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73) - '해군과 해병대는 같은 뿌리', 창군원로 손원일
우리 삶의 영역은 지구의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바다를 통해 세계로 이어져 있으며, 바다에 우리의 일터와 길이 있다. 바다를 지키고 개척하는 이들이 바로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요, 또 해양 일꾼들이다.
후배 장병들이 올곧은 정신 아래, 힘차게 싸우며 또 싸워서 이기는 강한 해군과 해병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창군원로 손원일 제독을 비롯한 초창기 선배들께서 피눈물 나는 고난을 극복해 가며 맨손과 맨주먹으로 어떻게 이 모군을 일으켰나를 잘 알아야 한다.
나는 지난해 부산에서 열린 해군 관함식에서 한국 최초의 이지스함 등 최신 함정들이 늠름한 모습으로 파도를 가르는 가운데 '대양(大洋)해군'의 위용을 자랑했던 감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50여 년 전에 손원일 제독을 모시고 박옥규 함장 일행과 함께 해군 장병의 각출금, 대통령의 성금 등 그야말로 온 국가가 나서서 마련한 성금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비롯한, 몇 척의 PC함을 구매, 이수했던 일을 떠올리며 '이 자리에 제독님이 함께 계셨다면 얼마나 마음 뿌듯해 하며 기뻐하셨을까' 하고 생각했다.
"바다를 지배해야 선진국 된다."
오늘의 해병대가 있기까지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손 제독과 같은 선각자를 그 시절, 창군 초기에 만난것은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군이라는 사실을 부연(敷衍)해 준다. 충무공 이순신의 해양보국(海洋保國)을 손원일 제독이 이어받아 도도한 역사의 부름에 당당히 몸을 던져 주춧돌을 놓았기 때문이다.
손원일 제독의 부친 손정도 목사께서 해외에 계시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했기 때문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해방 직후 손 제독에게 정치의 길을 권유했다. 하지만 손 제독의 의지는 확고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미래는 바다를 어떻게 지배하느냐에 있다. 세계적으로 모든 선진국들은 해양국가로서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이다. 경제활동을 해상에 의지해야 하는 이 시점에 해군의 증강은 필수적이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한 즉시 진해로 내려가 해군 창군에 모든 정열을 쏟아 1945년 11월 11일 해군의 초석(礎石)이 된 해방병단을 창설했다.
나는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손원일 초대 교장으로부터 수업을 받았고, 여순사건 때는 작전 경과 보고를 하면서 해병대 창설을 건의하였다. 한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인수 시는 손 총장님을 수행하는 명예를 가지는 등 그는 나의 군생활 중 잊지 못할 은인(恩人)이었다. 더욱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해병대가 겪는 고비 때마다 그가 베풀어 준 극진한 배려였다.
구국(救國)의 세 가지 혜안
나는 지금도 손원일 제독께서 국가의 큰 고비마다 선각자로서 혜안(慧眼)을 가지고 내린 세 가지 결단(決斷)을 똘똘히 회상해 보곤 한다.
먼저 첫째 결단은 6·25전쟁 발발 불과 1년 전에 해병대를 창설하여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것이다. 과거 1949년 4월 15일 여순사건 진압과정에서 손 제독은 해병대를 창설했다. 380명으로 출발한 해병대가 오늘과 같이 성장한 데에는 손 총장의 배려와 지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 더군다나 당시 해군은 총 병력 3천여 명에 소해정 등 함정세력도 아주 빈약한 처지로, 해병대 1개 대대 정도의 병력 규모 창설도 감히 어림없는 여건이었음에도 손원일 제독께서는 멸사봉공의 추진력을 발휘해 해병대를 창설하였다.
