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사17기 오창근

해병대 생활중 에피소드(12) 과거는 멀리 흘러 갔습니다.

머린코341(mc341) 2015. 1. 25. 05:58

해병대 생활중 에피소드(12)

 

과거는 멀리 흘러 갔습니다.

저는 1965년초에 진해 모 해병부대 어느 장군의 전속 부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부관으로 가겠다니 대대장을 비롯한 여러 선배 장교들이 많이 말리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선 고생스러운 김포 최 전방에서 떠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도망치듯 후방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모시던 장군의 사모님은 대단한 분으로 서울서 내려오시던 어느날, 처음 상면하러 상남역 까지 마중나간 중위 부관에게 찦차 뒷자석에 타라고 명령을 하신 분입니다.


저는 군용 찦차에 부인이 앞에 타시면 보기도 안좋으니 뒤에 타셔야 한다고 억지로 뒷 좌석으로 모셨으니 첫 대면부터 심기가 별로 좋지 안으셨던겄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장군께서 사시던 동상동 관사 바로 아랫집 어느 해군 제독의 부관으로 있던 선배께서 전화를 하였습니다.


지난 겨울에 관사 연료를 쓰던 드럼통이 1개 없어져서 곤란하게 되었는데 그 부대에는 폐드럼통이 많을테니 한 개만 줄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하더군요.


저는 별 생각 없이 폐 드럼통을 한 개 보내 드렸습니다.

다음날 장군께서 부르시더니, 관사 아랫집에 우리 부대차로 드럼통이 한 개 갔다는데 알고 있냐고 물으시더군요.

저는 자초 지정을 설명드리고 여긴 폐 드럼통이 많아서 그중 녹슬고 구멍난 폐 품을 한 개 보내드렸다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장군께서는 몹씨 화를 내시면서 여기 있는 물건이 네것이냐고 하시면서 당장 그것 싣고 나간 차로 가서 다시 반납하라고 하시더군요.

마침 그 트럭이 작업을 나가고 없어 계속 수배하고 있는데, 5분 간격으로 어떻게 되었느냐고 서너차례 독촉을 하시다가 나중에는 흥분하시면서 너 같은 놈은 부관으로 필요 없으니 당장 꺼져버리라고 하시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사전에 보고를 드리지 않고 조치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반성을 하고 있는데 하도 다그치시니 은근히 반항심이 일어 나더군요.

지난 7개월여를 그렇지 않아도 여기 온 것을 많이 후회하고 있었는데 인간적인 모욕까지 당하면서 너 같은 놈은 필요 없다니 오히려 잘됬구나 싶었습니다.

숙소에 가서 짐도 싸고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장군께서 찾고 계신다기에 들어 갔더니 지금 어디서 무얼 하다가 오느냐고 물으시더군요.


부관 필요 없다고 당장 가라고 하시어 인사 참모에게 보고하고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하니 또 화가 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데, 제겐 일언 반구 얘기도 없이 1차로 월남에 파병되는 김포 제 3연대 모 대대로 발령이 났읍니다.

희망도 하지않은 파병, 월남가서 죽던지 말던지, 부관하던 저를 가차없이 파병부대로 쫒아 버리셨습니다.

김포에 부임차 가는 길에 서울에 와서 친한 동기생 집에서, 어머님께 그간의 괴로웠던 제 사정을 설명드리고 하소연 하며 친구와 둘이서 집에서 담가 놓은 포도주를 거의 반독을 비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11시경, 뜻하지 않게도 당시 해군00 함대 사령관 부부께서 친구 어머님께 서울에 오신 길에 인사차 찾아 오셨습니다.


친구 어머님께서는 제 사정을 자초지정 설명을 하시고는 좀 도와 줄수는 없겠느냐고 간청을 하시더군요.

사령관께서는 그날 저녁식사를 마침 김포 해병 여단장하고 하셨다며 당장 그댁에 전화를 하라고 하시더군요.

한참 통화를 하시면서 오 중위를 내일 보낼테니 선처를 부탁한다고 하시며 전화를 끊으시고 내일 아침 찾아가 보라고 하셨음니다.

어제 같은일인데 벌써, 44년이나 지나 갔음니다.


이제는 당시 사령관님께서는 80대 후반이 되셨고, 당시 오 중위도 환갑을 지난지 십년이나 지난 할아버지 의 대열에 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37년만에 이 사실을 공개한것을 용서 하십시오. (처음 이 내용을 발표한 날)

그날 저녁에 사령관님 부부와 저희 둘 그리고 친구 어머님(수년전에 돌아가셨음) 정말 유쾌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빼놓을수 없는 것은, 기가막힌 사령관님의 꼽추 춤과 그리고 술에 취해 정신 나간 새까만 해병 중위가 감히, 한복을 곱게 입으신 사모님의 가슴을 더듬던일. 이 사람아, 이 사람아, 여기가 어디 술집인줄 아나, 그건 마담이 아니고 내 집사람이야, 하시며 소파에서 일어 났다 앉았다 하셨는데, 사모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제 손을 치우시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멋진 분들 입니까.

다음날 새벽 일찍일어나, 간밤의 행실에 대해서 어머님께 꾸중을 듣고는 김포 여단 본부로 달려 갔습니다.

어제 저녁에 00함대 사령관께서 여단장님 뵈라고 해서 왔다고 보고 드렸습니다.


3연대 발령은 취소되었고, 여단본부 정보 참모실에 발령이 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다들 죽으러 간다고 꺼리던 1차 파월을 모면하고 다시 김포 여단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모시던 장군께서는 30여년전 불치의 병을 얻어, 미국까지 가시어 고쳐 보려고 노력을 하셨는데도 결국은 젊은 나이로 돌아 가시고 말았습니다.

미국에서 관으로 돌아 오시던날 저는 김포 공항에 마중을 나가 관을 들고 국립묘지에 가서 안장식까지 참석하였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 입니다만 백혈병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 가시면서 모든 장기는 병원에 기증을 하고 빈 몸만 돌아 오셨답니다.


참으로 대단한 결행을 하셨습니다.

너무나 젊으신 나이에 돌아가신 고인의 영령이 평안 하시길 진심으로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