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4대사령관 김성은

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18) 1·21사태와 정보오판

머린코341(mc341) 2014. 10. 2. 21:02

국방의 멍에 - 20. 國防部長官 時節

 

(18) 1·21사태와 정보오판

 

휴전선 남방한계선에 설치 중에 있던 철책 설치공사가 미 2사단 지역을 제외하곤 거의 완공단계에 이르렀던 1968년 1월 19일이었다.

 

금요일이었던 그날 아침 평상시와 같이 국방부로 출근을 했더니 김계원 육군참모총장이 긴급보고사항이 있다면서 나를 찾아왔었다.

 

김 총장이 휴대해 온 지도를 펼쳐 놓고 설명을 하는 바에 따르면 그 전날 18일 오후 2시경 경기도 파주군의 법원리 뒷산(삼봉산)으로 몇 사람의 나무꾼이 지게를 지고 올라갔더니 그 산에 숨어 있던 30명 가량의 무장공비들이 나타나선 나무꾼들에게 "미 제국주의에 억압을 받고 있는 남조선 국민을 해방시키러 온 인민군의 선발대" 라고 말하는 등 잠시 세뇌교육을 하고 나선 나무꾼들의 신원파악을 한 다음 그들이 가지고 온 공산당 입당원서에 서명을 할 것을 강요했고, 겁에 질런 나무꾼들이 마지못해 서명을 하자 손목시계 하나씩 선물로 주곤 일몰시까지 나무꾼들을 붙잡아 두었다가 어둠이 깔린 후에 잘 협력해 달라는 말과 만약에 경찰이나 군부대에 신고를 하게 되면 가족들을 몰살하겠다는 말을 하고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것이었고, 그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나무꾼들은 그 길로 인근 지역에 있는 경찰지서로 달려가서 신고를 하게 됨으로써 그러한 사실이 육군의 예하부대를 통해 그날 아침 총장에게 보고가 된 것이다.

 

그런데, 김계원 대장으로부터 그러한 보고를 받은 나는 먼저 그 무장공비들이 어디로 침투를 했고, 또 남파된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본 끝에 그들이 침투한 곳은 필시 철책을 설치하지 않고 있는 미 2사단 지역일 것으로 판단을 했고, 남파된 목적 역시 미 2사단의 통신시설이나 보급시설 또는 레이더시설 등을 파괴하기 위해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김계원 총장에게 6군단장 이세호 소장에게 연락을 취하여 6군단의 예비사단 등 동윈 가능한 약 2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도상거리로 측정해 산봉산에서 약 20㎞ 떨어진 벽제(碧蹄)의 대사리검문소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도로에 연하여 차단막을 형성한 다음 그 북쪽으로 전진하며 수색을 하도록 지시를 했다.

 

내가 그 도로에 연하여 병력을 전개시킨 이유는 첫째는 공비들의 침투목적이 미 2사단의 후방시설을 노린 것으로 판단을 했고, 둘째는 중무장한 행군부대의 1일간 행군속도를 24㎞로 알고 있던 나 자신의 상식으로 미루어 밤새 행군을 계속했다 하더라도 약 50리 길이나 되는 그 도로변까지는 내려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처럼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수색을 벌이게 했던 까닭은 미 2사단에 대한 보호의식과 가급적이면 서을근교의 민간인들이 다치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그 도로변에서 전개시킨 약 2만명의 병력이 철통같은 야간경계에 임하고 있다가 다음날 20일 아침부터 일몰시까지 서서히 북상을 하며 수색을 해 보았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며 계속 보고를 기다리다가 일요일인 다음날 21일 아침을 맞게 되었는데, 그날 아펀 일찍이 임충식 합참의장과 청와대에 가기로 약속을 해 놓고 있던 나는 과거 진해 앞바다에 있는 부도(釜島)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사슴사냥작전을 펼 때 제2선을 쳤던 일이 문득 생각이 나기도 했고, 또 불현듯이 청와대에 대한 염려가 생겨나 채원식(蔡元植) 경찰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약 3개 중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세검정과 우이동과 창동 방면으로부터 청와대 쪽으로 접근하는 접근로의 요소 요소에 분산 배치하여 철저한 경계를 해 줄 것을 당부하고 청와대로 떠났다.

