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2. 재출동(再出動)
(2) 영덕(盜德)·안동지구(安東地區) 전투(戰鬪)
해병대가 안동·영덕지구로 출동을 했던 날짜는 1951년 1월 24일과 25, 26 3일간이었다. 당시 진해여고에 집결해 있던 독립 5대대는 1월 24일 아침 미 해병대에서 지원한 수십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안동으로 출동했고, 진해중학교에 집결해 있던 제1연대는 1월 25일과 26일 아침 3척의 미 해군 LST에 분승하여 진해 군항을 출항하여 영덕으로 향했는데 그때 신현준 사령관도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그날(25일) 해병 제1연대가 출동하던 진해 군항에는 통제부사령관 김성삼 제독을 비롯한 진해지구 해군단위부대장들이 나와 출동장병들을 환송해 주었고, 해군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부상병들도 간호장교들과 함께 나와 열렬히 환송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LST가 영덕에 도착하기 전 해상에서는 색다른 일이 발생하여 나를 몹시 곤혹스럽게 했다. 즉 연대본부와 함께 탑승해 있던 미 해병대의 고문단에서 갑판 위에 쌓아 놓은 상당량의 C레이숀이 박스만 남겨놓고 내용물이 죄다 없어져 버리는 바람에 헤리슨 중령이 당장 먹을 양식이 없다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수가 없었다.
어느 누구의 소행인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다 먹어치워 버리고 없는 C레이숀을 찾아 내기 위해 인쥐들을 색출하여 처벌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민망스럽기 짝이 없는 내 자신의 체면을 수습하느라 말할 수 없는 곤혹감을 느꼈으나 다행히도 그때 이미 영덕읍 바로 남쪽에는 미 해병사단의 11연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그 서쪽에는 미 해병 7연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고문단에 대한 보급품 지원은 쉽게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해병 제1연대가 상륙했던 지점은 강구(江口) 북방 4km 지점의 하저동(下猪洞) 해안이었다. 그런데 LST가 하저동 해안에 접안을 시도할 때 LST의 램프가 해변가의 사장에 닿지 않게 되자 내가 탑승했던 미 해군LST의 함장은 일단 선체를 2OO~300야드 뒤로 빼낸 다음 재차 접안을 시도해 보았다. 그런 다음 그렇게 해도 7~8미터의 겝이 생기자 그 다음에는 나로선 처음 보는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물론 여름철 같았으면 물이 가슴팎 정도까지 차 오른다고 해도 '웨트렌ELD'을 시킬 수가 있는 일이었지마는 때가 엄동이었는지라 '드라이렌딩'을 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 해군 함장이 취했던 그 비상수단이란 선체를 400~5OO야드 뒤로 빼낸 다음 일단 앙카를 투묘(投錯)하더니만 '올엔진 풀'로 가동시켜 해저에 박힌 그 앙카의 와이어를 계속 풀어가며 전 속력으로 해안으로 돌진을 시도하는 것이었는데, 결국 그러한 방법으로도 '드라이렌딩'을 시킬 수가 없게 되자 그러한 상황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지 미 해병대의 공병대대에서 운반해온 두 대의 불도저가 등장하여 5~6미터쯤 되는 램프와 해변간의 겝을 모래로 밀어 부쳐 메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불도저들은 거세게 밀어닥치는 파도 때문에 많은 지장이 초래되고 있었으나 끈덕지게 모레를 밀어부친 끝에 무사히 병력과 장비를 '드라이렌딩'시킬 수가 있었다.
연대본부와 고문단이 함께 탑승해 있던 첫번째의 LST가 병력과 장비를 하선시킨 다음 선체를 뒤로 빼내는 것을 지켜 보고 있던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LST의 함장이 투묘되어 있는 앙카의 와이어를 계속 풀어가며 해안으로 돌진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름대로 헤아려 본 그 이유란 빈 LST의 선체를 뒤로 빼낼 때 엔진을 완전추진(All back)으로 가동시킴과 동시에 앙카를 감아 재치는 것으로 미루어 해저에 박혀 있는 앙카로 하여금 선체를 끌어당기게 하는 인력작용을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연대의 전 병력이 상륙을 완료한 시각은 1월 3일 오전 9시경이었다. 상륙이 완료되자 부대를 영덕으로 이동시킨 다음 1월 31일 다음과 같이 부대를 배치했다. 즉 1대대는 연대의 중앙지역인 원전동(영덕 서북방 18지점)에 배치하고 3대대를 연대의 서측방 지역인 청송(靑松)에 그리고 연대 예비대인 2대대는 영덕읍 동측방에 대한 경계에 임하는 한편 1개 중대를 차출시켜 영덕재판소 건물에 지휘소를 설치한 연대본부를 방호하도록 했는데, 이와 같은 부대배치는 미 해병사단의 작전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2월 1일 수백명의 적 게릴라가 청송읍과 안동(安東) 어간에 있는 삼거리(三巨里) 일대에 출몰하여 민가를 습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게 된 나는 3대대장 김용국(金龍國) 소령에게 1개 소대의 병력을 삼거리로 보내어 적정을 확인하도록 지시를 했다. 그런 다음 2월 2일 미 해병사단으로부터 북괴군 10사단의 주력이 미 해병 7연대의 작전지역 내에서 집결하여 북으로 탈출을 기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예상되는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1대대와 3대대의 주력으로 길안천(吉安川)과 용전천을 중심으로 차단진지를 형성하고 적의 북상에 대비하고 있었으나, 2월 5일 2대대 6중대의 선임장교 김동준 소위가 지휘하는 증강된 1개 소대 병력이 2대대의 정찰지역 확장에 따르는 부대이동을 하다가 덕산동(德山洞-영덕군 달산면) 계곡에서 강력한 적의 협공을 받아 선임장교 김동준 소위를 비롯한 상당수의 대원이 즉석에서 사살을 당하고 화기중대로부터 배속받은 1개반의 기관포를 탈취당하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나는 2대대장 염봉생(廉鳳生) 중령으로 하여금 그 덕산동의 적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이미 항동(項洞-청송군 부동명)과 팔각산(△637) 일대까지 북상한 적의 주력을 섬별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 2월 7일미 해병7연대와 연합작전을 전개했다.
