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멍에 - 17. 휴전후 해병교육단(海兵敎育團)
(13) 가덕도(加德島) 사냥作戰
1955년 3월 중순경의 일이었다.
휴양차 진해 별장으로 내려와 계시던 이승만 대통령은 어느날 나를 별장으로 불러 조금은 이른 철이긴 했지마는 그 별장 앞의 유난히 청정한 바다에서 낚시를 즐기며 나에게 이런 분부를 하는 것이었다.
즉, 벤프리트 장군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진해에 올 터이니 미리 군인들을 풀어 멧돼지가 있는 곳을 찾아 포위하고 있다가 벤프리트 장군을 그곳으로 안내하여 군인들이 꾕과리를 쳐서 몰이해 준 멧돼지를 사냥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6·25동란 때 미 8군사령관을 역임한 적이 있던 벤프리트 장군과 이승만 박사는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낚시터에는 통제부사령장관 정긍모(鄭就模) 제독과 참모장 김충남(金忠男) 제독도 나와 함께 있었다.
하명을 받은 나는 그렇게 해 보겠다고 답변을 했으나 막상 계획을 세우려고 하니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멧돼지가 서식하고 있는 섬이나 산을 찾아내어야 할 터인데 그것이 어려운 문제가 되어 앞을 가로 막았기 때문이었다.
4월 10일경으로 예정이 되어 있던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때까지 약 1개월 정도의 시일이 있긴 했지마는 멧돼지의 서식처를 알아내지 못하는 한 계획 자체를 세울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이 박사의 낚시터에 배석해 있던 정긍모 사령장관과 김충남 제독을 만나 묘안을 궁리해 보았으나 도무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묘책이 떠오르지 앉자 누군가가 이런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즉, 우리 토종돼지나 주둥이가 긴 제주도 똥돼지를 한 두 마리 구해 가지고 작은섬에 갖다 놓고 군인들을 시켜 몰이를 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멧돼지와 돼지의 속성이 다를텐데 벤프리트 장군과 같은 노련한 사냥꾼이 사람을 보면 달아나기를 잘 하는 야생 멧돼지와 달아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반갑다고 따라 다니며 충충거릴지도 모르는 토종돼지나 제주도 똥돼지를 분간할 수 없겠는가 싶었고, 또 만약에 그렇게 했다가 실제로 야생돼지가 아님이 밝혀졌을 경우 그 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싶어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나는 결국 이러한 복안을 세웠다. 즉, 일단 멧돼지가 있을 만한 인근 지역의 야산이나 작은 섬을 답사해 본 연후에 다른 묘책을 강구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0여일 간의 답사 끝에 거제도 북동쪽에 있는 가덕도를 대상지로 선정키로 했다.
내가 직접 답사해 본 결과 가덕도의 깊은 산골에서 멧돼지들이 농작물을 파먹은 흔적과 말라붙은 멧돼지의 똥이 발견되었기도 했고, 또 우직스럽게 등을 부벼대며 껍질이 벗겨져 있는 소나무 등걸도 눈에 띠었다. 그리고 그 섬의 주민들도 멧돼지가 있다고 했고, 또 깊은 산중에서 멧돼지를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대상지역을 물색하게 되자 나는 곧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세웠다. 2,000명의 훈련병들을 동원해 가서 가덕도의 북쪽 절벽쪽으로부터 등대가 있는 섬의 남단으로 몰이를 해 와서 그 산 속에 있는 멧돼지를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게 하여 그것을 벤프리트 장군으로 하여금 선상에서 사냥하게 한다는 것이 곧 계획의 골자였는데, 만약에 몰이를 당한 멧돼지가 등대가 있는 낮은 곳으로 달아나지 않고 몰이를 하고 있는 군인들 쪽으로 거슬러 돌진해 갈 경우에 대비해서 나는 보급정비단에서 보유하고 있는 철조망 가설용 철주 한 개씩 가져오게 하여 멧돼지가 돌진해 올 경우 그 쇠막대기로 멧돼지의 주둥아리나 앞다리를 쌔려 갈려 생포하도록 했다.
그리고 몰이를 당한 멧돼지들이 등대가 있는 남단으로 내려오지 않고 벤프리트 장군이 타고 있는 배에서 관측할 수 있는 섬의 북단이나 좌우측방으로 내려가 바닷물에 뛰어 들 경우도 배제할 수가 없어 작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훈련병을 지휘할 훈련소장과 작전본부장인 내가 통신을 교환할 수 있도록 CSR-300 한 대씩을 가져가기도 했고, 또 만에 하나 작전을 했는데도 멧돼지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는 꿩 대신 닭을 잡는다는 말이 있듯 노루라도 사로잡아 고지 좌우측방에서 바다로 집어던진 다음 무전으로 연락을 취하게 하여 쾌속정을 타고 가서 사냥을 하게하는 등 나름대로 만반의 대비를 했다.