 

그리하여 박 대통령과 아침식사와 점심식사까지 같이 하면서 수색상황을 보고 받고 있던 나와 임충식 합참의장은 별다른 상황진전이 없는 것 같아 오후 4시경 청와대를 물러나와 각자의 공관으로 돌아갔는데, 밤 10시경 느닷없이 청와대 쪽에서 요란한 총성과 폭음이 들리기에 급히 청와대로 갔더니 이미 세검정 근처에서 일어났던 총성은 멎어 있는 상태였고, 감기 기운이 있어 저녁 8시경 약을 복용하고 침실에 누워 있다가 그러한 총성을 듣게 된 박 대통령은 경호실을 통해 사방으로 전화를 걸어 상황파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청와대에 도착한 지 약 30분 후 맨 먼저 달려온 사람은 육군방첩대장 윤필용 소장이었고, 그 뒤를 이어 합참의장과 각 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 사령관 등이 도착을 했었다. 당시 효자동에 위치하고 있던 육군방첩대는 청와대 정문에서 약 1㎞ 거리 내에 있었다.

 

청와대에 도착한 윤필용 소장은 파악해 온 사건의 진상을 간략하게 보고했는데 그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즉, 그날 밤 9시경 누런 국방색 외투를 걸친 30명 가량의 군인들이 세검정 쪽으로 접근해 오기에 그 길목에배치되어 있던 약 20명의 경찰관이 플래시를 비추며 수하(誰何)를 하고 그 자리에 서라고 했으나 외투 아랫쪽에 따발총의 총구가 엿보이기도 한 누런 외투의 사나이들은 "육군방첩대야, 산에서 훈련을 하고 부대로 돌아가는 길" 이라고 대꾸하곤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경찰관들을 밀치며 계속 자하문 고개를 향하여 올라갔고 그들이 그런 직으로 고개 위로 올라가자 경찰관들도 그들과 함께 걸어오며 신원파악을 시도했다. 그들은 들은 척 만 척 20여분을 계속 걸어오다가 현장에 배치되어 있던 부하 경찰관의 긴급 무전역락을 받고 자하문과 청와대의 중간지점(청와대로부터 약 300미터)에 도착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헤드라이트를 켜 놓은 지프차 옆에 버티고 서서 "내가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인데 그 자리에 정지하여 신원을 밝히지 않으면 더 이상 접근시키지 않겠다" 며 정지명령을 했다.

 

헤드라이트의 강한 빛줄기 속에 노출이 된 때문인지 잠시 걸음을 멈춘 그들은 바로 그때 시내쪽에서 헤드라이트를 비치며 세검정쪽으로 질주해 가고 있던 시내버스 한 대가 서장 지프차 뒷쪽에 정차한데 이어 또 다른 차량 한 대가 그 뒷쪽으로 질주해 오자 차량들이 종로경찰서장이란 자가 자기네들을 때려잡기 위해 토벌대를 인솔해서 온 것으로 착각을 했던지 그들은 갑자기 외투 속에 감추고 있던 기관단총과 수류탄 등을 꺼내 지프차와 뒷쪽의 버스를 공격하곤 일제히 도주한 것이라고 했고, 목하 경찰병력과 군 병력이 동원되어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살인마로 돌변한 그들의 공격으로 그 자리에서 즉사한 최규식 총경 외에 경찰관과 버스에 타고 있던 민간인 등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했다.

 

윤 소장이 보고를 하는 동안 비록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으나 그들이 노린 곳이 어디였겠는가 하는 것을 불문가지한 일이었다. 따라서 윤 장군이 보고를 하기 시작했을 떼 나는, 만약에 오늘 아침 채원식 경찰국장에게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세검정을 비롯한 길목 요소 요소에 배치해 줄 것을 각별히 요청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섬찟한 느낌이 들었었다.

 

