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76) - 해병대 창설이념, '국민사랑'
-부마사태 및 5·17사태, 해병대 부활의 정치적 고려
우리 해병대의 국민 사랑, 즉 애민(愛民)정신은 신현준 초대 사령관이 1949년 4월 15일 창설 기념일 치사에서 제시되어 전통으로 계승되어 온 해병대 창설이념이다.
이 정신과 이념은 제주도 공비토벌 작전과 통영상륙작전, 그리고 한국전쟁 기간 중 어느 전선이나 전투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그것은 오래전 이야기라서 모를 사람이 많다고 한다면 나는 근년의 역사를 들어 '국민을 사랑하는 군대' 해병대의 애민정신을 자랑하고 싶다.
그 정신은 1979년 부마(釜馬)사태를 시작으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했던 1979년 10·26 직전의 여러 소요 사태와 1980년 5·17 비상계엄 사태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최기덕 1사단장
부마 민주항쟁 시위사태를 마치 눈 녹이듯이 처리한 당시 해병대 1사단장 최기덕 소장의 탁월한 지휘 아래 7연대장으로서 부산 소요를 안정시킨 박구일 대령, 5·17 당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2연대장 정행원 대령과 3연대장 옥치진 대령 들의 노고를 나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특히 치안유지에 관해 탁월한 조치를 했던 당시 부산해역사령부 헌병대장이었던 이상무 중령과 73대대장이었던 이재돈 중령, 7연대 작전보좌관 이상로 중위, 2연대 작전 주임 김현기 소령, 3연대 33대당 박정수 중령과 작전주임 심한섭 소령 등은 모두 숨어서 나라와 국민을 구한 공로자들이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전개된 부마항쟁은 10·26사태의 원점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는 크다. 그해 8월 11일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여공들을 경찰이 강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여공 투신자살 사건으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이 내려지고 10월 4일 김 총재의 의원직이 박탈되자 부산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10월 15일 부산 시내 전 대학으로 시위사태가 확산되고 '독재타도' '유신철폐' 구호가 등장하여 경찰이 진압에 나섰으나 속수무챋이었다. 유신정권은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여단에 이어 해병7연대를 계엄군으로 투입했다.
이 회고록에서 타군 부대가 부산의 계엄군으로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다만 내가 여기서 부연(敷衍)하고 싶은 것은 우리 해병대의 '국민사랑' 진압방식이다. 내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언론매체에 소개된 거을 전하는 것이 더 신뢰를 살 것이다.
'맞기만 하는 해병대, 재미 없어 시위 포기'
2007년 10월 창간된 『디앤디 포커스(D&D Focus)』창간호에 실린「해병대 1979년」이라는 기사에서 서정근 기자는 "해병대는 시위진압 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던진 벽돌과 돌맹이에 맞아 피를 흘려도 묵묵히 '행진(行進)"으로만 시위대를 밀어냈다."라고 썼다.
제일 앞줄에 간부와 병장, 두 번째 줄은 상병, 그 뒤로 일병, 이병이 서서 총기 멜빵끈으로 서로 팔을 동여맨 채 시위대에 대응했다. 앞줄이 돌에 맞아 쓰러지면 뒷줄이 앞으로 나섰다. 학생시위대의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해병대원들은 묵묵히 전진만 계속하였고, 나중엔 주변의 시민들이 나서서 시위대를 말렸다는 것이 기사 요지였다.
박구일 7연대장과 이재돈 73대대장
당시 박구일 7연대장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말라. 다만 총은 빼앗기면 안 된다."라고 지시했다. 한 시위 대학생은 "맞기만 하는 해병대와는 재미가 없어 시위를 포기했다."라고 고백했다.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위수령이 선포된 마산 창원에서도 71대대장 구영헌 중령, 72대대장 최근호 중령, 73대대장 이재돈 중령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해병대는 본연의 계엄업무를 수행하면서 싸리 빗자루를 만들어 매일 오전 오후 2시간씩 주둔지 건물 주변과 골목길을 청소했다. 해병대의 의전행사 요원들의 국기 게양식과 하기식, 부대원들의 구보 광경도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도심 교통정리도 해병대의 몫이었다.
이렇게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모습을 보이자 해병대원들이 버스를 타거나 대중목욕탕에 가면 돈을 받지 않는 업소가 늘어났다. 시위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던 음료수와 빵이 해병대원들에게도 제공되기 시작했다.
해병대의 성공적인 부마사태 소요진압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비극적으로 종결되어 계엄활동은 빛이 바랜 듯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계엄업무를 통해 해병대의 국민 사랑 정신은 더욱 빛이 났다고 단정한다.
대략 인구를 추산하여 말하자면 당시 부산이 400만 명, 대구가 250만 명, 울산 150만 명, 마산과 창원이 150만 명 정도로, 모두 합치면 1천만 명 가량 되었다.
서울과 경기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인구였다. 즉 작지만 강한 해병대는 국민 사랑 정신으로 경상남북도 비상계엄 업무를 완벽히 수행하는 한편, 국가 위기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한 것이다. 여기에 비해 100만 명에 불과한 광주에서 발생한 시민항쟁으로 민군 사이에 상처를 받고 그 아픔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부산, 대구, 울산 등지에서 광주와 같이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졌다라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한결같은 국민 사랑, 해병대
다음해인 1980년 5·17 비상계엄이 전국에 확대되어 다시 시민들 앞에 나서게 되어서도 해병대는 한결같이 국민 사랑으로 무난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해병대 1사단 2연대는 그날 새벽 대구(2연대본부, 21대대)에 그리고 3연대가 부산(3연대본부, 31대대 및 32대대)과 마산 경남대학교에 박정수 33대대장이 주둔하여 계엄업무를 맡게 되었지만 시민들과 충돌 없이 맡은 임무를 완수했다.
정행원 2연대장과 옥치진 3연대장은 그 앞 해인 부마항쟁 당시의 박구일 7연대장과 마찬가지로 '시민과 학생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그들을 자극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당시 2연대 및 3연대 작전주임 김현기, 심한섭 소령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이기 때문에 국민이 돌을 던지면 맞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라고 입을 모았다.
'무력(無力)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해병대의 대국민 시위 대처에서 국민들은 신뢰를 보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나는 이것을 국민들이 수여한 해병대에 대한 역사의 훈장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정치군인들이 정권을 이용하여 나누어 가진 훈장은 세월이 바뀌면 삭탈(朔奪)되기도 하지만, 국민이 마음으로 준 훈장은 영원히 빛을 잃지 않는 법이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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