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1. 철수(撤收)
(1) 남(南)으로의 이동(移動)
11월 11일 마전리로 전진하게 되었던 3대대는 16일 양덕(陽德)지구의 미군과 연결하기 위해 그곳에서 다시 평원간 토로상의 교통요지인 동양리(양덕군)로 진출하여 날로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전황 속에서 고전을 치르고 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과 국군이 전면 철수를 단행 중에 있던 12월 2일 새벽 동양(東陽)을 철수하여 그 다음 날 원산에 도착했는데, 그 동양 철수작전 때 3대대장 김윤근 소령은 약 1,000명의 청장년들이 남으로 철수할 수 있도록 직접 간접 지원했다.
고성에 잔류하고 있던 1대대는 11월 27일 갈마(葛麻)반도로 이동하여 12월 3일 원산에 도착한 3대대와 그때까지 원산에 잔류하고 있던 소수의 미군병력과 연합하여 원산지구에 대한 방어에 임했다.
11월 30일이 되자 그간 목포에서 적 패잔병 소탕전을 벌이고 있던 2대대가 원산에 도착했다. 뒤늦게 원산에 도착했던 2대대는 즉시 함흥으로 이동하게 되고 12월 3일 신고산(新高山) 방면으로부터 함흥에 도착했던 5대대는 2대대와 함께 함흥지구에 대한 방어에 임하다가 그날(12월 3일)오후 흑수리(黑水里) 일대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채 철수 중에 있던 미 육군 7사단 7연대의 일부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검산령(劍山嶺)으로 이동했다가 이틀 후 다시 함흥 북방으로 철수했다. 12월 6일 지경(地境)으로부터 함흥 서남방으로 철수한 2대대와 함께 5대대는 함흥지구에 대한 방어에 임하다가 12월 14일 장진호 부대인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이 흥남 교두보에서 해상철수를 단행하자 15일 연포(連浦)비행장에서 미 공군으로부터 제공된 여러 대의 C-46 수송기에 분승하여 수영(水營) 비행장으로 철수했는데, 그때 사령부 제대(梯隊)도 같이 철수를 했다.
원산에 잔류하여 원산지구에 대한 최후의 방어에 임하고 있던 1대대와 3대대 가운데 2대대는 12월 7일 LST에 승선하여 함흥으로 북상했다가 다시 남으로 철수하게 되고, 1대대는 12월 8일까지 방어에 임하다가 9일대기중인 2척의 LST에 분승하여 남으로 철수했다.
그런데 12월 3일 5대대가 함흥으로 철수했던 그 시기를 전후해서 나는, 장진호(長津湖) 서남단의 작전상의 요충지인 하갈우리(下碣隅里)를 겹겹이 포위한 중공군 7개 사단의 포위망을 결사적으로 돌파하여 12월 11일 함흥으로 이동, 집결했던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 일부 병력의 하갈우리 돌파작전(11.28~12.6)과 계속해서 전개된 유엔군의 흥남(興南) 철수작전(12.14~12.24)을 위해 전개되고 있던 그 흥남교두보 차단작전을 놀라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야간의 경우 함흥지구의 하늘은 적진으로 날아가고 있는 포탄들이 포효하는 소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고, 지상과 해상의 포대(砲臺)에서는 쉴새없는 굉음과 화염이 일어나 말할 수 없는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 철수지원작전과 교두보 차단작전은 지상과 해상으로부터 간단없이 발사되고 있는 포탄과 공중폭격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공중폭격에는 미 해군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하고 있던 불사신의 투사와도 같던 그 미 해병대의 콜세아 전폭기가 주역을 맡고 있는 듯 했다.
결국 그러한 지원에 힘입어 하갈우리에서 포위를 당해 있던 미 해병 1사단 장병들과 미 7사단 장병들은 3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그 인해(人海)의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성공했고, 반면 그 포위작전에서 중공군은 5만명 이상의 병력을 상실당함으로써 흥남으로 철수하는 동부전선의 유엔군과 국군을 바다 속으로 몰아 넣으려고 했던 그 중공군의 전략적인 작전기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을 뿐 아니라 재기불능의 상태로 궤멸을 당한 그 임표(林彪)의 제5야전군을 만주로 철수시켜 재편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한편 해병들이 철수하고 있던 연포비행장과 원산항 부두에선 다음과 같은 슬픈 정경이 빚어지고 있었다. 즉 피난 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진 어떤 피난민 노부모는 "국군 아바이 동무들! 제발 내 딸자식 아이만이라도 데려가 주오" 하며 소리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국군 아바이 동무들! 우리를 버려 두고 가느니 차라리 죽이고들 가시라구요" "국군 아바이 동무들! 우리가 원하는 건 자유란 말이야요" 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적지(敵地)에서의 피난민 수송문제는 철군에 지장이 없는 한 특히 해상철수의 경우 그 일을 관장하고 있던 미군들에 의해 최대한으로 배려되고 있었지만 피난민들의 수가 워낙 많아 장병들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던 사람들, 예를 들면 죽음을 무릅쓰고 아군의 작전에 협조해 준 반공청년들이나 종교인 등 그들을 남겨 두고 올 경우 학살을 당할 그러한 사람들을 먼저 고려하다 보니 결국 적재공간의 제약 때문에 그와 같은 슬픈 정경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공중수송을 담당하고 있는 미 공군의 수송기는 한 두 대의 트럭과 약 30명의 병력을 실을 수 있는 적재공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날 내가 탑승했던 그 수송기에는 트럭 1대와 내가 타고 다니던 지프차 외에 이광희 소위를 비롯한 2~3명의 간호장교와 전령과 운전병, 그리고 자신이 의사라고 말하면서 만약에 남한으로 피난을 가지 못할 경우 가족들과 함께 몰살을 당할 것이니 제발 살려 달라며 애걸복걸하기에 미군 수송관들의 눈에 띄지 않게 군복을 입혀 태워 준 어린 두 자녀가 딸린 30대 전후의 젊은 의사 부부가 탑승하고 있었다.
해병대가 원산항과 연포비행장에서 철수를 할 때 항만과 공항 안팎에서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전쟁에서 손을 떼고 한국에서 철수를 할 것이라는 이런 루머가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미 공군기지로부터 급파된 수송기들이 철수하는 군인들을 싣고 가는 곳도 일본이라는 말도 나돌고 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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