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6) 김용호(金容鎬鑛) 소위(少尉)의 유서(遺書)

머린코341(mc341) 2014. 8. 14. 22:04

국방의 멍에 - 16. 재출진(再出陳)

 

(6) 김용호(金容鎬鑛) 소위(少尉)의 유서(遺書)

 

  한편 10월 31일 밤 2대대 7중대가 배치되어 있던 좌일전 대대의 전초진지인 50고지와 3대대 11중대가 배치되어 있던 우일선 대대(5대대)의 31, 33, 39고지 등 4개의 전초진지 가운데 50고지와 31고지 등 2개 전초진지에는 중대본부가 1개 소대의 병력과 함께 위치하고 있었고, 33, 39등 두 개의 전초진지에는 각각 1개 소대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1소대장 윤성식 소위가 지휘하고 있던 39고지에서는 밤 11시경 소대장과 신임하사관이 중상을 당하지 위생하사관 부경중(夫敬重) 하사가 살아남은 대원을 지휘하여 계속 사투를 벌였고, 3소대장 김용호 소위가 지휘하고 있는 33고지에서는 백병전과 진내사격 등 결사적인 분전으로 진지를 고수했으나 그 이튿날 아침 피아군의 시체가 참담하게 뒤엉켜있는 그 무덤 같은 고지 위에 중대장에게 전하는 유서 한 장을 써 놓고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결한 소대장의 시신이 발견되어 장병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희미한 달빛 아래 수첩 한 장을 찢어서 또박또박 만년필로 적어 놓은 유서에는 중대장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부하들을 죄다 잃어버린 죄책감 때문에 살아서는 중대장을 대할 면목이 없어 죽음으로써 속죄한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전투가 끝난 뒤 3대대는 11중대가 배치된 3개의 전초진지와 일부 점령하고 있던 우일선대대의 방어진지 모두를 5대대에 인계하고 예비대로 빠져나오게 되었는데, 예비대로 빠져나온 후 11중대장 임경섭 중위(예비역소장)는 화기소대장 이춘몽 소위를 김용호 소위의 부친이 거주하고 있는 경북 영천(永川)으로 보내어 고인이 된 김 소위의 부친에게 전사소식을 전하는 한편 중대장이 마련한 금일봉을 전하도록 했으나 두부공장에서 배달일을 하며 근근히 피난살이하고 있던 고인의 부친은 그 조위금을 중대를 위해 써 달라면서 굳이 받기를 사양했다고 한다. 1·4후퇴 때 장성한 세 아들과 함께 월남했던 김 소위의 부친은 군에 입대한 세 아들 모두를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불행한 전쟁난민이었다고 한다.

 

  그날 밤 11중대 장병들을 지휘하여 우일선 대대 전방에 있는 3개의 전초진지를 고수했던 임경섭 중위는 그날 밤의 혈전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감격스러웠던지 그 후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는데 현역시절에는 군대 내의 교회에서 예편 후에는 일반 사회의 교회에서 간증(干證)을 통해 자신이 겪었던 그 처절했던 혈전담을 소개하였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는데도 부하 장병들과 해병대를 위해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을 찾았고, 또 하느님께서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거두어 주셨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 예편 후 극동방송국의 부사장을 역임했던 임경섭 장군은 신앙인으로서도 존경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