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74) - 혈맹의 전우 한·미 해병대'
나는 해군 초급장교 시절 함정 인수단 요원으로 미국에 출장을 갔을 때 처음으로 미국을 보았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을 위시하여 수많은 미군과의 합동작전을 통하여 미군을 보았다.
그 경험은 한마디로 놀라움과 부러움이었다. 특히 미 해병대가 그랬다. 미 해병대는 3개 해병사단과 3개의 해병 비행사단(Marine Air Wing)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타군에 비해 그 규모가 아주 작은 군사조직이다. 그러나 미국의 독립전쟁을 위시하여 제1,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월남전쟁, 걸프전쟁, 이라크전쟁 등에서 놀라운 업적을 남겼고, 미국의 위상을 크게 향상시켰다.
미 해병대는 여러 가지 가치를 나타내는 표현과 상징적인 말들이 많다. 신병훈련소에서는 긍지(矜持), 도전(挑戰), 자제(自制), 봉사(奉仕), 희생(犧牲) 같은 말들을 많이 듣게 된다. 그런 말들이 행동과 연결되도록 모든 교과과정과 훈련 및 일과 속에서 가르친다.
"First to Fight."
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 외쳐 온 "누구보다 앞서 제일 먼저 싸운다" 는 말은 미 해병대의 모토가 되었다. 해병대에게 불가능은 없다. 무엇이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해병대로 보내라(Send in the Marine)" "해병대에 전해 주자(Tell it to the Marine)" 같은 말들이 일반 시민들 속에 퍼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벌어졌던 처참한 상륙작전에서 거둔 눈부신 승리를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도 일반적으로 해병대는 잘 훈련된 용감하고 자랑스러운 전사임을 인정하고 있다.
해병대는 미군이 맡아서 해야 할 가장 어려운 전투임무인 상륙작전과 내륙도시의 시가전 등을 수행한다. 그 외에 대사관 요원의 안전을 위한 경호경비 활동 등과 '신속대응군' 이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그래서 속도速度), 영향력(影響力), 만능성(萬能性)을 고루 갖추어야 한다.
미 해병대의 상징인 지구와 닻, 그리고 독수리 문장(紋章)은 세계적인 원정군으로서의 해병대의 역할과 기능을 나타내고 있다.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는 출전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표현한다.
태평양전쟁 때 이오지마(유황도) 상륙작전을 감행한 제5해병사단은 75퍼센트라는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한 최악의 상황에서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 요새진지를 함락시켰다. 전사상(戰史上) 유례가 없는 끔찍했던 이 상륙작전에서 5해병사단은 일본군 수비대 전사자 22,880여 명보다 7천여 명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여기서는 사단의 모든 대대장 24명 가운데 대부분인 19명의 죽거나 다친 숫자도 포함되어 있다.
해병대의 존재 가치는 충성(semper fidelis)에 있다. 즉 자기 자신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의무에 대한 헌신이다. 이 충성은 하느님, 조국, 해병대 그리고 동료 해병을 위한 자기희생을 말한다.
해병대 동료의식과 연대감은 매우 강하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장진호(Chosin Reservoir) 철수작전에서 전상을 입고 치료 중인 해병들이 야전병원을 탈출해 소속부대로 복귀한 사례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최전방의 해병들은 모두가 나의 가족이었다. 과거와 미래에 있을 그 어떤 친구와도 이럴 수 없다. 나의 믿음에 그들은 결코 배신하지 않고 나 또한 그렇다. 나는 혼자만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전투에서 동료를 위해 즐겁게 목숨을 바칠 수 없는 사람은 해병대가 아니다!"
그들은 이런 전우애를 갖고 있는 군대이다. 미 해병대의 무기와 장비들도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인천상륙작전, 도솔산전투, 임진강 장단 지구 전투 중 내가 본 미 해병대의 무기와 장비들은 정말 장관이었다. 산같이 쌓여 있는 군수품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바퀴와 스크루가 달린 수륙양용 운송장비인 DUKW(다쿠), LVT(상륙 궤도차량), 전화선 설치 전용 지프, 전투 보급식량 C-레이션,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각종 차량 등 하나같이 전투에 꼭 필요한 장비들이었다.
형제 해병
대대장으로서, 전투단장으로서, 그리고 월남전 파병에 관여한 해병대사령관으로서 나를 든든하게 해 주었던 것은 형제 해병(Brother Marine)으로서의 신뢰와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확실하고 충분한 지원하에 진행된 미 해병대와의 여러 합동작전은 우리 한국 해병대를 용감한 해병으로 만든 훌륭한 계기가 되었다.
미 해병대와의 연합작전에는 언제나 함포, 항공, 포병 등 각 분야별 연락장교가 따랐다. 함포 연락장교는 해상의 함포 지원을, 항공 연락장교는 전폭기 출격 지원을 그리고 포병 연락장교는 지상의 포병 화력 지원을 맡았다.
연락장교들은 항상 지휘관인 내 옆을 따라다니다 내가 요청하면 그들끼리 항공 폭격, 함포 사격, 육상 포격 등 어떤 수단이 가장 효과적일지를 협의해 가장 확실한 공격 수단을 택해 지원했다.
