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1회)-2
"이봐 기자양반. 이게 뭔지 아나. 내가 죽은 후에 발간하려고 그 동안 틈틈이 적어둔 나의 비망록이야.
이걸 보고 참고하려면 해" 깨알같이 적힌 육필 원고는 단행본 3권 정도는 족히 되는 분량이었다.
얘기는 자연스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군대에서 지냈던 기억을 먼저 떠올렸다.
192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그는 18세때 일본 해군으로 징발됐다. 파출소 주임이 누차 "일본군에 입대하라"고 종용하자 그는 육군보다는 해군이 좋을 것 같다는 어린 생각에 막연히 일본 해군을 지원했던 것이다.
이때가 1943년 가을.일본 규슈지방에서의 훈련은 시작됐다. 그러나 해군의 교육훈련은 비록 나중에 알았지만 육군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매우 혹독했다.
훈련기간은 10개월.매일 아침 저녁으로 30분씩 정좌한 상태로 정신교육을 받았고 하루도 빠짐없이 12인승 훈련선에 승선,항해거리 8km씩 노젓는 훈련을 반복했다.
그리고 매월 한번씩은 20km씩 노젓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또한 정신무장이라는 명분으로 매일 밤마다 야구방망이보다 좀더 큰 몽둥이로 5~10회씩 얻어맞아야 했다. 특히 '조선놈'이라며 더 힘껏 내리쳐 기절할때도 많았다.
金장군의 입대동기인 한 친구는 어느 날밤 몽둥이질 102차례나 당해 훈련기간중 가장 매를 많이 맞은 훈련병으로 기록됐다.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떡방아찧는 곳에서 떡 한개를 집어먹었다가 발각돼 교반장 4명이 교대로 두들겨팼던 것이다 (교반은 현재의 분대개념으로 1개 교반에는 12~15명의 교반원이 편성돼 있었다).
지옥같은 10개월의 훈련기간을 모두 마치고 44년 9월 처음으로 실전배치 명령을 받았다. 계급장도 없었고 정확한 목적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전세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金장군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일본군 정예군인 수만명이 남태평양 해상에서 고스란히 수장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44년 9월초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일본은 기울어가는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만주 관동군 정예요원들을 모두 일본 규슈 서쪽해안에 집결시켰다. 필리핀과 사이판 등 최후의 격전지로 알려졌던 남태평양 섬기지에 보낼 병력들이었다.
1만t급 수송선 40척이 항구밖에 대기해 있었다. 金장군이 처음 실전배치 명령을 받은 것도 이때였다. 드디어 그해 9월9일 40척의 배가 일제히 출발했다. 이가운데 20척은 병력수송용이고 나머지 20척은 무기와 탄약 등 병참 수송용이었다.
3일뒤 새벽 3시쯤 대만을 지나 필리핀해역으로 막 진입할 때였다. 金장군은 마침 비번이라 내무반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 "야 밥먹어라"하는 것이었다. 잠에서 깬 그는 예감이 이상해 갑판위로 뛰어올라갔다.
미군함정이 나타났다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곧 '꽈꽝'하는 폭음과 함께 갑판위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미군이 쏜 어뢰가 명중됐던 것이다. 같이 항해중이던 다른 수척의 배에서도 불길이 치솟았다. 배가 두동강이 났고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金장군은 바닷속으로 몸을 날렸다.
다행히 파도는 거칠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만져보니 다행히 로프와 칼이 있었다.
당시에는 누구나 다 허리에 10m 길이의 로프와 잭나이프를 차도록 돼있다. 갑작스런 침몰에 대비한 최소한의 구명기구였다.
그는 로프를 이용, 바다위에 떠 있는 나무조각들을 연결했고 간신히 그곳에몸을 의지할 수 있었다.
사방에 치솟았던 불길도 가라앉고 주위는 어느 새 칠흑같은 어둠으로 변해버렸다. 살려달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올 뿐이었다. 근처의 배가 대부분 침몰한 것 같았다. 갑자기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다.
상어밥이 안되면 배고파서 죽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고향에 계신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고 슬퍼지기 시작했다.
일본군에 입대했다가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상어밥이 됐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통탄스러울까. 그는 강하게 마음먹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했다. 얼굴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타고 왔던 배의흔적은 찾을 수가 없고 나무조각에 의지한 채 구조를 기다리는 병사들 몇몇이 눈에 띄었다.
이미 많은 시체들이 바다물결 흐름따라 맥없이 출렁이고 있었다. 자신도 곧 저렇게 되겠지 하는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그렇게 바다위에서 10시간이상을 버텼다. 운명의 여신은 결코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다행히 뒤따르던 구조함에의해 그는 구조됐다.
첫번째 죽을 고비를 넘겼다.하루를 지나자 필리핀 마닐라항구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 모두 40척이었으나 도착한 것은 10여척에 불과했다. 대부분 미군의 어뢰공격을 받고 바닷속으로 수장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1만t급 배 한척에 수천명씩 승선한다고 가정했을 때 적어도 2만~3만명의 일본군 정예부대가 태평양 바닷속으로 고스란히 가라앉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金장군은 이를 두고 "만약 그때 미군의 공격을 받지 않고 예정대로 증원군이 각 일본군기지에 도착했더라면 일본군의 버티기작전은 조금 더 길어졌을것"이라고 말했다.
金장군은 일본해군시절 모두 네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두번째는 44년 11월15일 마닐라의 일본군기지가 함락당하기 직전이었다.
마닐라해상에서 미군어뢰공격으로 또 한차례 격침돼 12시간을 표류하다가 구축함에 의해 구조되었다.
세번째는 45년 2월11일 사이공인근 해상에서 미군 항공편대의 집중공격을 받아 격침되어 4시간여 표류끝에 월남 캄란만에 내던져졌고, 네번째는 45년 3월15일 월남 광나이성밖 공해상에서 또 다시 미군 전투기들의 집중공격을 받아 배가 격침됐던 것이다.
다음편-3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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