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10대사령관 김연상

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1회)-1

머린코341(mc341) 2015. 1. 6. 03:37

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1회)-1

 

기획시리즈 장군의 비망록 - 전 해병대 사령관 김연상 장군편(1회)

뉴스피플에 게재되었던 해병대 제10대 사령관 김연상 해병중장의 비망록을 정리하여 실어봅니다.

( ※ 글구성에 있어 관리자의 가감이 없음을 밝힙니다.)

★★★ 해병대 제10대 사령관 해병중장 김연상 장군의 약력 ★★★

■ 역임기간 : 1973.10.10 ~ 1975. 7.10
■ 생년월일 : 1927년 07월 16일(양력)
■ 출생지 : 경기 안성
■ 학 력
- 1949 : 해군항해학교 / 수료
- 1956 : 육군대학교
- 1960 : 국방대학원 / 수료
- 1969 : 미국해군상륙전학교 / 수료
- 1972 :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 수료
■ 경 력
- 1962 : 해병대사령부 작전교육국 국장
- 1966 : 해병 청룡부대 대장
- 1968 : 해병상륙전기지 사령관
- 1970 : 해병교육기지 사령관
- 1971 : 해병 제1상륙사단장
- 1973 : 해병대 부사령관
- 1973 : 해군 제2차장
- 1973 : 제10대 해병대 사령관(중장)
- 1975 : 해병중장 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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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 해병대/

얼룩무늬 번쩍이며 정글을 간다/

월남의 하늘아래 메아리 치는/

귀신잡는 그 기백 총칼에 담고/

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지키며/

삼군에 앞장서서 청룡은 간다]

한국해병을 상징하는 '청룡부대'의 대표적 군가다. 이 노래는 1965년 10월3일 부산항에 처음 울려퍼졌다.

파월임무를 띤 얼룩무늬 용사들이 군함에 승선, 배웅나온 가족과 연인들에게 이 노래를 부르며 필승을 다짐하는 장면이 전국에 생방송됐던 것이다.

청룡부대는 65년 10월 맹호부대 1진과 거의 동시에 월남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월남전에서 떨친 한국 해병의 용맹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수많은전투에서 '귀신잡는 해병'처럼 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일화는 너무도 많다.

金然翔장군(70 전해병대사령관).예비역 해병중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여 2대 청룡부대장을 지냈다. 그는 49년 4월 한국 해병대 창설때 산파역을 했으며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라는 말을 만들어낸 우리나라 해병역사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金장군은 또 일본군에 입대,태평양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으며 해방후에는 한국 해군으로 입대했다가 해병대가 창설되면서 해병간부후보사관 1기로 임관했다.

예비역 해병장성들은 金장군을 가리켜 "태평양전쟁 그리고 6.25와 월남전등 전쟁경험만 모두 7년을 쌓은 백전노장이다"면서

"그러나 그의 꼬장꼬장한 성격때문에 나서기를 싫어한다"고 말했다.

지난 2일 하오 인터뷰를 위해 서울 종로구 신문로의 金장군 자택을 찾았을때에도 '노장군'의 성격은 듣던 그대로였다.

金장군의 첫마디는 "얘기는 무슨 얘기를 해.기왕 왔으니까 잡담이나 하다가 그냥 가"였다.

인터뷰를 완강히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속하자 잠자코 듣고 있던 金장군은 평소의 '장군철학'을 피력했다.

"미국의 장성들은 말야, 현역에서 은퇴하면 텍사스 같은 곳의 따뜻한 촌가에서 지내.

거기서 평생 자신을 키워준 국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여생을 보내는 거지.

그리고 일본의 장군들은 말야, 군복을 벗고나서 고향을 찾아.

고향의 국민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남은 생애를 봉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거야.

그런데 우린 뭐야. 비자금이다 군사반란이다 뭐다 시끄러워. 그냥 조용히 지내는 것이 제일 좋아...

" 金장군은 또 맥아더가 남긴 말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를 잘 음미해 보라고 덧붙였다.

'장군의 비망록'에 출연(?)을 거듭 요청하자 그는 약간 귀찮다는 듯 장롱깊숙이 보관해 둔 원고더미를 꺼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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