둘째, 그가 창설한 해병대가 해군의 요람인 진해 군항과 임시수도 부산을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구한 사실이다. 전사를 살펴 설명해 본다. 6·25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북괴 남침으로 전 국토의 5분의 4가 유린당하던 때였다. 인민군 6사단과 7사단은 통영, 진동리, 마산, 진해 앞까지 침공하여 한국 유일의 해군 군항인 진해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진해가 함락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군도 국군도 낙동강 전선 방어 때문에 안중에도 없었다. 이때 해병대만이 통영에서 한국 최초의 해군·해병대 단독 상륙작전을 펼쳐 인민군을 격파해 진해 군항을 사수하고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보답했다. 이를 우리 해병대는 지금도 큰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진해 군항을 지킨 김성은 부대의 영웅적 전투 결과, 적의 거제도 점령계획이 수포로 돌아감으로써 진해는 물론 거기서 차량으로 불과 1시간 거리인 부산의 임시수도를 지켜냈다. 이러한 해병대의 공적은 곧 손원일 제독의 준비된 혜안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손 제독이 창설한 해병대가 '뚫리면 한국이 멸망한다는 부산' 을 지켜 내 구국을 성취한 점이 그의 선각자로서 두 번째 사례가 된다.
세 번쨰 손 제독의 결단은 그가 인천상륙작전과 수도탈환이라는 한미 유엔군 연합작전에 당시 걸음마 단계로 보잘것 없는 해군, 해병대를 참전케 함으로써 나라의 위신을 살리는 자부심을 갖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해군·해병대가 연합군과 어깨를 나란히 전승해 그 진가를 발휘했음은 물론 대한민국이 승리한다는 믿음을 갖게 했고 전후 긴밀한 한미 동맹의 유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손 제독의 선견지명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것이다.
해병 김성은 부대가 진동리 전투를 마치고 파김치같이 지쳐 있을 때 일이다. 낙동강~안강~영천 지구로 이동하라는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지시가 떨어졌다. 만일 그 지시에 따랐다면 해병대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손 총장은 김성은 부대장의 읍소(泣訴)에 가까운 휴식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진해로 이동해 휴식을 취하게 해 주었다.
또 개전 초기에 제주도 해병대사령부가 부산으로 이동한 후 제주 출신 학도신병 3천여 명을 낙동강 전선으로 보내려는 국방부의 지시를 손원일 제독이 막고 이들을 미 해병대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했다. 이 일은 한미 두 나라 해병들이 형제 해병이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해병대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항상 해병대와 함께한 손원일 제독
6·25전투사를 보면 손원일 제독의 해병대 사랑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가 인천상륙에서부터 104고지를 거쳐 서울 시가전까지 신현준 사령관을 통해 해병대를 진두지휘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는 매우 많다.
내가 서부전선 장단 사천 지구에서 전투하던 때 치열한 상호 포격전의 위험에도 아랑곳 않고 방문한 그에게 최일선 엄폐 진지에서 브리핑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렇게 직접 지휘한 경우 외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는 늘 해병대가 편하도록 보살폈다.
서울탈환 이후 육군 3군단 지휘하에 엄동설한의 동해안 산악지구 작전을 마친 다음 김성은 연대장과 내가 우리 해병대 발전을 위해 미 해병대의 작전통제를 원하자 손 제독은 흔쾌히 들어 주었다.
해병대가 해군에 필요한 인사를 요청하면 손원일 제독은 즉각 이를 실행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김성은 대령이 필자(공정식 해군 소령)를 필요한 인사라고 요청하자 손 제독이 그날로 해병대로 옮겨 준 것이다.
손원일 총장은 해병대에 관해서는 신현준 초대 사령관을 비롯하여 역대 사령관들에게 모든 것을 전적으로 위임하였고, 다만 해병대가 처리하지 못하는 예산 등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지원을 요청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손원일 제독의 관심과 지원으로 성장한 해병대와 해군의 관계였으므로 나는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다.
해군·해병대가 서로 긴밀히 협조하라는 손원일 제독의 뜻을 받들어
해병대사령관인 나는 부관으로 민경택 해군대위(왼쪽)를 임명했다.