D데이는 해군사관학교의 졸업식이 거행된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그날 대통령 별장에서 주빈인 벤프리트 장군과 오찬을 같이 한 다음 나는 귀빈부두에 대기하고 있는 PT(어뢰정)에 벤프리트 장군을 모시고 가덕도로 갈 예정이었으나 이 대통령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하여 그 PT에 동승을 했고, 통제부 사령장관과 참모장 및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씨와 곽영주 경감도 함께 동행을 했다.
PT가 진해 군항의 귀빈부두를 떠난 시각은 오후 1시 30분경이었고, 가덕도의 남단에 당도한 시각은 오후 2시경이었다. 쾌속정이 목적지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이승만 박사는 나에게 여기가 어더냐고 묻기에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선들을 격파한 가덕도 앞 바다라고 했더니 그런가라고 하면서 이 섬에 멧돼지가 있는가라고 했다.
목적지에 당도하고 보니 그 섬 좌우 측방 해상에는 작전을 돕기 위해 해군에서 동원해 놓은 LCVP 한 척씩이 배치되어 있었고, 등대가 있는 섬 남단 기슭에는 이 대통령이 별장 앞 바다에서 낚시를 할 때 이용하는 전용 낚시배가 그 배의 사공인 이장수 노인(당시 60세 가량)과 함께 대기중이었는데, 노로 젓는 그 작은 낚시배는 이 대통령이 낚시를 하게 될지 몰라 해군에서 실어다 놓은 것 같았다.
현장에 도착하는 즉시 무전기를 작동하여 훈련소장(서정남 준장)을 호출해 보았더니 즉시 응답이 있기에 나는 모든 작전준비가 완료된 것으로 알고 훈련소장에서 즉시 몰이를 시작하라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대통령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즉, 어떤 식으로 멧돼지를 몰이해 와서 어디서 사냥을 하느냐고 했다. 그래서 산 위에 있는 군인들이 등대가 있는 섬 남단으로 몰이를 해 와서 기겁을 한 멧돼지들을 바닷물 속에 뛰어 들게 한 다음 쾌속정을 타고 가서 사냥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더니 대통령은 멧돼지를 바닷물 속에 뛰어 들게 한다는 말에 의문이 제기되었던지 옆에 있는 벤프리트 장군에게 혹 멧돼지가 물에 뛰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라고 물어 본즉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벤프리트 장군이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자 나는 결과도 보기 전에 일이 낭패가 된듯 싶어 초조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한편 벤프리트 장군에게 그런 말을 물어본 대통령은 갑자기 낚시 생각이 간절했던지 이장수 노인으로 하여금 배를 저어오게 하여 그 배를 타고 근처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산 위에서는 많은 몰이꾼들이 터뜨리는 요란한 소리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러한 소리를 귀담고 보니 마치 남양군도의 어떤섬에서 일어나고 있는 토인들의 축제(祝祭) 소리와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시작부터 제발 무슨 수가 생겨 나기를 바라며 몰이꾼들이 터뜨리고 있는 저 요란한 소리가 제발 행운을 가져다 주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여분 후 요란한 소리가 바짝 다가선 지점에서 뚝 멎어버리고 장막처럼 옆으로 길게 진을 친 쇠막대기와 깡통 등을 손에든 군인들의 모습이 눈 앞에 다가섰는데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쥐새끼 한 마리 물 속으로 뛰어 드는 것이 없자 나는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그 때 훈련소장으로부터 무전연락이 와서 절벽이 있는 섬 북쪽 고지 낭떠러지에서 바닷물 속으로 굴러 떨어져 헤엄을 치고 있는 멧돼지 한 마리를 LCVP에서 건져 올렸다고 보고가 있자 나는 그 멧돼지를 물 속으로 집어 던진 후에 보고를 하라고 지시해 놓고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만 드디어 수가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무전연락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더니 잠시 후 등대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는 곳에 비명을 질러대는 노루 한 마리를 들고 나타나 너댓 명의 군인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 밀집모자 차림의 이 대통령과 이장수 노인을 향해 "오-이, 이리 와서 노루 가지고 가" "야 임마, 빨리 와서 가지고 가!" 