에는 무수한 적병들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7중대장의 상황보고에 의하면 첨병소대인 1소대가 망일봉 정상에 올라갔을 때 서사면 약 8부 능선까지 기어 오르다가 요격을 당했던 적병들의 수는 약 100명 정도라고 했고, 약 30분 후 재공격을 해 왔던 적병들은 약 70명 정도라고 했는데, 결국 그들 중 대부분은 사살이 되고 극히 소수의 병력만이 목숨을 부지하고 달아난 셈이었다.

 

  망일봉 정상에는 적병들이 파놓은 여러 개의 산병호가 목격되었다. 그러한 산병호를 목격한 나는 16일 아침 T-6기를 타고 망일봉 상공을 정찰할 때 적병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통제부 작전참모 김충남 중령의 말을 떠올리며 산병호를 파놓은 적병들이 그곳에서 자취를 감추고 없었던 것은 그 전날밤 아군의 양동작전에 속아 고지 아래로 내려간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의 그러한 생각은 빗나간 추측이 아닌 것 같았다. 후일 우연한 기회에 만난 북괴군 전사(戰士) 출신의 한 증언자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즉 1985년도에 나는 부산에 있는 거제리 교회(담임목사 김종환 목사)에서 6·25동란 때의 전쟁경험을 주제로 한 간증(干證)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내가 언급했던 통영상륙작전 얘기를 귀담아 듣고 있던 김봉운(金奉雲)이란 신도(1921년생 그 교회의 집사)가 간증이 끝난 후 자신의 과거 신분(북괴군 7사단 7중대 소속이었다고 함)을 밝히면서 나에게 한 증언에 따르면 그날 밤(18일) 통영 남안(南岸)에 포격이 집중되고 있을 때 통영 시가지에 위치하고 있던 인민군 부대본부에서는 망일봉에 배치해 둔 병력을 시가지로 끌어 내리자고 한 연대장과 그래서는 안된다고 한 대대장 사이에 심각한 언쟁이 있었다고 했고, 그러한 언쟁 끝에 결국은 "국방군 문제없어, 모든 책임 내가 지갔어." 라고 한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망일봉의 병력을 끌어 내리게 됨으로써 아군의 양동작전에 속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김봉운씨(平北 龍川郡 출신)는 자신이 포로가 된 경위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8일 밤 일부 군관(軍官)들이 배를 타고 도망을 갈 때 해변가의 솔밭에 숨어 있다가 고향사람인 일본군출신의 김명길씨(개신교 집사)가 다음날 아침 내의를 찢어서 만든 백기(白旗)를 흔들어 해변가를 수색 중인 아군에게 함께 투항을 하게 된 것이라고 했고, 진해로 후송이 된 후에는 며칠 동안 정보기관에서 심문을 받은 다음 약 1개월간 해군 정훈장교들의 안내로 해군 신병훈련소와 해군공작창 및 진해 시내에 있는 극장에서 군인들과 민간인들에게 북한의 실정과 투항을 하게 된 동기 등을 설명했고, 그 후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북한으로 강제송환될 뻔했으나 김명길씨와 함께 끝까지 반공포로로서의 투지를 관철시킨 끝에 마침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라고 했다.

 

  7중대장으로부터 그러한 상황보고를 받은 나는 703함 함장과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전령으로 하여금 총대에 태극기를 매달아 그것을 통영 앞바다를 향해 흔들어 대게 하여 해병들의 망일봉 점령을 신호했다.

 

  그날 아침 망일봉 동남방 한 폭의 동양화 같이 아름다운 한산도 근해해상에는 3인치 주포와 50밀리 기관총 등을 장비한 PC-703함과 37밀리포를 장비한 소해정 307·302·512호 및 FS평택호 등이 포진하여 지상군 부대의 작전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그 전날 밤 견내량 수도에서 상륙부대의 상륙을 엄호하고 있던 소해정 901호는 고성쪽으로부터 원문고개로 진입하는 도로를 제압하기 위해 원문고개 북쪽 해상에, 그리고 소해정 504호는 해상으로 도주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 원문고개 남서쪽 대망자도 옆 해상에 포진하고 있었다.

 

  한데, 전령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을 때 나는 703함과의 교신이 되지 않아 태극기가 보이는지 안보이는지 물어볼 수가 없는 것도 안타깝게 여겨졌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로 대두가 되었던 것은 사격지원을 받을 일이 막막했고, 또 해군본부에 타전하여 실탄을 보냈는지 알아보게 할 수도 없었고 또 진행 중인 작전상황을 해군본부에 보고할 수도 없었다.

