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 1진의 기억 -(2) 해병이 되다 - (최고의 해병교관 장한영 중사)
1964년 9월, 3학년 1학기를 마친 뒤 주위를 돌아보니,
모두들 졸업 후 취업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는데 나는 여전히 학비와 숙식 해결을 위해
가정교사 자리를 전전해야 될 형편이라,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싶었고,
어차피 가야 할 군대이니 한 3년 갔다 오면
형편이 좀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에 입대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육군은 아무때나 징집이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가더라도 육군은 가지 않을 참이었다.
오기였다. 어줍잖은 오기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육군은 아니고 - 해군,공군은 36개월이나 근무를 해야 한다니 - 해병대로 가는 거다.
그래서 후암동 해병대 모집을 담당하는 곳을 찾아 갔는데
그 때도 응모 비율이 대략 4-5대1 - 서울에서 그 경쟁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신체검사 때문에 ------
학교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해 봤더니 가벼운 치질이 있다는 것 아닌가.
한번 해병대가 가고자 먹은 마음은 나를 고향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해간 18기, 중위로 제대하고 고향 면장으로 계시는 외삼촌을 찾아가 부탁을 하기로 했다.
촌놈이 1962년 1월에 처음 올라 와 시작한 서울 생활, 입주 가정교사, 시간제 가정교사로 전전하며 자취에,
친구의 기숙사에 얹혀 살기도 했던 3년 반의 서울 유학을 일단 정리하고,
청량리 역에서 출발하는
저녁 기차를 타고, 가까운 학우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미리 입영전야를 연출했다.
그 날 저녁 청량리 역에 울려 퍼진 -“이별의 노래”,
“서편의 달이 호숫가에 질 때에
저 건너 산에 동이 트누나
사랑 빛에 잠기는 빛난 눈동자에는
근심 띄운 빛으로 편히 가시오.
친구, 내 친구, 어이 이별할거나
친구, 내 친구, 잊지마시오.”
그 화음이 43년이 지난 지금 새삼 귀에 쟁쟁하고, 청량리 역 구내에서 서서히 떠나는 기차와
플랫폼에 남아 손을 흔들면서 멀어졌던 친구들 모습이 영화처럼 눈에 선하다.
외삼촌과 함께 포항으로 가서 응모했는데,
3대1의 경쟁을 뚫고 외삼촌의 청탁(?) 덕분에 간신히 해병대 입대가 허락되었다.
1964년 9월28일 포항역을 출발, 대구를 거쳐 그 날 저녁 진해 신병훈련소에 도착했고,
또 다시 훈련소에서 신체 검사를 하여 불합격이면 돌려보낸다는 기간병의 공갈에 또한 번 맘을 조렸다.
“군인의 길”과 “직속상관 관등 성명”
(대통령 박정희, 국방부 장관 김성은, 해군 참모총장 이맹기, 해병대 사령관 공정식 등등) 이런 것을 외우기도 하고,
이윽고 머리를 박박 밀기위해 이발소 앞에서 기다리면서
“앉아 서 50번!” “앉아 서 100번!” 부터 시작하여 훈련 받을 준비를 한 뒤,
드디어 1964년 10월 4일,
해병 진해 신병훈련소 158기의 2개 중대 8개 소대의 약 600여명이 입대 선서를 하고,
바야흐로 2개월 훈련에 돌입했다.
(입대선서 이튿날인 10월 5일에 기념사진을 찍었네요.)
내가 알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해병대, 나의 교관 장한영 중사!!
(하사에서 우리가 훈련 받는 기간중에 중사로 진급했다.)
(1964년 10월30일, 천자봉 구보(건각행군)을 마치고 장한영 중사님과, 왼쪽은 동기생 김수흥(고대 재학중 입대)
168cm의 아담한 키와 - 기계체조로 다져진 딱 벌어진 어깨에 부리부리한 눈.
-- 나는 신병 훈련소의 loud speaker다!! -- 하고 지를 때의 우렁찬 목소리.
그는 하사관 교육대 최우수 졸업자로, 동기생 임대지 중사와 같이 선발되어
미국 해병대로 유학, 미해병 신병 교육 과정과 미해병 하사관 교육 과정을
모두 수료하고 돌아와, 한국 해병 신병 훈련소 교관으로 부임했다.
그래서 이따금 미 해병대식 구령이 튀어 나왔다.
목에 착 달라 붙은 소리로 -“레흐 라이 레흐 라이(left, right)-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미 해병대가 붙여 준 그의 별명은 “cherry bear(새끼 곰)”.
영화 “사관과 신사”에 나오는 미국 신병 훈련소의 교관 모습을 상상하시기 바란다.
테가 큰 둥근 모자를 쓰고 소릭를 꽥꽥 지르면서 기합 빠진 신병들을 조련하는 모습.
해병대 훈련이 힘들고 어렵기로 이름 났지만 그것도 교관 만나기 나름.
장한영 중사가 우리 소대 교관이었던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그는 매사 원안(소위 SOP-standard of procedure)에 충실하고자 했고,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원시적 관행을 탈피하고자 적극 애를 썼다.
추호도 치사한 짓 안하고(소대장은 더러 얻어 먹기도 하고 얻어 쓰기도 했다.)
야비하고 무식하게 때린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하지않았다.
그러나 규율은 엄격했고 쪼그려 뛰기, 팔굽혀 펴기(push-up), 오리 걸음에 선착순 돌리기는
사실 24시간 내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하는 체력단련 코스였다.
(쉼터 박물관 자료의 - 해병 훈련소 순검 시간은 사진 만으로도 짜릿합니다)
이런 교관 아래서이니 나는 날마다 신바람이 났다.
전혀 힘든 줄 모르고 무슨 일이든지 선착순으로 해 냈다.
“장애물 통과" - (줄 잡고 개울 건너뛰기, 징검다리 통과, 벽 차올라 넘기, 타잔 스윙등),
30초로 통과, 기록을 세웠고 담력과정도 제1번으로 자원, 거뜬히 해 치웠다.
고공 로프에 거꾸로 매달려 내려오기. 당근 내가 자원했다.
이 코스는 위험하여 내가 시범만 보이기로 했다.
그 때 장한영 교관은 당번병을 시켜 자기 가죽 장갑을 가져 오게하고 나보고 끼고 하라고 줬다.
마치고 나서 보니 장갑을 끼지 않았더라면 손바닥이 다 까질 뻔 했었다.
6-7미터 높이의 기둥 위로 올라가
와이어 로프 10여 미터를 거꾸로 매달려 내려 오는데 중간 쯤에서 힘이 다 빠져 버렸다.
그 때 장한영 교관이 -
“모두 구령 부쳐!” 하고서는 “하나, 둘!”을 일제히
외치게 하여 가까스로 거기 맞춰 내려 올 수 있었다.
멋진 해병,
장한영 교관님, 꼭 한 번 뵙고 싶습니다.
출처 : 파월 제1진 청룡부대 2대대 해병158기 이장원 선배님의 월남전 참전수기
'아! 청룡이여 제1권 캄란에서 호이안까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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