하며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나는 그만 아찔한 생각이 들어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군인들이 취하고 있는 기가 찬 언동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이 대통령이 낚시배를 저어 쾌속정 옆으로 다가오게 하더니만 나를 쳐다 보며 "김 장군, 이게 무슨 짓이야. 너희들 야유회 구경하러 온 줄 알아? 난 자네가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야만스러운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군 그래" 하며 노여움을 터뜨리자 나는 이제다 끝장이 나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바닷물 속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이 대통령이 영어로 말했던 야만인(Savage)란 말은 미군인들에게는 최고의 악담으로 쓰여지고 있던 말인데 그런 말이 나을 만큼 화가 나신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나는 일루의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훈련소장의 무전연락만 오게 되면 이 대통령의 노여움도 가시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처음 보고가 있은 시각으로부터 약 40분이 경과되었는데도 아무런 기별이 없자 나는 훈련소장을 호출하여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 알아 보았더니 그 멧돼지가 한사코 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바람에 2~3명의 LCVP 승조원들이 골탕을 먹고 있는 중이라고 했는데, 그로부터 10여분 후 이번에는 훈련소장으로부터 전갈이 와서 멧돼지를 물 속으로 끌어 넣었다고 하기에 지체없이 그 소식을 벤프리트 장군에게 전하고 현장으로 달려갈까 하다가 기왕이면 대통령도 모시고 가는 것이 좋을성 싶어 곽영주 경감에게 넌지시 각하의 의향을 알아보게 했더니 각하께서도 같이 가보고 싶다면서 쾌속정으로 옮겨 타는 것이었다.
한데, 멧돼지가 헤엄치고 있는 현장 부근에 당도한 벤프리트 장군은 멀찌감치 쾌속정을 멈춰 세워 놓고 전방에서 섬 기슭 쪽으로 사력을 다해 헤엄쳐 가고 있는 멧돼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뿐 그것이 사냥의 정도(正道)가 아니어서 그런지 총을 쓰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기진맥진한 멧돼지가 용케도 섬 기슭으로 기어 올라 허둥지둥 바윗돌이 널려 있는 곳으로 숨어 들려고 하자 그때 비로소 요동이 심한 쾌속정 위에서 방아쇠를 당겨 두 방 중 한 방을 멧돼지의 머리통에 명중시켜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장막처럼 진을 치고 시종 현장을 지켜 보고 있던 절벽 위의 군인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내며 환성을 터뜨렸고, 군인들을 바라보고 있던 대통령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김 장군 감옥에 안가게 되어서 다행이요." 하며 나에게 농담을 걸어 왔던 벤프리트 장군은 바다에서 멧돼지를 사냥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라고 말하면서 좋은 경험을 하게 해 줘서 고맙다고 했고, 경무대 경찰서의 곽영주 경감은 휴전 직후 이 대통령께서 야전군사령관 백선엽(白善燁) 장군에게 벤프리트 장군을 위한 멧돼지 사냥준비를 당부한 적이 있었으나 여건의 불비로 불발이 되고 말았었는데, 오늘 그 일이 성사가 되고 보니 김 장군의 천운인 것 같다면서 일진이 썩 좋은날이라고 했다.
그날 사냥작전의 종합적인 성과는 벤프리트 장군이 사살한 멧돼지 외에 몰이를 할 때 고지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대원들이 휘두른 철주에 주둥아리와 앞다리를 얻어 맞아 쓰러진 다른 한 마리의 멧돼지와 6마리의 노루를 사로잡았는데, 몸집 크기가 꼭 같아 쌍동이인지 부부 돼지인지 알 수 없던 그 두 마리의 멧돼지는 LCVP에 실려 왔지만 무참하게 때려 잡힌 6마리의 노루는 신병들이 떠나올 때 LST에 싣고 와서 훈련병들의 특식으로 제공이 되었다.
한편 쾌속정을 타고 진해로 돌아올 때 비서들이 보온병에 넣어가지고 온 커피와 과자를 나누어 먹으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나의 등을 가법게 두드리며 "김 장군 오늘 아주 잘했어" 하며 위로의 말을 했고, 또 그날 오후 몹시 화를 낸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LCVP로 운반이 된 두 마리의 멧돼지는 이 대통령이 상경할때 서울로 운반이 되어 수일 후 경무대(청와대)에서 주한 외교사절들을 초청해서 가든파티를 열 때 바베큐로 요리가 되어 귀빈들의 구미를 돋구었다고 하는데 야간에 열린 가든파티 석상에서 이 대통령은 맨프리트 장군과 가덕도에 멧돼지 사냥하러 갔던 이야기를 자랑삼아 꺼내었다고 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4대사령관 김성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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