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10대사령관 김연상

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4회)

머린코341(mc341) 2015. 1. 7. 17:07

장군의 비망록 해병사관 1기생 김연상 장군편(4회)


“ 얼마전 서울시내 모처에서 해군. 해병대 예비역장성들이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이 모임에 물론 金然翔장군도 나갔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시국문제쪽으로 옮겨졌다.

 

최근의 비자금사건과 12.12 5.18처리 등 일련의 국민적 관심사에 대해 저마다 한마디씩 건넸다.

 

이 자리에서 오고간 대화의 골자는
○군장성들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는 점과

○사건을 조속히 수습해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북한의 오판에 따른 전쟁 발발의 위기를 예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정정치군인들 탓으로 전체 군인의 위상이 흔들려서는 결코 안된다는 얘기였다.

 

또 참석자들은 대부분의 예비역장성들이 현역시절은 물론 퇴역후에도 군의 명예를 지키며 청렴하게 살고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金장군은 이같은 모임의 분위기를 전한 뒤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전국적으로 해병전우회 회원은 100만명이 넘는다.

육.해.공군에서는 저마다 ‘회관’을 두고 있지만 유독 해병대만은 없다.

우리 해병대는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고 6.25때 서울을 수복한 명예가 있지 않은가.

설령 해병회관은 못짓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9.28서울수복기념관’이라도 건립해 교육차원에서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또 100만 해병전우들에게 더 없는 사기진작이 될 것이다."

 

金장군은 또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때 일어나는 것이며 그리고 또 일어난다고 할 때는 일어나지 않는 법” 이라면서 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이 현재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할 때라고 강조했다.

 

金장군은 태평양전쟁과 6.25참전 등으로 전쟁이 지긋지긋해서 한때 군복을 벗고 평범하게 지낼 생각도 했으나

주위의 만류도 있고 해서 계속 군에 몸담아 끝까지 군인의 길을 걸었다.

 

무인은 전장을 피하지 않는다.또 피하고 싶다고 한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金장군은 66년 12월 또 다른 전장인 월남땅으로 가야 했다.

 

이보다 앞서 金장군은 65년 1월 대망의 별을 달게 됐다.

 

64년 12월초 어느 날이었다.

 

거듭되는 격무에 그날따라 몹시 피곤했던 金장군은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 저녁상을 물린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마음이 영 놓이질 않았다.

 

내일은 장군심사가 있는 날. 생각 같아서는 영향력이 있는 상관집에 찾아다니면서 ‘잘 봐달라’고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청춘을 전선에서 불사르며 앞만 보고 살아온 외곬 성격이라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번에 별을 달아주지 않으면 해병혼의 본때를 보여주고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는 오기가 발동했다.

 

金장군은 전년도에 이른바 5.16주체세력들에게 밀려 일차년도 진급대상에서는 제외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런저런 생각으로 방안에 누워 상념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평소 가끔 단골로 드나들던 요정의 마담 목소리였다.

 

청승맞게 누워 있지말고 술이나 한잔 하고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돈이 없다고 하자 오늘은 특별히 자신이 한잔 내겠으니 걱정말고 나오라고 보챘다.

 

金장군은 차라리 잘됐다 싶어 부인한테 “”진급 운동이나 하고 오겠다””고 둘러댄 뒤 요정으로 내달렸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마담이 갖은 교태를 부리며 반갑게 맞았다.

 

이윽고 술판이 벌어졌고 기생 여럿이 시중을 들었다.

 

혼자서 이들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잘도 받아 마셨다.

 

춤도 추고 실컷 마셔댔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고 보니 머리맡에 술상이 놓여 있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마담을 불렀다.

 

몇시냐고 물었다. 이튿날 하오 1시였다.

金장군은 불현듯 걱정이 앞섰다.

 

벌써 진급심사가 끝났을 시간이었다.

 

에라모르겠다싶어 북어국에 해장술 한잔을 곁들였다

 

.마담이 옆에 다가오더니 해장술로 한잔 더하자고 꼬드겼다.