 

  16일밤 내가 진해군항에서 출동할 때 즉시 추진보급을 해 주기로 한 탄약보급이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작전에 지장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전날 밤 보급관 이원혁 대위에게 FS 평택호의 무전시설을 이용해서 계속 알아보도록 지시를 해 두었는데도 그 시각까지 후방보급소에 있는 이원혁 대위로부터 아무런 보고가 없어 나의 마음을 조이게 했었다.

 

  그 당시 해병들이 보유하고 있던 M1소총의 실탄은 진동리 전선에서 쓰다 남은 불과 1기수 분 정도의 양밖에 되지 않았고, 또 기관총과 박격포 등 공용화기의 탄약 역시 극히 소량에 불과했다. 따라서 나로서는 해군본부에서 급히 수령하여 보내 주기로 약속했던 실탄이 언제쯤 도착하게 되는 건지 소식을 수시로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그런데 그러한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나는 7중대장 안창관 대위가 7중대가 모아 놓은 노획무기를 한 번 봐 달라기에 그가 서 있는 서사면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가는 도중 나는 7중대 장병들에 의해 사살당한 끔적한 몰골의 적병들이 도처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지점에선 7~8명의 적 시체가 옆으로 산개한 상태에서 나란히 누워 있는 것도 목격되었는데, 그들은 모두가 나이어린 소년병 들이었다.

 

  한데 체코식 기관총과 따발총 등 수십 정의 노획무기가 쌓여 있는 그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다른 소대장들과 함께 중대장 앞쪽에 서 있던 1소대장 이일용(李一龍) 중위가 '윽'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것을 목격했다. 시가지쪽에서 따쿵! 하는 총성이 들린 것으로 보아 저격을 당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별로 은폐할 곳이 없는 전사면이 위험한 것 같아 중대장에게 저격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한 다음 부상당한 1소대장을 고지위로 부축해 가서 후송을 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날 한 쪽 대퇴부에 중상을 입었던 이 중위는 부대본부 구호소를 거쳐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이 되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부상을 입은 그 한 쪽 다리를 절단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 3시경이었다. 703함이 바라보이는 망일봉 꼭대기에서 여전히 탄약 걱정을 하고 있던 나는 진동리지구 전투 때 마산에서 현봉학씨를 납치하여 데리고 왔던 백남표 소령(해군방위대 소속)이 나에게로 데리고 온 해군 정보요원(문관) 한 사람이 SCR-300을 휴대하고 있는것을 보곤 소속을 물어본 다음 무슨 일로 통신기를 가지고 이곳에 왔느냐고 했더니, 통제부사령장관의 특명으로 전황 보고를 위해 왔다고 말한 하사관(통제부 정보대 소속)은 자기가 SCR-300을 가지고 703함에 가 있는 이(李)모 대위(통제부 공보장교)에게 지상군 부대의 전황을 중개해 주면 같은 통신기(SCR-300)로 그 전황을 수신하여 703함의 통신시설을 이용하여 해군본부와 통제부에 타전을 하게 된다고 했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서는 그 정보요원이 마치 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위해 나타난 해결사와도 같은 생각이 들어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래서 나는 무전기가 제대로 작동이 되는지 물어본 다음 이(李) 대위를 호출하여 그가 현재 703함에 가 있는지 한 번 알아보자고 말하면서 그 정보요원으로부터 송화기를 받아 들고 "703, 703, 여기는 해병대, 여기는 해병대" 하고 호출을 해보았더니 과연 상대편에서 "해병대, 해병대, 여기는703, 무슨 말인가 오바!" 하는 말소리가 무전기의 안테나에 와 닿기에 내가 누구인지를 알린 다음 이성호 함장을 바꾸라고 했더니 이내 함장이 대화에 응하는 것이었다.

 

  함장과의 교신이 이루어지자 나는 어떻게나 기뻤던지 덩실덩실 춤이라고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먼저 태극기가 보이지 않느냐고 했더니 거리가 멀어선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해병들이 망일봉을 완전 점령하여 무수한 적을 사살했다는 소식을 전한 다음 해군본부로부터 탄약을 보냈다는 기별이 없었는가를 알아보고 아직 아무런 전갈이 없다기에 즉시 독촉전문을 타전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선 바로 발 아래에 내려다 보이는 남망산(南望山) 숲속에 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 몇 발 때려 보라고 했다. 남망산은 망일봉 서남쪽(태평동)에서 해면으로 반도처럼 뾰족하게 돌출해 있는 작은 고지이다.

