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5) 중공군(中共軍)의 2次 대공새(大攻勢)
그런데 내가 전투단장으로 불임한 지 불과 일주일도 채 못되어 전투단 정면에서는 적의 공세징후로 보이는 여러 가지 징후가 나타나더니만 26일부터는 이일선 대대의 주저항선 우단에 있는 전투단 관측소(OP)(△155)를 비롯한 좌·우일선 대대의 전초진지에 대한 적의 맹렬한 파괴사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특히 붉게 타는 석양을 등지고 가하고 있는 직사포에 의한 그들의 파괴사격은 아군진지에 대한 관측이 더욱 용이해서 그런지 위력이 더욱 강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파괴사격은 나에게 공격준비를 통고해 주는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러한 징후를 날카롭게 분석해 보고 있던 나는 그러한 징후가 곧 적의 공세징후인 것으로 판단하고 다음과 같은 조처를 취했다.
즉, 중공군이 1차 공세를 취했던 10월 2일로부터 음력으로 계산하여 꼭 한달째가 되는 10월 31일 경에 재공격을 해 올 것으로 예상했던 나는 28일에 이르러 우일선 대대(3대대)를 40일로 예정되어 있던 부대교대 시기를 앞당겨 전투력이 약화되지 않은 예비대(5대대)와 교체시키기로 결심 을 했다.
그리하여 5대대로 하여금 10월 31일 새벽 3시까지 소총 1개 중대를 3대대에 배속시켜 3대대의 전초진지 3개를 인수하게 하고 3대대의 주저항선을 11월 1일 미명까지 접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명령은 30일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기 시작한 적의 포격과 우일전 대대의 전초진지인 31, 33, 39고지와 좌일선 대대의 전초진지인 50고지 주위에 출몰하기 시작한 적 정찰대의 활동으로 인해 전초진지를 인계·인수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제대로 시행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11중대의 전초진지를 그대로 둔 채 방어에 임하기로 결심을 굳혔던 나는 적의 공세가 임박한 것을 직감하고 31일 15대의 전차를 좌·우일선 대대의 제한점 부근으로 추진시키는 한편 전초진지 지원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도 강구했다.
한편 내가 판단했던 대로 중공군은 또 한 차례의 공세를 취했다. 공세를 개시한 시각은 31일 밤 10시 5분이었고, 투입된 병력은 1개 사단 규모였다.
적의 공격이 개시될 때까지 이루어졌던 부대교대는 3대대 10중대만 주진지를 5대대 53중대에 인계했을 뿐 31, 33, 39 등의 전초진지에는 11중대가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한 사정 때문에 나는 3대대 10중대를 53중대가 점령한 진지 후방에 배치하고 적의 반격에 대처하기 위해 52중대를 좌일선 대대 우측진지후방에 전개시키도록 3대대장과 5대대장에게 지시를 했으나 일단 내려져있는 부대교대명령은 취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일선 대대의 주저항선과 전초진지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5대대장 강기천(姜起千) 중령이 행사했다.
적의 공격은 1차 공세 때와 마찬가지로 대대적인 야포의 공격지원사격과 함께 개시되고, 야포의 지원사격은 정확히 15분간 계속되었다.
적이 공격을 개시하자 나는 포병대대(105미리)와 전차중대, 4.2인치 중박격포중대 등 전투단의 화력지원부대로 하여금 즉각적인 대응사격을 가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급히 미 해병사단에 연락을 취하여 지원사격을 요청 했다.
적의 예상접근로에 대한 탄막사격만 재대로 이루어진다면 전초진지 장병들은 반드시 진지를 고수할 것으로 믿고 있는 나였다.
대대적인 포격이 거의 동시에 교환되자 피아군의 포진지가 있는 상공은 붉게 물들고 있었고, 아군 전초진지 전방지대에서는 뇌성병력과도 같은 무서운 굉음과 폭음이 연쇄적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전투단 본부 상황실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상황을 체크하고 있던 나는 전초진지 장병들이 결사적인 감투로 적의 공격 1진을 격퇴시켜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편, 아군포의 대대적인 차단사격으로 적의 공격 1진이나 후속부대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기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황은 차츰 내가 기대하고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적 포탄이 전초진지 후사면으로 연신되기가 무섭게 벙커 속에서 뛰쳐 나온 전초진지 장병들은 진전으로 새까맣게 몰려 오고 있는 적을 결사적으로 요격하여 마침내 그 공격 1진을 통쾌하게 격퇴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자신감을 얻게 된 해병들은 계속될 적의 인해전에 대비했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한 동안 잠잠하다가 격퇴당한 그 제1진 공격부대의 펄사적인 재공격으로 한동한 처절한 진내전이 벌어졌으나 전초진지에 배치된 포병연락장교들이 박스인 사격(진내사격)을 요청하여 진지 안팎의 적을 VT탄으로 섬멸함으로써 끝까지 그 전초진지들을 고수했다.
그리고 그날 밤 김포지구로부터 사천강 전초진지 상공으로 날아온 항공기 한 대가 있었는데, 미 해병사단장의 요청으로 출동했던 미 공군기는 아군 전초진지 전방과 사천강 상공 일대를 비행하며 마치 공중에 빨랫줄을 치듯 주렁주렁 항공조명탄을 밝혀 아군의 작전을 지원했으니 참으로 인상깊은 광경이 아닐 수 없었고, 또 그 이튿날 새벽 2시경 적이 격퇴를 당하자 달빛 처연한 피비린내 나는 전초진지에서는 "나가자 해병대" 의 군가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지고 있었으니 너무나 감동적인 승전고가 아닐 수 없었다.