한편 그날 새벽 3시경 추격전을 벌이고 있던 서울 근교 30사단 지역에서는 아군의 포위망 속에서 수류탄으로 자폭을 기도했으나 수류탄의 불발로 자폭을 하지 못한 공비 1명을 (김신조) 생포하여 심문한 결과 군 수사기관에서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즉, 31명으로 편성된 일당은 전원 함경도 출신 위관급 장교들(지휘관은 대위, 부지휘관 중위, 나머지는 소위들)로 그들의 소속은 북괴 283군대 산하의 124군부대라고 했고,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2년간의 특수훈련을 받고 소련제 기관단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여 17일 밤 10시경 미 2사단 지역으로 침투하여 법원리 뒷산(삼봉산)에서 야숙을 한 다음 계속 그곳에 숨어 있다가 18일 오후 2시경 4~5명의 나무꾼들에게 발각이 되자 세뇌교육과 입당강요 및 시계 등을 선물하고 일몰시까지 붙잡아 두었다가 어두워진 후 그들과 헤어져 하룻밤에 80㎞(200리)를 주파하는 행군속도로 벽제의 대사리검문소에서 의정부로 나 있는 도로를 횡단하여 그 도로 남방 약 3㎞ 지점에 있는 노고산(老姑山)까지 내려와 야숙을 한 다음 그 다음날 20일 밤에는 세검정 서북방 약 5㎞ 지점에 있는 승가사 서쪽편의 비봉(碑峰)에 도착, 21l일 저녁 때가지 2일 간을 숨어 있으면서 야간에는 청와대에 이르는 접근로를 탐색하고 주간에는 현재 충무공 동상이 세워져 있는 광화문 일대를 내려다 보고 있다가 일요일 밤 8시를 기해 기동을 개시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31명으로 편성된 일당은 청와대의 정문과 현관의 입초순경 처치조를 비롯해서 청와대 1층 습격조와 2층 습격조, 수송부 습격조, 차량 탈취조 및 운전기사조 등 6개 조로 나누어져 있다고 했고, 임무를 완수하게 되면 차량 탈취조가 탈취한 청와대 차를 운전기사조가 몰고 차량으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다음 산을 타고 그날 밤 중으로 월북을 할 계획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소름이 끼치게 하는 작전계획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을 경악케 할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서도 그 소행을 남한내 반정부세력을 소행으로 떠넘기려고 획책하고 있었다고 하니 실로 가증스런 음모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김신조를 심문한 결과 북한에는 300명의 열성당원으로 편성된 124군 부대가 8개 조가 있다고 했고, 8개 조의 특수 비정규전 부대를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의 전 지역(각 도마다 1개 조씩)에 침투시킬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다고 했으니 실로 가공할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이상과 같은 주요 내용은 22일 오후 7시 군 당국에서 10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의 취재진 앞에서 김신조의 입을 통해 직접 밝혀져 매스컴을 통해 대서특필된 바가 있었다.

 

TV화면을 통해서도 보토된 기자회견 때 어떤 기자가 남파된 목적을 묻자 "내래 미 제국주의의 괴뢰 박정희를 죽이러 왔소다" 하고 거침없이 내뱉음으로써 시청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김신조의 살기등등한 인상은 지금도 희미한 화면과 함께 나의 기억속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기자회견이 있기 훨씬 전 군 수사기관으로부터 그러한 심문결과를 보고받은 나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그들이 침투한 곳이 더 좋은 방안을 연구한다면서 철책을 설치하지 않고 있던 미 2사단 지역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했으나 육군참모총장의 보고를 받고 6군단의 예비병력을 동원하라는 지시를 할 때 그들의 행군속도를 잘못 측정한 헤 대한 실수를 자인했다. 그때 나는 그들이 미 2사단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투입된 것으로 판단했던 것부터가 빗나간 예측이 되고 말았지만 중무장한 행군부대의 1일 간 행군속도를 24㎞로 알고 있었고, 또 사실이 그랬듯이 그들이 야간에만 산을 타고 기동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그 전날 18일 밤 그들이 삼봉산에 약 20㎞ 떨어진 벽제의 대사리검문소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그 도로변까지는 내려오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알고 보니 그들의 하룻밤 행군속도가 80㎞나 된다고 했으니 상상을 초월한 주파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22일 이른 아침 관계기관으로부터 김신조에 대한 심문결과를 보고 받은 나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 보면서 하마터면 국가에 큰 변이 일어날 뻔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들이 18일 오후 2시경 숨어있던 삼봉산에서 나무꾼들에게 발각이 되지 않았거나 발각이 되었을 때 나무꾼을 세뇌시키려 들지 않고 처치해 버렸다면 일이 어떻게 진전이 되고, 또 만약에 나무꾼들이 그들에게 세뇌를 당하거나 보복이 두려워 경찰지서에 신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 것이며, 만약에 그들이 D데이를 일요일(21일) 밤으로 정하지 않고 경찰병력이 동원되지 않았던 토요일 밤으로 택했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고, 또 종로경찰서장(최규식 총경)이 청와대에서 불과 300미터 정도 떨어진 길목에 버티고 서서 지프차의 헤드라이트를 켜 놓은 채 정지명령을 하지 않았거나 바로 그 시각에 그들에게 큰 위협을 준 시내버스와 다른 한 대의 차량이 그곳으로 질주해 오지 않았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정들이었는데, 그러한 가정을 해 본 나는 결국 그날 밤 박 대통령이 불행한 일을 겪을 운이 아니었고, 또 우리의 국운이 그러한 액마를 물리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도둑 하나를 파수꾼 열이 막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긴 하지마는 원주 야전군사령부에서 비상치안회의를 개최한 지 불과 10여일 만에 그토록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자 나는 국방장관으로서의 책임감을 통감했던 나머지 그 다음날 22일 아침 박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 나려고 했으나 박 대통령은 그들이 철책을 설치하지 않은 미 2사단지역으로 침투를 했는데 장관이 왜 책임을 지겠다고 하느냐며 사표를 돌려주고 사태수습을 하는 일에 신경을 쓰라고 했다.