 

자신의 속도 몰라주는 마담이 야속하기만 했으나 인정에 이끌려 金장군은 몇잔 더하고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이때 金장군의 직책은 해병대사령부 작전교육국장. 金장군은 용산에 있는 사령부로 갈 생각을 했으나 일단 교남동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에 돌아오자 식구들이 ”어디 갔다가 오느냐”며 金장군을 반겼다.

 

부인의 얼굴에는 희색이 가득했다.

 

그제서야 金장군은 진급이 됐구나 생각하며 ”어이구 말도 마라. 밤새 진급운동하느라 혼이 났다”고 넉살좋게 능청을 떨었다.

 

이듬해 1월 金장군은 대망의 장군진급을 하던 날,

 

대부분 다른 신참장성들이 그러하듯이 별판을 단 지프를 타고 서울시내를 한바퀴 돌았다.

 

장군으로 진급한 뒤인 66년말 金장군은 제2대 청룡부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하게 됐다.

 

그의 월남전 참전은 생애 세번째로 전장에 참가하게 되는 것이었다.

 

金장군은 다른 지휘관들보다 1년이 더 많은 2년동안 정글에서 적들과 싸워야 했다.

 

金장군은 청룡부대장 취임때부터 화제를 뿌렸다.

 

취임식날 미해병대장군 한명이 참석했는데 金장군한테 다가오더니 ‘촌뜨기’라고 놀렸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는 “”취임식에 철모쓰고 권총찬 모습이 영락없는 촌뜨기””라는 것이다.

 

그의 말인즉 장군은 전투지역에 나갈 때나 철모를 쓰는 법이지 평소에는 온화한 모습을 장병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취임식 직후 적에게서 받은 첫인사도 고약했다.

 

취임한 지 얼마 안되어 1개대대본부 병력이 이동중 적의 습격을 받았다.

 

적에게 완전히 고립되는 위기일발의 순간을 맞았던 것이다.

 

이때 金장군은 미해병대 용사들의 육탄전과 무장헬기에서 쏘아대는 기총소사 등의 지원에 힘입어 가까스로 포위된 대대본부 병력을 구출해 냈다.

 

그런데 여기서 안타깝게도 10여명의 아군이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피가 역류하는 듯한 분노에 치를 떨던 金장군은 비장한 각오로 보복작전을구상했다.

 

감히 귀신잡는 해병의 자존심을 건드리다니.가만히 당하고만 있을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온 작전이 ‘짜빈동전투’였다.

 

이 ‘짜빈동전투’는 세계전사에도 기록되고 있다.

 

당시 ‘짜빈동’은 월남 중북부의 광나이성 추라이인근에 위치해 있었으며 월맹군과 베트콩을 잇는 주요 무기보급로였다.

 

여기에 청룡부대 1개 중대병력(11중대)이 적들과 대치해 있었다.

 

金장군은 예하부대를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전투력을 점검했다.

 

그러는 한편 11중대 병력을 은밀히 철수토록 명령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연막이었다.

 

병력을 빼내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실제로는 짜빈동에 화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중화기 등을 비밀리에 증강했다.

 

金장군은 또 청룡부대에 파견나온 월남장교들에게 11중대의 철수사실을 은근슬쩍 유포하고 이같은 얘기가 적들에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유도했다.

 

이를 눈치챈 월남군 장교는 “”짜빈동에 적이 집결하는 기미가 있는데 왜 병력을 빼돌리느냐””고 의아해 했다.

金장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작전이 착착진행되고 있었다.

 

金장군은 11중대장 정경진대위를 극비리에 불러 “”적이 곧 쳐들어올 테니 기습전을 준비하라””고 단단히 일러놓았다.

 

그리고 주위 포병부대에도 이같은 사실을 알렸다.

 

겉으로는 중대병력이 철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청룡부대의 모든 화력은 ‘짜빈동’으로 향해 있었다.

 

67년 2월14일 밤. 드디어 기다리던 적의 공격이 감행됐다.