한편 그날 자정무렵에 이르러 나는 사단장 폴락 소장으로부터 전해진 다음과 같은 고무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예하부대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즉시 정보를 예하부대잠들에게 통보했다.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나에게 전해졌던 고무적인 소식이란 첫해는 미해병사단에서 보유하고 있는 155미리 포의 위험을 무릅쓴 과감한 대(對)포병사격으로 이른바 평화도로로 명명되어 있던 판문점-개성간 도로 근처에 방렬해 둔 중공군 포진지의 포탄집적소가 명중되어 수천 발의 포탄이 폭발을 하고 있다고 했고, 둘째는 증국인 정보요원들을 확보하고 있는 미 해병사단 정보처에서 중공군의 무선통신을 청취한 결과 포탄집적소의 폭발로 인해 장군 1명을 포함한 수십 명의 장병이 폭사를 당하고 공격부대에서는 "부사단장이 부상을 당했으니 속히 구급차를 보내시오." "공중에서 불벼락이 쏟아져 이대로 있다가는 전원 몰살을 당할것 같으니 날래 철수명령을 내려 주시라구요.“.”날래 증원병력을 보내주든지 철수명령을 내려 주시라구요.“, ”호포사격을 해 줄테니 재공격을 해 보시오.“,”기렇다면 동무가 나와서 해 보시라구요," 하는 등의 절박한 대화 내용이 포착된 것이라고 했으니 나로서는 중공군의 콧대를 납작하게 꺾어 놓을 수가 있게 되었구나 하는 속단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른바 평화도로로 명명되어 있던 판문점-개성간 도로 근처에 방렬해 둔 중공군의 포진지는 아군으로서는 눈의 가시와도 같은 것이었는데 사단장 폴락 소장이 위험을 무릅쓴 용기와 과단성 있는 결단력으로 그 포진지를 공격하게 한 끝에 그와 같은 전과를 거두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경 우일선 대대의 전초진지에서 3명의 중공군을 생포했다는 보고를 받은 나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포로들을 단 본부로 후송시키라고 했더니 그 이튿날 새벽 그 후에 생포된 다른 2명과 함께 후송을 해 와서 나를 더욱 기쁘게 했다.
포로들은 단 본부 정보참모실에서 간단한 심문을 마치고 곧 사단본부로 이송이 되었는데, 포로를 획득하지 못해 혈안이 되어 있던 그 당시의 처지로서는 큰 수확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날 새벽 설레이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남을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던 나는 동이 트자마자 수색대장과 전초부대장들에게 전과를 확인보고하라는 지시를 했는데, 약 1시간 후 좌·우일선 대대의 전초진지 안팎과 전방지대의 황량한 갈대밭 속에서 수백 구 적 시체가 널려 있다는 보고를 접하게 된 나는 얼마나 감격에 겨웠던지 솟구치는 흥분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4일간 수백 구의 시체가 흩어져 있는 전초진지 전방의 갈대밭에는 당일 밤에 미처 끌고가지 못한 시체들을 끌고가기 위해 투입된 소수의 중공군이 있었으나 아군의 포격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3~4명의 참모들을 대동하고 전투단 본부를 방문한 사단장 폴락 소장은 "KMC No. 1, 간밤엔 정말 훌륭했습니다. 중공군 포로들을 구경시켜 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커널 킴(Colonel Kim)의 말대로 이제 중공군의 콧대가 남작해졌겠지요?" 하며 승전 축하인사를 했다. 그리고선 뭣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원해 주겠다고 말하면서 만약에 내가 뚱eND해지기를 원한다면 사단의 쿡을 보내 주겠다는 말도 했었는데 그의 그러한 말은 그 이튿날 아침 식사 때부터 실행이 되어 고문단실 쿡으로 하여금 매일 아침 2인분의 양식을 단장실로 가져오게 했다. 쿡이 2인분의 양식을 가져왔던 까닭은 혼자 먹게 되면 행여 맛이 덜할까 해서 부단장과 같이 먹으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전투단의 부단장은 남상취(南相徵) 중령이었고, 그 후 남 중령은 오명복(吳命福) 중령과 교체되었다.
또한 그날 오후 미 해병사단으로부터는 전초전지를 보수하는데 필요한 축성자재와 일용품과 C레이숀 등을 잔뜩 실은 10여대의 트럭을 보내 왔는데 그러한 자재와 물품들은 즉시 전초진지로 보내졌다.
전투가 끝난 뒤 나름대로 장병들의 사기를 측정해 본 나는 중공군의 1차 추기공세 이후 말할 수 없히 침체되어 있는 장병들의 사기가 그날 밤의 승전으로 크게 고무되어 있는 것을 직감하고 장병들의 사기를 가장 확실하게 드높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전투에서 승전을 거두는 일이란것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4대사령관 김성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7) 표창장(表彰狀)과 감사문(感謝文) (0) | 2014.08.16 |
---|---|
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6) 김용호(金容鎬鑛) 소위(少尉)의 유서(遺書) (0) | 2014.08.14 |
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4) 작전지역(作戰地城)의 특성(特性) (0) | 2014.08.14 |
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3) 패인(敗因)의 분석(分析) (0) | 2014.08.14 |
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2) 재출진(再出陣)과 사천강 전초지대 (0) | 2014.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