 

그들에 대한 추격전은 예상되는 그들의 퇴로를 몇 겹으로 차단한 가운데 철저히 수행되었고, 반공의식이 투철한 시민들의 제보가 잇따라 큰 도움을 주었다. 김신조를 심문한 결과 그들은 임진강 철교가 있는 자유문교(자유의 다리) 좌측은 그 일대까지 조수가 밀려와 강물이 완전히 얼어붙지 않아 강물이 꽁꽁 얼어붙은 고랑포(高浪浦) 쪽에서 임진강을 도보로 건넜다고 하기에 비록 분산된 상태에서 도주하고 있으나 임진강을 건널 길목 만은 고랑포 쪽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또 그들에 대한 포위망을 압축시키고 있는 파주지구와 임진강 건너편의 장단지구는 6·25동란 때 해병 제1전투단이 작전을 했고 또 휴전 후에도 사단으로 승격된 해병대의 주력부대가 약 6년간 계속 파주지구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과거 제1전투단장으로서 작전을 지휘한 적도 있었고, 사단장으로 근무한 적도 있었던 나에게는 그만큼 지리에 밝은 지역이었다.

 

약 10일간 계속 된 추격전 끝에 아군 토벌대는 모진 목숨을 기적적으로 부지하고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단 1명을 제외하곤 도주 중에 있던 나머지 29명은 전원 소탕을 했으나 얼마나 철저하게 공산주의 사상에 세뇌를 당하고 얼마나 지독한 특수훈련을 받았던지 그들을 소탕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추격전에 동원된 아군측 연대장 1명이 전사를 하는 등 아군측 사상자 수가 10여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들은 특히 야생동물들의 방어본능과도 같은 위장도피술에도 능했지만 최후의 일각까지 저항을 하다가 사살을 당하거나 자폭을 했으면 했지 사로잡히지는 않겠다는 악착같은 투지를 지니고 있었다.

 

소탕전이 끝난 후 정부에서는 공비들의 출현을 신고했던 반공정신에 투철한 법원리의 나무꾼들을 표창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특히 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죽음을 무릅썼던 고 최규식 총경에 대해서는 1월 25일 고인의 장례식이 국립경찰장으로 엄수될 때 태극무공훈장과 경무관의 계급을 추서하고 고인의 거룩한 위국정신과 살신성인의 정신을 높이 현창했었다.

 

그리고 수류탄의 불발로 자폭을 하지 못한 채 생포를 당했던 김신조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듯 新朝라는 이름 그대로 사상적인 전향을 하여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인생의 아침을 맞으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1·21사태가 발생한 후 나는 여러 군사전문가들도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 있었지만 하룻밤 사이에 80㎞를 주파한다고 한 특수부대의 상상을 초월한 행군능력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불과 31명의 특수부대요원들이 대한민국의 수도 일각에 위치하고 있는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통령을 살해하려고 했던 행동의 대담성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해방 후 중국의 임시정부로부터 귀국했던 김구 선생이 1948년 김일성과의 정치회담을 갖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것은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는데, 한 핏줄을 타고 난 같은 조선인으로서 민족과 겨레의 장래를 진정으로 염원할 줄 알았던 김일성(그때 나이 36세)은 어이없게도 김구 선생이 항복문서를 가지고 자기에게 항복을 하러 왔다고 떠벌려 민족적인 지도자를 문전박대했던 일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내가 새삼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늘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또 마음만 먹으면 천인이 공노할 대담한 범죄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이 북한 공산집단이라는 사실을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 싶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미명을 기해 전면적인 남침을 감행했던 역사적인 사실을 비롯해서 그들이 기도했던 청와대 기습(미수)사건과 남침용 땅굴사건, 버마 아웅산사건, 국립묘지 폭파사건, KAL기 폭파사건 그리고 특히 핵무기개발사건 등이 입증해 주고 있듯 저들은 늘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 놀랍고 끔찍하고 어마어마한 일들을 남몰래 추진하고 꾸며 왔다는 사실을 역사의 교훈으로써 깊이 명심하여 특히 저들의 음모와 책략 또는 저들의 공격역량을 측정함에 있어 우리들 자신의 잣대로 측정하는 우를 철저히 배제하는 가운데 외교적인 면에서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인 면에서나 보다 철저하고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국방의 멍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