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1회)-3
이때에는 스스로 헤엄쳐서 해안에 상륙함으로써 살 수 있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때 당도한 곳은 광나이성 남쪽해안으로
이때부터 20년후인 66년부터 2년간 청룡부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전투를 벌이게 된다.
계속되는 조난과 구조....金장군 스스로도 자신의 목숨이 끈질기다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 해군내에는 조난을 몇번 당했느냐에 따라서 선후배를 가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金장군의 회고.
"...우리가 마닐라에 도착하자 마닐라의 거리는 볼품없는 일본인 패잔병들로 가득 찼다.
침통한 표정으로 거리를 순찰하는 일본군 사령관도 똑똑히 볼수 있었다.
미군의 대폭격이 이루어지던 날 나는 다행히 마닐라 성당에 피신해 있어서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이때 나는 위안소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본군들을 직접 목격했다.
나는 또 필리핀에 있을 때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하기도 했다.
생사의 갈림길은 그야말로 종이 한장 차이라는 걸 수 없이 느꼈다..."
전쟁 종료가 임박했음인지 45년 8월초 조선인들을 별도의 집결지에 모이도록 했다.
金장군은 글을 좀 읽을 줄 안다고 해서 조선인 숙영지에서 서무를맡았다. 계속되는 金장군의 회고.
"...내가 해방을 맞은 것은 중국 남단의 어느 한섬에서였다.
패망한 일본군인들은 대부분 떠났지만 우리는 몇개월동안 계속 조선인 숙영지에 대기해 있었다.
중국군인들이 와서 우리에게 먹을 식량이며 보급품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군인들은 우리를 최상의 군기술자로 취급했다.
기관총 등 무기만 다룰 줄 알아도 중대장 대대장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우리 동기생중 2명이 중국군 중대장에 뽑혔지만 지금까지 생사를 알 길은 없다.
우리가 귀국선을 탄것은 46년 6월이었다.
부산항에 도착할 때에도 많은 콜레라환자가 발생,물속에 던져지기도 했다..."
약 3년만에 고국땅을 밟은 金장군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데 고향집에 가보니 자신은 이미 전사자로 처리돼 있었다.
해방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가족들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과 함께 고향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처음에는 경찰에 지원할까 생각했으나
일제때 받은 인상때문에 포기하고 군입대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48년 8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각군에서는 군경력자를 특채형식으로 뽑는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金장군등 일본 해군출신 15명은
해군에 입대할 것을 다짐했고 49년 1월1일 경남 진해로 내려갔다.
입대조건은 형식적인 단기교육만 받고 바로 임관한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처음 약속과는 달랐다.군당국과 해군지휘부간에 생긴 갈등으로 하는 일 없이 세월을 허송하고 있었다.
그러던 49년 4월 신병 1기생을 모집했으니 시범적인 교육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金장군 등은 3개월간 처음 모집된 해병신병들에게 항해학 등 기본교육을 시켰다.
49년 7월 金장군등은 해병간부후보사관 1기생의 자격으로 육군사관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게 됐다.
이때 육사는 9기생들이 입교해 있었다.
이듬해 1월 金장군은 대한민국 해군으로 정식 임관했다. [계속]
다음편 2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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