또 나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SCR-300(원거리용)과 ANPRC-10(근거리용) 무전기, 유선전화 교환대 등 통신수단은 물론 대전차포인 3.5인치 바주카 로켓포도 각 대대당 8문 정도 지원해 주었다. 이 무기는 적 탱크를 철저히 괘멸시키는 무서운 무기였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도 우리 해병이 싸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짜 형편없는 군대밖에 되지 못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서울탈환 후 승리의 악수를 나누는 한·미 해병대
미 해병대는 걸음마 단계인 초년 한국 해병을 친형제같이 대해 주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우리 해병대는 무기 한 번 제대로 만져 보지 못한 어린 학도병들이 많아 실전을 통해 배워 가며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미 해병대는 우리 해병대를 자기네 부대에 배속시켜 실전교육을 시켜 주었다.
미 해병1연대는 한국 해병2대대, 미 해병5연대는 한국 해병1대대, 미 해병7연대에는 한국 해병5대대가 배속되어 서울수복 시까지 같이 싸우게 해 주었다. 한국 해병대와 미국 해병대를 '혈맹의 전우' 또는 '형제 해병' 이라고 일컫는다. 6·25전쟁 때 그만큼 각별한 인연을 맺었고 그때부터 오늘까지 형제적 우의를 다져 왔기 때문이다.
6·25전쟁 때 한·미 해병대 전투부대가 작전지역에서 처음 대면하게 된 것은 1950년 8월 초, 미 해병5연대가 한국 해병 김성은 부대와 함께 미 육군 25사단에 배속되어 반격작전에 투입이 되었을 때였다. 그때는 양국 해병부대에 부여된 작전상의 임무가 달라, 지휘관끼리 통성명도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작전상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이었다. 그후 두 나라 해병대는 도솔산 지구 탈환작전과 임진강 및 장단 지구 전투에서 강력한 연계작전을 수행함으로써 반석과도 같은 형제 해병의 유대를 조성했다.
국경을 초월한 한·미 해병대 혈맹의 유대는 월남전에서 수행된 베리아 반도 상륙작전을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었다.
연합해병구성군 사령부
1992년 창설된 기존의 CMFC는 연합사의 전략 예비부대 성격으로 전시지원사령부였지만 새로 만들어진 연합해병구성군사령부(CMCC)는 전투작전사령부이다. 이는 지금까지 한·미 해병대가 전시 지원기능의 보조적 역할에 치중했다면 앞으로 전시에 주도적으로 전투 수행 역할을 확대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2008년 CMCC창설은 한반도 유사시 대북 후방기습능력을 대폭 향상시킨 상륙군사령부의 출범인 데다 전작권이 이양되면서 한미연합사(CFC)가 해체되더라도 상륙 돌격부대의 전투력은 더욱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연합해병구성군사령부 현판식
미국은 조국을 위해 싸우는 군인들에게 최선을 다해 지원을 해 주는 나라이다. 그 한 사례가 사단장, 부사단장, 연대장, 사단참모에게 주어지는 전시 작전용 차량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여가용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는 무빙 하우스 같은 것인데, 그 안은 요술 자동차 같다. 그 조그만 공간에는 침대, 책상, 걸상, 서류상자 등 기본적인 집기가 붙어 있었다. 특히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휴대용 전등이었다. 석유곤로 같은 램프였는데 불을 켜니 전등을 켜 놓은 것같이 방 안이 환했다.
나는 미 해병대와 함께 전투를 하면서 그들의 전투 능력, 병영 생활, 해병 전신 등 모든 것을 우리 군, 특히 한국 해병대에 고스란히 옮겨 심고 싶었다. 그러러면 먼저 나라가 부강해야 하고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고 폐허의 이 나라가 굳건히 서야 했다.
사람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비뀐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가난을 마치 운명처럼 생각하던 우리에게 미국은 훌륭한 자극제였다.
'카우보이' 같은 미 해병대
미 해병대는 정말 용감하고 상관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는 군대였다. 그들은 총알이 날아와도 엎드리지 않고 서서 총을 갈기고 수류탄을 던졌다. 마치 카우보이처럼 싸웠다.
도솔산전투 때의 일이다. 나의 전방지휘소에 적의 박격포가 떨어졌다. 고문관 해리슨 중령 차에 앉아 있던 운전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피하라고 했더니, 그는 "내 상관이 여기 있으라고 했다." 면서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목숨이나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미 정부의 철저한 원호시책에 힘입은 바도 있다고 본다. 미국은 국가를 위해 죽거나 부상한 사람들은 국가가 끝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는 나라이다.
극동의 끝, 조그마한 한반도의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죽어간 것도 그들은 미국을 위한 희생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수많은 죽음과 희생을 보면서 나는 우리도 잘살아서 남을 돕고, 공산화의 확대를 막는 우방 미국에게 힘을 보태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때 느낀 감격과 감동들은 뒷날 국회의원이 되어 나라의 경영에 참여할 때 나의 국정철학에 녹아들었다. 또 90을 바라보는 이 순간에도 미 해병대의 긍지와 도전 등 그들의 가치를 본받아야 한다는 내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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