 

아군병력이 일부 빠져나간다는 것을 알고는 때를 놓칠세라 대공세를 취해오는 것이었다.

 

적어도 11중대의 병력보다는 10배정도 강한 전투력이었다.

 

유인책에 걸려든 이상 작전대로 적을 섬멸하는 것만 남았다.

 

金장군은 우선 대기해 있던 주위 포병부대에게 명령,

 

적이 접근하기 쉬운 곳에는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무조건 포사격을 가하도록 했다.

 

예상 침투로에는 아군 병력을 비워둔 상태였다.

 

이와 동시에 항공부대에 긴급히 연락해 아군진지를 중심으로 사주방어선 밖을 무조건 맹폭케 했다.

 

일시에 포사격과 전폭기공격을 받은 적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때를 맞추어 金장군은 무전기를 들고 직접 11중대장을 불러 선전을 독려하면서 ”시간을 끌면서 해가 뜨기 전까지 적의 대형을 지리멸렬시키라”고 명령했다.

 

기다리던 11중대 병력들은 다단계 매복공격을 가했다.

 

특히 적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탄약고 매복조들은 일시에 공격을 감행, 탄약고를 노리던 적들을 순식간에 궤멸시켰다.

 

주위는 비오듯 쏟아지는 포탄의 섬광과 11중대 병력들의 집중사격으로 대낮같이 밝았다.

 

덫에 걸려든 적들은 처음에는 완강히 버텼으나 결과는 뻔한것이었다.

 

참으로 치열한 전투였다.

 

늦은 저녁부터 시작된 처절한 전투는 날이 샐 무렵이 되자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적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나머지는 삼십육계도망을 쳤다.

 

金장군은 서둘러 헬기를 타고 격전의 현장에 도착했다.

 

참상이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다.

 

金장군은 이때 마침 종군기자로는 유일하게 조선일보 목사균기자가 따라붙어 독점 취재의 행운을 누렸다고 기억했다.

 

현장의 참혹한 시체들 곁에서 ‘억억’ 소리내어 통곡하던 목기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현장은 아직도 연기가 걷히지 않은 채였다.

 

화약냄새와 피비린내가 어우러져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게다가 아침이 되면서 비까지 내려 이 일대는 마치 혈하를 방불케 했다.

 

아군측 전사자는 모두 15명이었다.부상자들은 헬기로 후송됐다.

 

그런데 밤새 치열한 전투를 벌인 탓인지 멀쩡한 병사들도 온전치가 않았다.

 

모두가 얼이 빠졌는지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金장군은 진중에 널려진 적의 시체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모두 253구였다. 대단한 전과였다.

 

어느 새 미해병대사령관 월트장군도 도착했다.

 

월트장군은 월남 북위 17도선 비무장지대 책임자였다.

 

그런데 월트장군은 여러 참모들과 함께 적의 시체를 둘러보면서 ‘원더풀’소리와 함께 계속 미소띤 모습을 지었다.

 

이 판국에 무슨 웃음이람. 머뭇거리던 金장군도 월트장군의 웃는 모습을 보고는 덩달아 ‘원더풀’을 연발했다.

 

이때 시체옆에서 ‘억억’거리며 울고 있는 목사균기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획품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더욱 놀란 것은 적의 화염방사기.

 

적은 아군의 탄약고를 폭발시키기 위해 화염방사기를 동원했던 것이다.

 

탄약고 전체가 시커멓게 그을려 있는 것으로 봐서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탄약고는 대폭발을 일으키고 말았을 것이다.

 

아군 1개 중대병력이 순식간에 날아갈 뻔했던 위기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金장군은 중대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지휘본부로 복귀했다.

 

밤새 잠을 못자 잠시 눈을 붙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외신기자단 수십명과 월남군본부 요원들이 참관차 청룡부대를 방문한다는 전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金장군은 참모들에게 뒷처리를 맡기고 잠을 청했다.

 

金장군은 꿈에서 중대장 등 짜빈동전투에서 전과를 올린 장병들이 태극무공훈장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다.(계속)

 

출처 : 뉴스피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