 

  703함에게 5~6발의 3인치 포탄과 50밀리 중기관총의 실탄을 남망산의 숲속으로 집중시킨 것은 그로부터 약 30분 후였다. 한산도 근해에 위치하고 있던 703함이 약 2,000야드 거리 내로 접근하여 사격을 가하는 광경을 시종 쌍안경으로 지켜 보고 있던 나는 날아간 포탄들이 작렬하기가 무섭게 약 200명 가량의 적이 빽빽한 숲속으로부터 뛰쳐 나와 시가지로 달아나는 것을 보곤 멋있게 한 방 먹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성호 함장에게 그러한 상황을 통보해 주고 7중대로 하여금 그 적들에게 사격을 가하게 했다. 그때 나와 함께 있던 수색대장 김종식 대위와 통신대장 이두찬 중위, 인사부관 이영호 준위 등 부대본부 장교들과 통제부 방위대의 백남표 소령과 군의관 오원선(吳元善) 대위 등도 각자 소지하고 있는 총기로 열심히 쏘고 있었는데, 군의관 오원선 대위에게 내가 "후방에서 부상자나 치료할 일이지 왜 이런 곳에 와서 총을 쏘고 있느냐" 고 했더니 성미가 괄괄하고 남성다운 기질의 소유자였던 오원선 대위(후일 해군본부 의무감, 보사부장관 등 역임)는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 전투에서 이길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리고 703함이 포격을 한 직후 남망산 기습의 부둣가에서는 시커먼 연기와 불꽃이 피어 오르고 있었는데, 기름 탱크에서 일고 있는 듯 했던 연기와 불꽃은 그날 밤 늦게까지 꺼지지 않고 있었다.

 

  703함과 교신이 가능해지자 나는 SCR-300을 가지고 있는 2중대와 3중대 및 화기중대장에게 연락을 취하여 적이 숨어 있거나 집결해 있는곳을 알아본 다음 이성호 함장에게 정량동과 통영여중 뒷산 계곡을 사격해 달라고 요청했더니 잠시 후 그 목표지점에 포탄이 날아가서 작렬을 했고, 7중대와 화기중대에서도 그곳으로 박격포탄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당시 각 보병중대에는 60밀리 박격포 한 문씩을 가지고 있있고, 화기중대에는 81밀리 박격포 3문이 있었다.

 

  한편 아군의 포탄이 집중되고 있을 때 시가지에 대한 공격임무를 부여받고 있던 3중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으나 충렬사 뒷편의 178고지에서 적이 완강하게 저항을 하는 바람에 저지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한 상황을 보고 받은 나는 적이 원문고개를 차단당한 것을 알고 결사적인 저항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마침 703함에서도 포탄이 떨어져 더 이상 사격지원을 할 수가 없다는 통고를 해 왔기에 일단 3중대를 원위치로 철수시켜 탄약이 공급될 때까지 방어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703함 함장으로부터 탄약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시각은 오후 4시경이었다. 이성호 함장이 나에게 전한 바로는 탄약 뿐 아니라 진해에서 보낸 1개 중대의 증원병력도 함께 왔다고 말하면서 그 배를 마중하기 위해 통영 북방으로 두 차례나 작은 배를 보낸 끝에 가까스로 그 수송선을 찾아내어 현재 장평리 해안에 대기시켜 놓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일몰시까지 그 수송선을 장평리 해안에 대기시켜 두었다가 야음을 이용해서 7중대의 좌일선 소대가 배치되어 있는 망일봉 동남쪽 해안으로 진출시켜 탄약상자는 그곳에 양육시키고 1개 중대의 증원병력은 남망산 동쪽(약 100미터)에 있는 장자도(長子島)에 상륙시켜 부대장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도록 지시했다.

 

  각 중대에 대한 탄약 보급은 그 다음날 19일 새벽녘까지 계속되었다. 적정이 예상되고 있던 칠흑같은 밤중이었으므로 그만큼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때 해군함정으로 공급될 탄약상자는 탄약과 증원병력을 싣고 왔던 그 함정이 직접 운반해 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탄약 보급이 추진되고 있던 18일 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사실상 독안에 든 쥐새끼들의 운명과 다를 바 없는 적병들이 날이 새기전 바다쪽으로 해서 몰래 도망을 가 줬으며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인데 내가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은 그 다음날의 총공격때 가급적이면 우리 해병들이 피를 적게 흘려야만 그 이후에 전개될 원문고개 공방전에서 우리가 자신있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전사(戰史)를 머리속에 떠올려 보기도 했다. 즉 과거 노일전쟁(露日戰爭)때 탄약이 떨어진 것을 위장하여 심양성(瀋陽省一奉天)을 공략했던 일본군의 만주(滿洲) 파견군사령관 오오야마 이와오(大山巖夫)원수가 목표지역 전체를 포위하지 않고 궁지에 몰린 적(러시아군)이 쉬이 달아날 수 있는 도피구를 개방해둔 채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쉽사리 목표지역 전체를 점령할 수 있었던 그러한 전사를 되새겨 보면서 기도하는 심정으로 비록 해상으로나마 많은 적병들이 도망가 주었으며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