이맹기 제독의 해군참모총장 취임 후 전속부관들을 서로 교환했고 수시로 방문해 친교관계를 유지하다가 그 직을 떠나 작고할 때까지 돈독한 우의를 가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처럼 모군 해군과 해병대가 긴밀히 협조하며 최상의 모범적 밀월(蜜月)관계를 가진 때는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해병대사령관인 나부터 손원일 제독의 뜻을 항상 기려 해병대의 뿌리는 해군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례는 이어져 그 후임인 함명수, 김영관 해군 참모총장 역시 해병대의 일이라면 최선의 협조를 아끼지 않았는데, 그들 역시 해병대와 해군의 관계가 손원일 제독까지 올라가는 뿌리 깊은 관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군 체제지만 해군에 2개 군대, 해군과 해병대
해병대는 해군에서 갈라져 나온 조직이므로 해병대와 해군은 형제다. 하지만 이러한 끈끈한 전통의 해군과 해병대가 어찌된 일인지 근래에 이르러 소원(疎遠)해지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우리 국군 조직법에는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고 되어 있다. 이는 3군 체제하에서 육·공군과 달리 오직 해군만이 해군과 해병대라는 2개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해군참모총장은 미 해군성 장관 역할도 가지고 있으므로 해군은 물론 해병대의 전력 증강과 발전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해병대의 전력증강과 발전이 해군에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이 같은 선진 미 해군, 해병대의 역학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틀 가운데서 해병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해병대가 한국전과 베트남전을 치르면서 '무적해병'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강한 정신력과 함께 미 해병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한국전은 물론 베트남전을 수행하면서 미 해병대가 똑같은 첨단 장비 등을 지원하는 등 군원을 아끼지 않고 스폰서 역할을 다해 주었기 때문이다. 좋은 예가 육군보다 해병대가 최신 항공대를 보유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해군 역시 미 해군의 군원으로 유지되었다. 전후 미 해군이 '전투함 해외 양여(讓與)제한' 이라는 정책에서 한국만을 자유롭게 하여 PF, APD, DE, DD 구축함 등을 이양한 것도 손원일 제독과 해병대 출신 김성은 국방장관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방 한국 해군과 해병대의 재평가' 계기가 되었다.
즉 우리 해군과 해병대가 6·25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해군과 해병대는 똑같이 발전해 온 것이다.
해병대 스폰서는 해군, 지금이 해병 항공대 최적기
이제 자주국방, 경제 발전, 미군 철수 등으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또 군의 현대화와 더불어 한국 해병대의 스폰서는 미 해병대 대신 우리 해군이 책임져야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해병대 해체 당시 항공전력이 전무했던 해군은 해병대 편제하에 있던 항공대를 비행장은 물론 항공기, 조종사, 정비사 등의 인원까지 모두 접수해 해군 항공단으로 발전시켰다. 해병대 항공대를 희생하면서까지 해군의 오랜 숙원이었던 항공전력을 이룩하게 된 것을 해군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로 인해 김포반도 및 서해 5개 도서를 포함하는 광(廣)정면의 방어작전을 수행하는 해병대가 헬기 한 대 없는 항공 전력이 전무한 '앉은뱅이 해병대' 로 전락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임을 해군은 유념해야 한다.
해군참모총장은 이제부터라도 해병대의 스폰서 역할을 하여 숙원인 공지 기동 해병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제 시작된 해병대 조종사 양성에서 더욱 진일보하여 명실공히 해병대 항공전력이 창설될 수 있도록 통수권자 및 국방정책 입안자들에게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킬 책무가 있다.
북한의 최근 미사일 발사 위협으로 국내외적으로 시끄러운 바로 이떄야말로 해군이 해병대 항공전력 확보에 결단을 보일 최적기(最適期)이다. 나는 우리 해군과 해병대는 대한민국 안보의 큰 양 축(兩軸)이며,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국민의 군대임을 자랑으로 여긴다. 이제 우리 해군에도 제2, 제3의 손원일 총장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러한 소원은 군의 진정한 균형과 발전을 바라는 노해병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깊은 우려(憂慮)임을 감한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신속하게 해결될 것을 기대한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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