2월 7일 정오경을 기해 전개된 팔각산(八角山) 공격전에는 공정식 소령이 지휘하는 제1대대가 투입이 되었고 2대대의 주력은 연대 전방 CP가 진출해 있는 대지동(大枝洞)에 위치하여 1대대의 공격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1개 중대를 삼거리에 잔류시킨 3대대의 주력은 청송으로 이동하여 1대대의 작전지역을 인수했고, 이현동(청송군 부남면)에 배치된 미 해병7연대의 1개 대대는 팔각산의 동북방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단숨에 팔각산을 점령한 1대대는 그 다음날 적이 달아난 동대산(△793)을 공격 점령함으로써 사실상 영덕지구에서의 작전을 마쳤다. 작전을 마친 해병 제11연대는 명령에 따라 2월 13일 하저동(下猪洞)에 집결한 다음 14일 미 해군 LST편으로 묵호(墨湖)를 향해 출항하고, 미 해병제1사단도 2월 15일 작전을 마치고 중부전선으로 이동을 개시했다.
한편, 1월 24일 육로로 안동(安東)에 도착했던 독립 5대대는 미 해병1연대에 배속이 되어 정하동(亭下洞)에 지휘소를 두고 안동-의성(義城)간 보급로의 확보와 안동지역의 적 게릴라 소탕전에 임하고 있던 중 2월 3일 미 10군단으로 배속이 변경되어 열차편으로 영주로 이동, 영주(榮州)-점촌(店村)간 보급로의 확보와 적 패잔병 소탕전을 벌이다가 2월 13일 명령에 의해 신강구(新江口)에 집결하여 미 해군 LST에 승선하여 인천(仁川)으로 향했는데 인천에 도착했던 독립 5대대는 3월 중순경 김포지구(金浦地區)에 투입이 되었다.
한편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해병 제1연대가 영덕지구에서 작전을 하고 있는 동안 조병옥(趙炳玉) 내무장관이 영덕지구 전선을 시찰한 적이 있었다. 그날 몇몇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재판소 건물이 위치하고 있던 연대본부를 방문한 조 장관은 우리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과 수도탈환작전에서 빛낸 그 전공을 극구 찬양하면서 장병들의 노고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 조 장관은 대구(大邱)의 명운(命運)이 경각에 달려 있던 1950년 8월초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을 감통시킨 그의 명(名)연설과 불퇴전의 용기로써 대구의 위기를 극복한 명장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밖에 또 한 가지 언급해 두고 싶은 얘기는 미 해병고문단의 철수와 관련된 것이다.
2월 15일 해병 제1연대가 영덕지구에서의 작전을 마치고 하저동에 집결할 때 그때까지 연대본부에 파견되어 있던 미 해병고문단은 우리와 동행을 하지 않고 미 해병사단에 복귀하고 말았는데,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몹시 서운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느새 그들이 혈맹의 전우처럼 여겨지고 있었고, 또 전투를 할 때에는 풍부한 전쟁경험과 풍부한 물자와 장비를 가지고 전쟁경험이 부족한 우리 해병대를 정성껏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형제처럼 대해 왔던 그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그만큼 섭섭했는데다 새로 배속이 될 부대가 육군이고 보니 섭섭한 마음이 갑절 더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한편으론 1950년 7월 하순경 내가 지휘한 부대(김성은 부대)가 육군 서부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이 되어 남원, 운봉, 함양, 진주지구 전투와 진동리지구 전투 때에 겪었던 그 말할 수 없이 고생스러웠던 일들이 나의 뇌리를 스쳤다.
진동리 전투 때는 미 육군부대에도 일시 배속이 된 적이 있었지만 같은 해병대가 아니라서 그랬는진 몰라도 미국 해병들이 느끼게 해준 그 일체감 같은 건 도무지 느껴지지가 않았고, 또 믿음직스런 신뢰감도 우러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나는 육군에 배속이 되어 무슨 고생을 얼마나 하게 될지 알 수가 없어 내심 태산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으나 급할 때는 그때 이미 장군으로 승진돼 있던 신 사령관께서 힘이 되어 주리라 믿고 차라리 육군을 도와주러 간다는 각오로 부대이동에 대한 대비를 하기로 결심을 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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